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로나 Apr 12. 2022

안티구아, 나의 해외 방랑벽의 시작

누구나 그렇게 쉽게 시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른, 내 나이 서른에 큰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세 번의 환승을 해야하는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한국을 떠나기 전, 그 때의 나는 지긋지긋하고 구질구질하고 찌질할 정도로 삶에 얽매였으면서도 어지러울 정도로 방황까지 해댔던 20대를 지나고, 결국 서른이 되어서도 아무것도 되어있지 않은 나를 받아들이며 어디로든 달아나고 싶은 심정으로 괴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서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방황만 해 대던 나에게 몇 년전에 과테말라로 이민을 갔던 친구는 그렇게 괴로운 심정으로 자신을 혹사시키며 살지말고 바람이라도 쐬러 오라고 했다. 그냥 여행한다 생각하고, 아니 그것도 싫으면 잠깐 자기 일을 좀 도와달라고, 또 출산 후 산후조리하는 동안 내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내가 한국을 떠나도 되는 많은 이유를 대며 어떻게든 내가 각박한 생활에서 좀 벗어나길 원했다. 간곡한(?) 그녀의 부탁으로 나는 머리나 좀 비우고 오자는 생각으로 출국 준비를 했다. 


사실 출국 준비를 하면서 삼개월이 아니라 어쩌면 삼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언뜻했었다. 그러나 멀고도 낯선 중남미의 작은 나라에 가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그냥 삼개월 푹 쉬다가 와야지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혹시나 한국에 오고싶지 않아지면 어쩌지하는 마음이 생겨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다잡아도 마음마저 오락가락하며 갈피를 못잡았다. 


출국일이 임박해옴에도 마음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고, 그런 마음이 반증되기라도 하듯이 주변마저도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사직서를 냈던 회사에서는 팀장이 극구 만류를 해서 결국 삼개월의 휴가를 얻고, 돌아와서 복귀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으나, 한켠의 나의 마음은 이미 회사에서 떠나 있었고 '그러시던지'라는 생각으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정말 3개월 후에 돌아오면 밥줄은 있어야하니 그 끈을 놓지 않으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삼개월 후에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이메일로 사직서를 보내고 포상금으로 받았던 우리사주도 다 팔아치워버렸다. 깨끗이 나의 흔적을 지우려 했으나 내 생각만큼 깨끗하게 지울 수 없었고, 특히 나의 사수였던 팀장에게는 '죽일년'이 되어 버렸다. 회사와는 퇴직금 등 금전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몇 번의 연락을 하고는 완전히 끝이 났다. 철저히 갑과 을의 상업적인 관계였을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음의 짐이 좀 덜어졌다. 




과테말라에는 안티구아라는 옛 수도가 있다. 친구네와 몇 번 여행으로 다녀왔던 곳이지만 중세시대를 연상시키는 고즈넉한 마을 풍경에 흠뻑 빠져버렸던 나는 가벼워진 마음과 조금 두둑해진 주머니를 가지고 안티구아로 가서 혼자 여행하며 살고 싶었다. 그 동안은 과테말라시티에서 친구의 가게 일을 도와주며 친구 집에서 살았다. 사실 친구는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를 할 동안 가게를 맡아 줄 사람이 필요했었고, 나는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고, 그래서 우리 둘은 서로에게 감사하며 지낼 수 있었다. 친구의 세심한 배려로 불편한 점은 없었지만 혼자 여행을 하고 싶었다. 친구는 아직 스페인어가 서툰 나에게 밖은 위험하다며 절대적 자유를 주지 않았다. 


친구의 몸이 회복되면서 가게에 나올 수 있게 되었을 때쯤에 나는 안티구아에 가서 살고 싶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사실 친구네 가족은 몇 달 후에 과테말라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그때 나도 같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얼마전에 이야기가 되었었다. 갑작스런 나의 독립선언에 친구와 친구의 남편은 걱정을 했지만 나는 혼자서 안티구아에서 살면서 여행도 하고 스페인어도 배우고 싶었다.  


"그 다음에는 뭐 할 건데? 가진 돈 다 떨어지면 뭐 먹고 살건데?"


나보다 사회 생활을 일찍 시작하고 결혼해서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어릴적의 내 친구는 이제 어른이었다. 나의 철없는 생각이 속상한 친구는 현실을 직시하라며 걱정반 짜증반 섞어서 말했다. 친구는 내가 자신의 집에 살면서 가까운 곳을 왔다갔다 여행하며 안전하게 지내다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그리고 내가 여기로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자기 책임이 크다고, 그러니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였다. 하지만 나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다. 내가 선택해서 온 것이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며칠 후 우연히 친구와 친구의 남편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를 걱정하는 친구의 말에 친구의 남편은 지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친구에게 너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동의하는 그 말에 왠지 서운함이 느껴졌다. 삼개월 가까이 친구네 집에서 신세지며 살았지만 한번도 서운한 적이 없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왠지모르게 서운하고 서글퍼졌다. 그의 말이 적나라한 사실이어서 뼈가 아팠다. 


결국 친구는 한 달 정도만 살다가 오는 조건으로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홈스테이 할 집도 알아봐주었고, 내가 안티구아로 떠나는 날 내게 필요한 물건들을 세심히 챙겨서 함께 가서 2주간의 비용도 지불해 주었다. 2주만 있다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면서 언제든 다시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라고 말하며 친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과테말라시티로 돌아갔다. 친구를 배웅하고 오롯이 혼자가 됐음을 느끼며 나의 안티구아 생활은 시작되었다. 



안티구아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웠지만 신나고 재미있었다. 오전에는 학교라고 부르는 어학원에서 스페인어를 배우고 오후에는 중앙공원에 앉아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공원에 앉아 있으면 적어도 두 세명의 학교 친구들을 만나게 되어 저녁을 먹으러 가거나 술을 마시러 가곤 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스페인어로 떠들어대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재미있었다. 가끔씩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해졌지만, 더할나위없이 만족스러운 날들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애초에 친구와 한 약속을 깨고 안티구아에서 두 달을 더 머물렀다. 주중에는 스페인어를 배우고 주말에는 가까운 곳으로 가끔씩 여행도 다니면서 한국을 떠나 온 진정한 이유를 찾은 듯 했다. 그리고 두 번 정도 좀 더 싼 집으로 이사를 옮겨가며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친구집에 방문하여 얼굴도 비추고 한국음식도 그리울 새가 없이 먹었다.  


그 이후에 친구의 닥달에 다시 과테말라시티의 친구집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한 달도 안되어서 다시 안티구아로 여행가듯 몇 번이나 다녀갔다. 안티구아는 개미지옥같았다. 한번 그 여유로움에, 고즈넉함에, 한 낮의 단잠같은 달콤함에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나는 이 곳에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안티구아에서 몇 년이라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아낸 방법은 장사 밖에 없었다. 친구가 과테말라시티에서 옷 장사를 하니 나도 이곳에서 작은 옷 가게를 할 생각이었다. 이곳은 한국과 달리 가게에 높은 보증금도 권리금도 없었다. 한 달치의 월세를 보증금으로 꼽아두고 매달 월세만 잘 내면 되었다. 나는 작은 가게를 찾아 다녔지만 마음에 맞는 가게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살사댄스 교습소로 쓰이던 좀 큼직한 곳을 발견했고 생각보다 월세가 비싸지 않아 그곳으로 정했다. 


가게를 정하고 난 뒤에는 친구가 모두 도와주었다. 사실 가장 골칫거리였던 법적인 절차가 있긴 했는데 그것도 친구가 뚝딱 알아서 해결해 주었고, 물건들은 모두 친구가 하는 도매 가게에서 가져다 놓았다. 굳이 인테리어를 할 것도 없었다. 간판도 필요없었고, 벽에 거울이 붙어 있어서 헹거만 몇 개 갖다놓고 장사를 시작했다. 


물론 가게를 해서 큰 돈을 벌지는 못했다. 적자는 아니지만 월세를 내고 내가 먹고 살기에 적당한 만큼 벌어서 유지할 수 있었다. 욕심을 버리니 긴장이 사라지고 기저질환처럼 항상 깔려있던 불안도 없어졌다. 금전적인 여유는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여유가 찾아왔다. 비록 조금 불편한 집에서 살고 뭐든 아껴야하는 생활을 해야했지만 나는 그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친구의 눈에는 그런 내가 안스러워 보였던지 볼 때마다 그만두고 오라고 했다. 너무 일찍 철들고 너무나 현실적인 경제 감각을 지닌 친구의 눈에는 내가 그저 현실을 기피하며 허송세월하는 베짱이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친구는 한국으로 떠나는 그날까지도 한국으로 같이 가자고 나를 설득했으나 나는 이토록 여유로운 안티구아의 삶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 


그 이후로 오롯이 혼자서 안티구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해외 생활은 나에게 계속 달콤함만을 선사했다. 스페인어를 배우며 다양한 국적의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 중에서도 마음이 잘 맞는 일본인 친구 둘을 알게되어 학창시절로 돌아간 것 마냥 재미있는 일들로 하루하루 알차게 보냈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봉사활동이라는 것을 해보고 그 일이 얼마나 가치있고 마음이 벅찬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성장하며 안티구아에서 3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 




나의 해외 방랑기는 이렇게 안티구아에서 시작되었다. 친구가 있어서 쉽게 결정을 하기도 했고, 친구의 도움 덕분에 뭐든 쉽게 해결할 수 있었고, 해외에서 옷 가게까지 할 수 있었다. 친구 덕분에 남들보다 어렵지않게 해외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내내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그 이후로도 해외 생활에 두려움이 없어졌고 나라와 대륙을 넘나들며 해외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는 별다른 고민도 망설임도 없이 짐이 꾸려졌다. 문화의 차이는 있지만 세상 사람들 사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더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 해외 생활이 나에겐 그렇게 낯설지도 어렵지도 않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중남미에서 시작한 방랑이라 그런지 다른 대륙을 갔다가도 언제나 중남미의 에스닉한 풍경이 그리워져서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된다. 지금 나는 콜롬비아에서 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따뜻한 정종 한 잔만큼의 그리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