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로나 Apr 14. 2022

배낭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행 권태기가 왔다. 

내가 메고 다녔던 배낭은 브랜드가 없었다. 아니 무슨 브랜드인지 모른다가 더 정확한 말이다. 나름 스페인의 백화점에서 산 것이라 완전 싸구려는 아니었다. 나는 그 배낭을 10년이 넘게 메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낡지도 않았고 아직 구멍 난 곳도, 헤어진 부분도 없이 아주 튼튼했다. 


그런데 그 배낭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2019년 1월 쿠바 여행을 끝으로 사실 배낭을 메고 여행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쿠바 여행 8개월 후 나는 일 때문에 파라과이에서 콜롬비아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다. 3년간의 파라과이 생활로 잡다한 짐들이 많았다. 웬만한 물건들과 옷들은 학생들에게 대부분 나눠주고 쓰지 못할 정도가 된 물건들은 버렸다. 나는 물건을 잘 사는 편도 아니지만 쉽게 버리지도 못해서 3년간의 살림살이가 제법 되었다. 짐을 분류해서 콜롬비아에서 계속 쓸 물건들은 따로 담아 콜롬비아로 보내고, 나머지 짐들은 큰 트렁크 한 개와 이민가방 하나로 정리가 되었다.


짐을 다 정리하고 나서 보니 캐리어에 넣기에는 크고, 메고 가기에는 거추장스러운 배낭이 덩그러니 남았다. 평소의 나 같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캐리어에 넣든지, 아니면 기내용으로 메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3년간의 잔재들을 정리하느라 너무 피곤해진 나는 오랜 동행이었던 배낭마저도 귀찮아졌다. 그리고 아주 쉽게 누구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사실 버리기에는 아깝고 아무에게나 주기에도 더없이 아까운 배낭이었다. 


생각 끝에 주위의 지인들 중에 그래도 배낭여행을 할 만한 사람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받는 사람이 기분 좋게 받아줄지, 받고 난 뒤에 다른데 버리지나 않을지 살짝 고민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꺼이 받아주고 아주 잘 쓸 수 있겠다 싶은 사람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함께 근무하는 교원 가운데 자유분방한 여행을 좋아하고 비교적 자주 여행을 다니는 J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1년 더 파라과이에 머물 그녀에게 다른 이러저러한 물건들도 주기로 했으니 아마 기꺼이 받아서 잘 쓰리라 생각되었다. 


"쌤, 배낭여행 좋아해?"

물건들을 전달받기 위해 그녀가 우리 집에 온 날, 난 약간의 기대를 안고 그녀에게 물었다. 

"뭐... 완전 배낭족은 아니지만 자유여행을 선호하긴 해요."

"아, 그래? 혹시 배낭 있어? 큰 배낭 말이야."

"큰 배낭은 없는데, 작은 건 있어요. 여행 갈 때 보통 작은 배낭이랑 작은 캐리어를 끌고 가거든요."

나는 잘 됐다며 내 배낭을 보여줬다. 깨끗하게 빨았지만 색이 바랜 부분이 있어서 낡아 보이긴 했다. 사실 이제껏 배낭을 빨아본 적은 없었는데, 누군가에게 주려니 그래도 깨끗하게 빨아서 줘야겠다 싶어서 너무 열심히 빨았더니 색깔이 빠져버렸다. 그래도 아주 낡아 보이거나 10년이나 멘 티는 나지 않았다. 


내가 내민 배낭을 받아 든 그녀는 이리저리 살피더니 안 그래도 큰 배낭이 필요해서 살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선뜻 받아 챙기지 못하고 받아도 되냐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마냥 기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농담을 섞어서 웃으며 반문했다. 


"오랫동안 메고 다니면서 쌤한테 추억이 많은 배낭일 텐데 이렇게 저한테 버리셔도 되겠어요?"

"쌤이 잘 메고 다니면 내가 더 고맙지. 나중에 콜롬비아에 여행 올 때 메고 와서 나한테 다시 버려줘도 돼."


나의 대답에 그녀는 웃으면서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배낭에 이러저러한 물건들을 챙겨 넣어서 메고 갔다. 나는 배낭을 메고 떠나는 그녀에게도, 그녀의 등에 업혀 떠나는 나의 오랜 동행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나의 오랜 동행이 이제는 그녀와 함께 좋은 곳을 다시 다닐 수 있기를 바라면서 시원 섭섭한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내가 콜롬비아에 온 지 6개월이 지날 즈음에 코로나 19로 팬데믹 세상이 되었다. 여행은 꿈도 못 꾸게 되었고, 해외로 파견 근무를 나왔던 한국인들도 대부분 의무적으로 귀국을 해야만 했다. 그런 여파로 그 배낭을 메고 꼭 콜롬비아로 나를 만나러 오겠다던 J도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영구 귀국을 해야만 했다. 급하게 주변 정리를 했어야만 했던 그녀에게 내 배낭은 어떻게 했냐고, 혹시 정말 버리기라도 했냐고 묻지 못했다. 


나에게나 애틋한 물건이지 그녀에게는 다른 이가 쓰다가 준 한갓 낡은 배낭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에 버렸다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제발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서, 내가 모르는 누군가 일지라도 나보다 더 잘 쓰기를 바랄 뿐이다. 배낭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그 쓰임이 다 했을까가 더 걱정이 된다. 




여행에도 권태기가 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 배낭이 내 손을 떠난 후에 난 여행을 한 번도 떠나지 못했다. 가장 큰 원인은 팬데믹 때문이지만, 팬데믹 이전에 한차례 있었던 방학에도 나는 움직일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여행 권태기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방학 내내 집에 머물면서도 가까운 곳 조차도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새로운 나라에 와서 적응기도 지났고, 의식주 생활 기반도 거의 다져져서 한 숨 돌리고 충분히 쉬기도 했는데, 두 달간의 자유시간 동안 도통 여행을 떠날 엄두가 생기지 않았다. 그때는 여행에 대한 설렘보다는 권태로움이 더 컸던 때였다. 


여행에 대한 권태로움으로 자발적 집순이가 되어 한 학기를 보내고 다음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코로나 19가 세상을 덮쳐 팬데믹 세상이 되었다. 그로 인해 가까운 곳조차 여행을 떠나기가 두려워졌기 때문에, 아니 이동하는 것을 삼가야 했기 때문에 강제적인 여행 휴식기에 들어가야 했다. 난 팬데믹 이후로 내가 사는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다. 한국에 가도 되지만 비행기를 두세 번 환승해서 2박 3일 만에 한국에 가는 그 길이 너무나 멀고 두렵기도, 또 귀찮게 느껴져서 아직까지도 콜롬비아에서 집콕 생활을 하고 있다. 


여행 권태기로 인한 자발적인 휴식기를 충분히 갖고, 팬데믹으로 인한 강제적인 휴식기도 넘칠 만큼 갖고 나니 이제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서 잘 쓰이길 바라는 나의 옛 배낭도 자꾸 생각이 난다. 그 배낭이 내 손을 떠나서 여행 갈 기회가 생기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내 손을 떠날 때 여행할 의욕마저도 떠나 버린 것일까....... 혹은 다시 배낭이 생기면 여행 갈 수 있는 세상이 될까? 사라졌던 의욕도 다시 충전이 될까? 등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인터넷으로 배낭 쇼핑몰을 자주 기웃대곤 한다. 조만간 배낭을 하나 구매해야겠다. 어쩌면 머지않아 팬데믹 세상이 종식되고 다시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안티구아, 나의 해외 방랑벽의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