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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28. 2018

유영하는 밤

온도가 낮아지면 소리의 속도가 늦어진대요

  그는 보통 밤 아홉 시 반에서 열 시 사이에 왔다. 아침에도 반듯하게 매지 않았을 듯한 적당히 느슨하게 풀린 타이와 정반대의 정확하게 접힌 커프스, 검지손가락의 도톰한 은반지. 사람이 많은 틈 사이에서도 그를 짐작하게 하는 몇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 짐작을 확신으로 바꾸는 것은 그가 매일 고르는 캔 맥주 하나와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고른 것이 거의 분명해보이는 안주 몇 개였다. 취향을 도통 알 수 없게도 어느 날은 어린이용 칼슘 치즈였다가 어느 날은 와사비 크래커였다. 그리고 보통 편의점 오른쪽의 아파트 단지 쪽으로 걸어갔다. 봉투에 담지 않은 캔 맥주 하나를 마시면서.

  십 분 전, 학원을 마친 중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아이돌 그룹의 사진이 인쇄된 초콜릿 잔뜩 골랐다. 자신이 원하는 아이돌 멤버의 초콜릿이 보이지 않는지 새 것을 꺼내줄 수 없냐는 말에 그녀는 무심히 그게 마지막 상자야,라고 말했고 아이들은 마지막이라는 말에 아쉬운지 남아있는 초콜릿을 몇 개 집어들었다. 하지만 상자에는 같은 얼굴이 인쇄된 초콜릿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초콜릿을 다음으로 집어든 사람은 그였다. 시계는 정확히 여덟 시였다. 그녀는 시계와 초콜릿, 그를 번갈아보았다. 

  그리고 하마터면 

  “오늘 일찍 퇴근하셨네요.”

라고 말을 걸 뻔했다.

  그동안 그에게 건넨 말이라곤

  “봉투 오십 원인데 드릴까요?”

  “칠천팔백 원입니다.”

  “할인이나 적립 카드 있으세요?”

  “영수증 드릴까요?”

  “안녕히가세요.”

  정도가 전부였다. 서로에게 유의미하다고 여길 수 있는 대화는 전혀 없었다. 그는 거의 네, 아니오 정도로 답을 했을 뿐이다. 한 번은 원 플러스 원 제품이니 하나를 더 가져와야한다고 했을 뿐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다. 

  “이 초콜릿 원 플러스 원이에요. 하나 더 가져오셔야해요.”

  그는 아, 하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후 초콜릿을 하나 더 가져왔다. 그 대화는 그가 아니더라도 거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했기 때문에 그녀의 말만을 따로 떼어놓으면 상대는 그가 아니라 누구라도 크게 달라지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초콜릿 하나를 내밀며

  “이거 드세요. 저는 하나면 충분해서요.”

라고 말했다. 그가 지금 내민 초콜릿은 그때 그 초콜릿이다.

  “천이백 원입니다. 할인이나 적립카드 있으세요?”

라는 그녀의 물음에 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뭔가 어색해서 그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봉투 오십 원인데 필요하세요?”

  기껏해야 한 뼘 크기도 되지 않는 초콜릿 하나를 사는데 봉투가 왜 필요하겠어,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그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어깨 너머의 창밖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후에 내리던 비는 해가 지면서 기온이 더 떨어졌는지 눈이 되어 아주 느리게 내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라디오를 켜두었다면 디제이가 눈이 온다며 겨울이나 눈 그것도 아니면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노래를 선곡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녀는 그에게 불쑥 말을 건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눈이 오네요. 온도가 낮아지면 소리의 속도가 늦어진대요.”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낮아진 온도만큼 느린 말투로 말했다. 

  “오늘은 원 플러스 원이 아닌가봐요.”

  “아, 네. 행사가 지난주에 끝났어요.”

  그가 말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가 카드를 돌려주자 그가 초콜릿을 그녀에게 밀어주며 말했다.

  “이거 드세요.”

  그가 문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눈송이들이 쌓여 만드는 고요 때문일까. 그녀를 그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어쩐지 앞으로도 계속 그 방향을 알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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