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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14. 2017

그냥, 사랑이 필요해

우리 그냥 모르자. 알지 말자. 이름도 나이도 사는 지역도 아무 것도.

  여행은 저마다의 이유나 핑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그저 그냥이라는 말로 설명되기도하는데 나는 그 그냥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별 의미도, 특별한 감정도 없는 그냥을. 


  보름 넘게 한국인을 전혀 만나지 못한 라오스 남부 여행 끝에, 어제 루프탑 레스토랑에서 한국인이 분명해보이는 그녀를 만났다. 만났다기 보다 노트북을 앞에두고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전화를 하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정확한 한국어로 전화를 하고 있는 그녀는 무언가에 단단히 화가 났지만 그것을 참으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따금 앞에 놓인 맥주를 벌컥 벌컥 마셨다. 그녀의 잔이 비기 전에 웨이터가 와서 다시 맥주를 따라줬고, 그녀는 그때면 미간에 잔뜩 잡혔던 주름을 풀고 싱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전화를 끊고나서 휴대폰을 뒤집어 내려놓았을 때,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시죠?"


  살짝 불쾌한 듯한 표정이 읽혔지만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부르며 말했다.


  "네, 맥주 한 잔 하세요."


  그녀는 여행에세이를 쓰는 작가라고 했다. 책 제목을 물으니 책과 자신을 동일하게 보는 것이 싫어 말해주지 않겠다며 웃었다. 에세이면 작가의 이야기가 아니냐고 물으니 요즘은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로 에세이를 쓰는 작가가 얼마나 되겠냐며 맥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나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묻기에 나는 거짓말을 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작곡을 한다고 말했다. 


  "어떤 곡 썼는지 물으면 가르쳐주지 않겠네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말 없이 그녀의 잔에 맥주를 따랐다. 어떤 곡을 썼는지 말해도 아마 당신은 모를거라고 하니 가볍게 그럴 수도 있겠다며 웃어보였다. 그 미소가 처음 보았던 그녀의 너무 달라서 순간 설레버렸다.


  "언제까지 여행하세요?"


  그녀는 내일 비행기로 방콕에 넘어가서 바로 한국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내일 이 시간이면 한국행 비행기 안일거라며 짧은 일정을 아쉬워했다. 나는 그녀가 떠나는 것이 아쉬워졌다. 딱히 깊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서운해졌다.


  "아쉬우면 더 있다 가요."


  내 말에 그녀가 말 없이 한참 나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을 피하고 싶지 않아서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눈을 거두지 않은 채로 손을 뻗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곤 몸을 일으켜 테이블 너머의 나에게 다가왔다. 맥주잔을 잡았었던 그녀의 젖은 왼손이 내 머리카락 속을 파고 들었고, 차가운 입술이 닿았다. 그리고 그 벌어진 입술 사이로 놀랄만큼 따뜻한 혀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와 처음부터 손을 잡고 있던 사이처럼 우리는 손을 잡고 밤거리를 거닐었다. 가로등은 몇 개 없었고 멀리에서 개가 짖는 소리도 들렸다. 그녀가 머문다는 호텔은 멀어졌고 우리는 그저 밤공기만 가득찬 다리 위에 서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거리다 입을 맞췄다. 


  "이름을 알려줘."


  그녀가 말했다.


  "네 이름 먼저 말해줘."


  그녀가 잠시 망설였다.


  "우리 그냥 모르자. 알지 말자. 이름도 나이도 사는 지역도 아무 것도."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라오스에서 돌아와 반 년 쯤 지났을 때, 회사로 아주 작은 상자가 도착했다. 라오스 여행에세이였다. 책 첫장에는 두 달 전에 발표한 곡을 잘 들었다는 짧은 메시지가 써있었다.  


  돌아갈 수 없는 그날이, 그냥- 그리워졌다. 사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냥 사랑을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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