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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13. 2017

아무 것도 아닌 어떤

그런 사이좋은 사이 하고 싶지 않아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저보다 네 살이나 많다구요. 먹은 밥그릇의 수가, 구사하는 단어의 수가, 만난 사람의 수가 저보다 사 년만큼 더 많겠죠. 네, 그뿐이겠어요? 보고 들은 것도 저보다 단 하나라도 더 많은 게 당연하잖아요. 심지어 본인 입으로 말했어요. 제가 어린 애로 보인다나요? 지금까지 열 명이 넘는 여자와 연애를 해왔는데 전부 연상이었대요. 연하는 커녕 동갑도 만나 본 적이 없어서 제가 불쑥 고백하니 난감했대요.


  그런데 말이에요, 저 불쑥 고백한 게 정말 아니에요. 저는 분명히 하나의 신호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썸이라던가 호감의 표시가 아니라면 대체 뭘까 싶을 그런 신호요. 아무리 상냥해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정말 순수하게 다정한 성격이라고 한다면 그건 뜯어고쳐야하는 성격인 거죠.


  제가 감기에 심하게 걸려 아팠던 적이 있어요. 주사를 맞고 약을 타와서 먹었는데도 밤이 깊으니 열이 더 오르더라고요. 이러다가 혼자서 이 작은 방에서 상 치룰 것만 같아서 가디건만 대충 걸치고 택시를 타러나갔어요. 갑자기 차가워진 초겨울 바람에 머리가 깨질 것 처럼 아프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정말 거짓말처럼 그 사람이 나타난 거예요. 제 앞에 차를 세우더니 창문을 내리는 게 아니라 황급히 운전석에서 내려 저에게 달려왔어요. 아프다는 말에 죽을 사들고 제게 오는 길이었다고 하더군요. 저를 조수석이 아닌 뒷자리에 태우며 눈이라도 붙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너무 다정했어요. 몸이 아파서 그의 그런 모습에 제가 녹아버린 게 아니에요. 그날 응급실에서 링겔을 맞는 내내 옆에 있어줬거든요. 제 손을 꼭 잡고. 지금도 왼손에서 가끔 그 사람의 온기가 느껴져요. 그래요, 지방에서 서울 올라와 혼자 자취하는 어린 애가 좀 가여워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어요. 백번 쯤 양보해서요. 제가 그 일로 호감을 갖게 된 건 사실이지만 고백하게 된 계기는 아니거든요.


  그리고 얼마 전 태국 출장을 한 달간 가게 되었어요. 트렁크에는 제 옷이나 화장품 보다 필름와 렌즈, 카메라가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요. 별 신경을 쓰진 않았어요. 어차피 촬영 때문에 가게 된 태국이었고, 휴가가 아니었으니까요. 주중에 내내 작업을 하고, 주말에는 토요일 오후부터 쉴 수 있었어요. 하지만 리조트나 호텔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어요. 밖은 정말 세 걸음만 내딛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게 느껴질만큼 제겐 너무 더웠거든요. 그리고 주중에 내내 일을 해서 그런지 피곤하기도 했고요. 호텔 루프탑에 있는 수영장에서 한 시간쯤 수영을 하다가 나왔는데 낯익은 얼굴을 한 사람이 선베드에 누워있더라고요. 맥주를 마시면서요. 그 사람이었어요. 제가 한국라면 중에 열라면을 제일 좋아하는데 그 라면을 파는 곳이 없다고 SNS에 올린 걸 기억하고 그 라면과 라면포트를 가져왔다며 웃더라고요. 온다는 말도 없이 불쑥, 심지어 본인 휴가 기간도 아닌데 갑자기 태국에 온 거였죠. 금요일 밤에 태국에 도착해서 일요일 밤에 다시 한국에 돌아가는 일정이더군요. 주말 내내 함께 했어요. 그래봤자 겨우 이틀이지만요. 방에서 라면포트에 라면을 끓여먹고 인스턴트 커피까지 한 잔 마시니 피로가 정말 제 안에서 사라지는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한국에서 밤샘 작업을 하며 라면과 인스턴트 커피에 절어있었기 때문인지 피로회복제를 먹은 기분이었죠.


  사람이 돌아간 후에 한참 생각했어요. 다시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말예요. 매일 메시지를 주고 받고, 라면을 끓여주겠다며 이곳까지 날아온 그와 내가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심지어 그 사람은 제가 한국에 도착한 날 공항에 마중을 나왔어요. 한국이 한 달사이에 갑자기 추워졌는데 따뜻한 옷이 없을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면서 말이죠. 그래서 그 사람의 차를 타고 서울로 가면서 말한 거예요.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 거 아니죠?"


  제 물음에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어요. 저를 내려줄 때에야 말했죠. 조금 더 생각해보자고요. 대체 무엇을 얼마나 생각해야하는 거죠? 평소 같았으면 보조석 문을 열어주고, 제 짐을 내려 집까지 가져다줬을텐데 그날을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어요. 저는 캐리어를 끌고 가며 생각했어요. 개새끼라고.


  이틀 뒤에 연락이 왔어요. 제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해서 난감했다고, 그저 좋은 오빠 동생 사이로 생각한다면서 말이죠. 앞으로도 지금처럼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더구요.


  정말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한테 왜 그랬을까요? 사람에게 시간이나 감정을 쏟는 일이 그렇게 쉬울 수도 있나요?


  저는 거절했어요. 그런 사이좋은 사이 하고 싶지 않아요. 어떤 사이가 되지 못한다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사이가 더 나은 거 아닐까요. 저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그리고 그 사람에게 생길 언젠가의 연인에게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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