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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스 Nov 29. 2018

부모는 아이에 대해 얼마나 알 자격이 있을까?


스위스의 부모들은 일반적으로 꽤 쿨해 보인다. 자식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그들이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식을 내가 사랑하는 타인으로 볼 수 있는 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집엔 거주 공간 아래에 별도로 아뜰리에가 있다. 현재는 남편의 서재로 쓰는 공간이지만, 아이들이 십대가 되면 아이들 방이 될 공간이다. 남편은 농단 반 진담 반으로 "여자친구가 생긴 애가 먼저 이사가야지." 란다. 나는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말했다. "그럼 내가 간식이랑 음료수 좀 갖다 줘야지." 그에 아연실색한 남편의 표정. 절대 그러지 말란다.


좀 친해지잔 건데...아...불편하겠구나..

물론 가정마다 각자의 규칙은 다를 것이다. 여기 스위스에도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도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원조를 아끼지 않는 부모도 많고, 부정적인 의미로 양육의 끈을 놓지 못하는 부모도 존재한다. 정도의 차이이지 사람 사는 곳은 비슷비슷한 무언가가 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는, 딱히 보수적인 사람이 아닌데도 내 기준에선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운 가치관에 놀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십대 후반 정도부턴 외박이 허용되는 분위기, 한국에선 당연히 교복입을 나이의 아이들이 당당하게 길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담배면 다행이다-가끔 요상한 냄새를 풍기는 마리화나로 추정되는 걸 놀이터에서 피우는 아이도 보았다.




이 마리화나를 피우던 소년들에 대한 기억이 잠시 나므로, 이 재미있는(?) 기억을 잠시 기록하고 싶다.


출처: Unsplash, Aaron Burden

그것은 어느 늦여름 초저녁, 닉과 노아가 놀이터에서 노는 걸 너무 좋아한 나머지 집에 이만 가고 싶은데, 못 가고 버티고 있는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참 평화롭게 아이들이 놀던 놀이터에 하나, 둘 저녁을 먹으러 사람들이 빠지자- 두 명의 작고 빼빼 말랐지만 눈빛이 마치 굶주인 야수같은 십대 소년들이 시끄러운 랩 음악을 강제로 우리 귀에 때려 박으며 등장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약초(?)들을 말아 피우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들이 초콜렛이라도 되는 듯, 아주 당당하게.


이 소년들의 등장과 동시에 두 그룹의 가족이 동시에 집에 갔기에-힘의 과시에 성공했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그들의 음악 소리는 더 커졌다. 그리고 그 가사는....와, 영어를 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낯 뜨거워서 아이들과 더는 놀이터에 있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그런것도 내용이라면.


난 개인적으로는 힙합 음악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Timbaland. 조금 아재(아줌)인증인가...그래도 좋더라.

그러나 그렇게 어두운 공기를 놀이터에 몰고 오는 십대들은 부모 입장에선 썩 반갑지 않다. 그애들도 어디 갈 데가 없어서 오는 것일테지만. 탈선하기에 브룩이란 동네는 그렇게 재미난 곳이 안타깝게도 아니다.


닉도 좀 무서운지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하기는 커녕- 음악 내용을 이해를 못하니까 박자만 갖고 그것도 음악이라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소년들은 어린애의 순수함(?)에 조금 움찔했다. 그 순간 그 중 한 소년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 아이는 타밀족, 그러니까 스리랑카 내전 때 부모 세대가 스위스로 이주해 오고 이 곳에서 태어난 2세인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아이의 표정에 순간 스친 생각이 어쩐지 그대로 읽어졌다.


'헉, 저 아줌마... 엄마랑 아는 사이면 어떡하지?'


진짜 그게 보였다. 그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심하게 부자연스러워진 그 아이의 행동, 그것은 그 아이의 친구도 슬슬 불안하게 만들었다.


스위스 안에 타밀 사람들의 입지는 꽤 괜찮다고 본다. 난민으로 온 이들은 현재 약 5만명 정도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고, 스위스 문화와 말을 배우고(그게 독일어든 프랑스어든 이탈리아어든 자신의 생활권 언어) 열심히 일을 하며 자녀 교육도 신경을 쓰는 편이다. 조용하고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며 이 곳에 적응하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것이다. 난민 수용의 좋은 사례 중 하나라 할 수 있으나, 내전으로 인해 피난을 오게 된 만큼 자기들끼리는 비정한 역사가 있어서 마찰이 있긴 하다.


아무튼 그렇게 열심히 아이를 키워오던 부모가, 이 녀석이 동네 놀이터에서 저렇게 대놓고 까불고 있다는 걸 알면 어떡하겠는가. 거기다가 엄마들의 입소문이 얼마나 무서운가? 한 소년의 마래 따위는 얼마든지 약초(?)가 불을 머금고 타들어 가듯이 시꺼멓게 만들 수 있다.


두 소년은 그렇게- 자신들의 강한 이미지에 최대한 손실을 주지 않는 범주에서 음악 소리를 줄이고 티나지 않게 조금씩 놀이터에서 벗어났다.




그런 기억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과연 내가 부모 입장이라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테다. 하지만 한 치의 오점도 없는 인생이란 존재할 수가 없고, 인간은 실수로부터 많이 배운다는 걸 감안하면 자식의 인생을 어느 정도 흐린 눈으로 보는 건 불가피한 일 같다. 보고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 하는 여우짓이랄까..


 우리 부모님은 내 핸드폰 문자들을 봐요.
 제가 제  남자친구를 만나면 그땐 절 때립니다.


이번에 트램에서 본 피해상담 전화 홍보 포스터이다. 가족과 문화에 따라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 스위스에서는 어쨋든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를 침해당한 것으로 해석된다.


나는 딸이 없지만, 굳이 성별 운운하지 않더라도 아이가 아직 성인도 안 되었는데 탐탁치 않은 이성과 데이트를 하며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소흘하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해 보이면,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든 이 아이가 뭘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질 것 같다. 믿어줘야 한다- 라는 말은 할 수 있겠지만 아직 세상 사리분별을 못 하는데 어느 정도 가이드 라인을 잡아주는 게 부모 역할 아닌가? 물론 뜻대로 안된다고 아이를 때리면 안되겠지만, 때리지는 않되 어떤 제재나 조언도 하지 않고 표면적인 갈등을 피하는 데에 급급한 것도 폭력과는 다른 부정적인 파급효과가 있을 것 같다.


당연히 이상적인 그림은, 아이와 마주보고 앉아 각자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런 쿨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앞으로의 일이 사실 많이 걱정된다.(특히 진로와 이성 문제) 아이의 생활을 존중해 주면서도 도움이 필요할 때 거기 있어줄 수 있는 건 어떤걸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전 생애에 걸친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한편으론 내가 도움을 주진 못할 망정 방해는 안 되어야 할 텐데, 앞서 말한 그 간식이랑 음료수처럼 말이다. 다른 문화, 다른 세대에 대한 이해는 나이가 들수록 큰 숙제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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