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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스 Dec 24. 2018

나는 크리스마스에 엄마를 더 많이 생각한다.

그리고 엄마는 구정과 추석에.


한국을 떠나 스위스에 오게 된 것이 2012년 2월. 난 그 이후 지금까지 딱 한 번 한국에, 그것도 채 2주가 안되는 기간동안 남편과 시댁식구, 당시 만 두살이 갓 넘은 닉을 모두 대동해 갔었다. 그것은 휴가가 아니라 반 가이드와 통역 업무랄까. 심지어 친구들은 전혀 못 만났다. 여행계획은 한가득이었고, 그 와중에 배를 타고 섬까지 가서 2박 3일을 했으니...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섬

아직도 내가 늘 하는 생각은,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결혼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는 거다. 당시 곧 서른이 될 무렵이던 내 인생에 남편만큼 마음속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준 사람은 없었다. 그의 순한 성격이 참 좋았고, 순하지만 자기 할 일을 하는 차분함이 좋고 한편으론 부러웠다. 남편은 어떤 의미로는 내가 되고 싶어하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남편을 소개하기 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아직 내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고, 슬슬 우리의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던 무렵이었다. 저멀리 스위스에서는 가족들 모두 나의 존재를 알고 있고, 심지어 얼굴이라도 보자고 스카이프마저 했는데 우리 엄마는 딸이 남자친구가 있다라는 사실조차 몰랐으니- 그래서 이모가 동네에 괜찮은 총각을 점찍어 놨는데 언제 한 번 보러올래? 넌지시 농담같이 물어보실 때마다 엄마에게도 남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연애할 때마다 프로 불신러(안타깝게도 난 그런 사람이었다)였던 나로서는 엄마에게 소개할만큼의 확신이 들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엄마는 간혹 스위스에 오셔서 한동안 지내다 한국으로 가신다.


불확실한 시간들을 지나 엄마가 별 반대없이-그러나 거리가 거리인지라 역시 큰 환대도 없이-남편을 사위로 받아들였다. 사실은 내 성격상 엄마가 반대를 했더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잘 모르겠다. 고집은 항상 센 편이었지만, 엄마가 질색하는 결혼이었다면 굳이 밀어붙였을까?그때 당시에는 엄마가 반대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으니 생각할 필요도 없는 가정이었다. 어느날 우리가 결혼한 뒤 3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즈음에 문득 엄마는 내게 말했다.


네가 그때 토비에 대해서 말을 할 때, 내가 말린다고 듣지는 않겠더라고. 말리면 뭐하겠어,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 말에는 이제 품 안의 자식이 없는 헛헛한 둥지를 안고 사는 엄마들 특유의 체념, 쓸쓸함 그러나 그 빈 둥지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다.


출처: pexels.com, evelyn


아이를 둘 낳으면서 나는 때론 그 빈 둥지로 다시 날아 들어갔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옛둥지 말이다. 그러면 엄마는 마치 그 둥지가 비었던 적이 없었다는 듯이 재빨리 다시 분주히 먹이를 날라주고, 새끼가 낳은 그 새끼를 어화둥둥 이뻐하며 보듬어 주셨다. 새끼를 낳은 새끼는 때론 예민했고, 빈 둥지에 갑자기 아이들이 바글바글해진 엄마는 피곤해지곤 했다. 한국에서 늘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였으면 더 아웅다웅 했겠지만, 조금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더라도 우리는 금새 주어진 시간이 얼마 있지 않다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브룩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어느 날부터 살고 있는 한국여자가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엄마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에 관심을 갖는 동네 사람은 많았다. 엄마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꼭 한번씩 올해에는 엄마가 오시는지 묻곤 하니까.


스위스 사람들은 워낙 국제결혼을 많이 하고, 외국에 나가 사는 사람들도 많다보니 남의 일같이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길을 가다가 오랜만에 카티라는 스위스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녀는 나처럼 아들만 둘 있는 사람이었는데, 아들 중 하나가 일본 문화에 이전부터 심취해서 일본어를 배우러 자주 왔다갔다 했었다. 20대 초반인 아들은 그렇게 자신의 삶을 스위스에서보단 일본에서 찾았고, 심지어 마음이 맞는 여자 친구도 생겨서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단다.


와, 잘 되었네요!

응..그렇지...

앗, 미안해요.. 아들을 자주 볼 수는 없겠네요. 저도 우리 엄마랑 그래요.

어쩌겠어. 일본에서 훨씬 행복하고 이젠 결혼도 할텐데. 다 그런거지~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 아직도 열심히 일을 하고 휴무일에는 손녀(첫째아들의 딸)를 돌보아 주는 그녀에게도 텅 비었다가 가끔 차곤 하는 그 빈둥지는 삶의 큰 의미일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서, 나는 그녀에게서 잠시 서로의 가족을 보았다.


출처:pexels.com, pixabay

이제 정신없이 크리스마스가 지나갈 것이고, 바쁜 와중에 나는 또 엄마를 많이 그리워 할 것이다. 캐롤을 부를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2년 전 엄마와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 사진을 볼 때.. 함께 감상에 젖는 게 어쩐지 슬퍼서 보고 싶다는 말도 많이 아끼는 엄마에게, 그래도 보고싶다고 말 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새해를 맞이하고 구정이 되면 반대로 엄마가 내 생각을 많이 하는 시간이 돌아올 것이다. 올해는 구정은 엄마와 같이 보내고 싶은데, 시간을 내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엄마 생신 때라도-

 아, 엄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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