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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스 Dec 21. 2018

첫눈, 눈사람, 크리스마스 마켓

추워도 안 추운 느낌적인 느낌


아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다정한지- 세상 모든 것을 의인화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나도 지금은 세상 건조한 애엄마지만 어릴 때는 고장 나서 버리는 밥솥, 오래된 라디오, 이제 더는 예쁘지 않은 마론 인형 같은 것을 보며 슬픔을 느꼈고, 사람에게 필요치 않아서 버려야 하는 물건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눈사람도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내는 것들 중 하나로 언젠가 만든 작은 눈사람을 한 사흘 정도 냉동고에 넣어 두기도 했다. 결국은 작은 눈사람은 집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지만-



일요일 아침, 깊어가는 겨울과 함께 점점 피곤해지는 몸을 간만에 늦잠으로 좀 풀어보고자 하는데 일찍 일어난 아이들이 소란이었다. 요즘따라 몸이 지치고 힘든 것은 기분 탓일까? 그러나 눈이 오는데, 와서 쌓였는데, 아무리 몸이 물 먹은 솜같아도 나가야지 어쩌겠는가.


나가서 눈사람을 만들어야 겠어.

어, 그럼 나도 나갈게!


흔쾌히 한 대답과는 달리 남편의 눈은 거의 끝나가는 게임 아그리꼴라(Agricola)에 꽂혀 있었다. 원래 보드게임이 원형인 농장을 짓는 게임이고, 귀여운 피규어들로 실제 사람들끼리 서로 머리통을 부여잡고 같이 하는 게 재미있지만-


이렇게 말이다. 출처:위키피디아

저 판을 벌이기 시작하면 당장 아이들이 달려와서, 소, 양, 돼지 모양 피규어를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하며 때로는 판을 뒤짚어 엎기 때문에, 어플리케이션 버젼으로 구매해서 타블렛으로 컴퓨터 플레이어와 맞서 싸우는(?) 것이다. 남편이 좋아하는 휴식 중 하나이고, 나도 한번씩 꽂히면 꽤 열심히 하는 편이지만... 게임 플레이 시간이 30분 정도로 꽤 길고 중간에 끊으면 다른 여느 게임과 마찬가지로 김이 샌다.


다행히 게임은 막바지였고, 내가 아이들과 채비하는 사이 남편도 나갈 준비를 마치고 우리 네 사람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양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사방은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지만 신발에 눈이 묻으면 즉시 젖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 금새 녹을 눈이었다.


집 앞에선 벌써 정원수의 눈이 녹고 있었다.

마음이 더 급해졌다.


눈사람을 만든 뒤에 그나마 오랫동안 망가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곳은 아무래도 시댁 정원이었다. 걸어서 3분 거리이나 아이들하고는 15분도 걸릴 수 있다. 가끔은 뛰어서 빨리 가다가도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뛰기도 하고, 둘째 노아는 별안간 남의 집 정원에 들어가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눈사람 만들기. 우선 늘 그렇듯 가족 내 사진작가인 나는 파바박 추억만들기에 몰입했다. 세 남자는 눈사람 몸통 굴리기 시작, 닉은 작년에 해봤다고 상당히 잘 협조했다. 노아는 형처럼 한다고 자기도 분주히 왔다갔다 하는데, 우주복도 입혀놔서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이 맛에 힘들어도 애들 키우고 사는가 싶다.



가을에 주운 말밤나무 열매로 눈을 하고 당근으로 코를 한 매력적인 미소의 눈사람 완성! 겨울왕국의 올라프 마냥 큰 입은 남편의 솜씨다. 저런 눈사람을 두고 갈 수가 없어서 아이들은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난리가 났다.


아이들이 당근에 관심을 보이고, 노아는 심지어 먹으려고 해서 좀 말린 뒤에 이 당근은 이대로 눈사람 코로 붙어 있을 거라고 남편은 설명했다. 그러자 닉이 눈사람이 녹으면 당근은 어떻게 되냐고 물었고, 남편은 그러면 당근이 땅에 떨어지고 그걸 토끼가 먹을 거라고 말했다.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동화적이고 귀여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닉은 이번에 눈사람이 나오는 동화를 봤었는데, 거기서는 주인공 아이가 눈사람을 생일에 초대해서 굳이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하는 바람에 눈사람이 그 날로 다 녹고 말았다. 그래선인지 집에 데려가겠다는 말을 한 번만 물어보고 다시 묻질 않았다. 이 날 이후로 한 세 번정도? 눈사람이 살아있는지, 그러니까 원래 실제로 생명이 있는 존재인지 물어보았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부단히 찾으려고 하는 아이의 노력이다. 엄마의 인내와 지식이 자주 충분치 않지만, 할 수 있는 한 설명해 주려고 노력중이다.


그러나 잘 되지 않으면 아빠에게 넘기고, 아빠도 하다가 역시 잘 안되면 할아버지에게 넘기는 상황. 그래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다보면 길을 찾겠지? 라고 내심 바란다.



아주 긴 작별의 시간을 마치고 두 아이는 눈사람을 떠났다.


눈은 정말 한 이틀만에 녹아 버렸고, 눈 내리기 전에 쌀쌀했던 날씨는 성미가 좀 풀렸는지 덜 추워졌다.




같은 날 동네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서서 아이들과 나갈 생각에 신이 났지만, 갈수록 아빠와 닮은 닉은 갈 것처럼 하더니 아빠와 집에 있겠다고 했다. 이러다가 조만간 어지간한 축제는 혼자 다닐 지도 모르겠다. 하긴 나 역시도 집에 있는 걸 참 좋아하니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걸어서 10분 거리에 선 크리스마스 마켓을 포기하기엔, 내 마음 속엔 아직도 관광객이 살아있다.


축제라면 달다구리와 드레오르골


사실 크리스마스 마켓은 크거나 작거나 구성은 비슷한 것 같다. 우리 입에 딱히 굉장히 맛있지는 않지만 몸을 덥힐 수 있는 간식과 음료수, 술... 아니면 맛이 있더라도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는 내 탓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 와중에 마신 글뤼봐인(Gluehwein; 글루바인이라는 표기를 많이 보지만, 글뤼봐인이 더 실제 발음과 유사하게 느껴진다.)은 참 따뜻했다. 뭔가 쓰지 않은 한약 느낌이랄까?


두 아이를 갖고 모유수유에 치여 실제로 글뤼봐인을 마신 게 이번 겨울이 처음이었다. 금방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게, 집에서도 한 번 만들어 마셔보고 싶단 생각이 굴뚝 같았다.


생애 첫 글뤼봐인, 무려 공짜였다. 그래서 더 맛있었나...

특히 혼자 유모차 끌고 돌아다니기엔 좀 쓸쓸했을 수도 있는데, 우리 동네에 온 새로운 한국인 지인 덕분에 계속 수다도 떨고 먹고 마시는 진짜 축제 느낌이 난 것 같다. 아무래도 함께여서 더 축제의 기분이 났달까. 늘 보던 동네, 매년 같은 축제지만 눈도 오고 수다도 떨어서 이전보다 훨씬 크리스마스 마켓 같았다.


훨씬 규목가 크고 가게도 많은데 혼지 돌아다닌 취리히 크리스마스 마켓. 심지어 실내라 춥지도 않다.

물론 아이들 키우고 조금 짬을 내서 일도 하고 사느라 지척의 지인들을 자주 못 보고 사는 게, 단순히 스위스에서가 아니라 평범한 어른의 일상이다. 남편만 해도 결혼 전에 친했던 친구가 결혼 후에는 유독  만나기 어려워진 경우가 있다. 우리 애들이 크고 이제 좀 시간이 있으려 하면, 그 친구들이 육아다 뭐다 바쁠 것 같고, 모두 다 같이 시간이 날 무렵이면 다들 꽤 나이가 들어있지 않을까.

그때 다같이 재미나게 놀려면 역시 건강해야지. 가까운 동네 렌츠부르그(Lenzburg)에 살지만 역시나 서로 바빠 자주 보지는 못하는 친구가 그랬다. 언니, 우리 나이먹으면 같이 천피스 퍼즐도 하고 카드 놀이도 하게!


지금도 잘 안 보이는 천피스 퍼즐 조각이 나이 먹어 잘 보일지는 모르지만, 참 로맨틱한 노후계획 아닌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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