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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슬욱 Aug 27. 2019

홍콩의 한적한 바다 힐링 장소

넓은 바다와 수산시장이 있는 사이컹

    평일에 쉬는 날이 생겨 오후 열두 시까지 잠을 늘어지게 자고, 겨우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보니 이미 열두 시 반 정도가 되었다. 전날 피곤이 쌓여서 그런지 다음날 무엇을 할까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바로 잠들어버렸는데 막상 아침에 눈을 뜨니 '뭐할지 대충이라도 정하고 자는 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며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푹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기분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일어나자마자 물을 한 잔 마시러 거실로 나갔는데 비비안은 이미 출근해 있었고, 비비안의 어머니가 오늘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사이컹(西貢)으로 외출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았다. 집에 있어봤자 잠만 자거나 기껏 해봐야 집 앞 도서관이나 갈 게 뻔했기 때문에, 그녀의 제안을 바로 수락했다. 그녀는 한 시간 정도 후에 비비안 아버지와 함께 셋이서 출발할 예정이니 준비하라고 했다.

사이컹에 있는 비비안 부모님의 단골 음식점. 얌차 메뉴와 해산물 메뉴를 같이 판다.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건물과 그 사이로 나 있는 도로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열기, 그 도로 위를 오고 가는 수많은 관광객들과 현지인들, 그 옆을 급하게 지나다니는 자동차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도시 중 하나인 홍콩을 각자 다른 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도로 하나를 지날 때마다 들리는 다양한 언어들, 무표정의 홍콩 사람들, 더운 날씨에도 양복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 걷다 말고 자리에 멈춰 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신나서 떠드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안 그래도 바쁘게 타오르는 도시의 혼란을 가중시킬 수도 있을 법했지만, 그 속엔 이상하게 합의되지 않은 질서가 존재하고 있었고, 이것은 사람들에게 홍콩의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빌딩 사이사이로 난 좁은 도로를 걸으며 양 옆으로 빼곡하게 들어있는 식료품점, 음식점, 술집, 세탁소, 사무실, 편의점 등을 구경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숨 쉬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홍콩에 사는 큰 재미 중에 하나였지만 매일같이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신이 지치기도 했고, 도시의 빠른 생활 패턴이 -사실 도시 자체가 나에게 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럴 때면, 한국에 있는 조용한 시골 동네, 아니면 하다못해 서울 안에 있는 한적한 동네가 그리워지곤 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게 필요했던 것이다.

   사이컹은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는 몇 안 되는 홍콩 지역 중 하나이다. 구룡반도 위, 동쪽 끝에 위치한 이곳은 바다에 접해있지만 홍콩섬이나 구룡반도 침사추이와는 다르게 상업 지역이 아니라 큰 배도 다니지 않고 작은 배만-특히 고기 잡는 어선이 많다-평화롭게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다. 또, 홍콩의 다른 지역에 비해 수질이 상대적으로 좋고 높은 건물이 없이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여기가 홍콩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이다. 사이컹은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지질학적으로 상당한 연구가치가 있는 "사이컹국립지질공원"이 있어 신기한 지형을 감상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 근처에는 작은 섬들이 꽤 많이 있는데, 바다 위로 보이는 섬의 모습은 꼭 한국의 남해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정감이 간다. 1800년대 이전, 홍콩의 발전 전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우리는 한시 반 경, 버스를 타러 집 아래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홍콩은 개인의 차 소유를 제한하는 만큼 버스, 지하철 등의 대중교통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다. 집에서 사이컹은 멀지 않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환승 없이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8월 말의 여름은 매우 덥다. 오늘은 최고기온 36.1도에, 습도는 70% 정도로 매우 덥고 습하다. 게다가 햇빛까지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어 더위는 배가 된다. 흐린 날씨가 돌아다니기에는 더 편하지만, 맑은 날씨는 경치 보는 맛이 있어 덥긴 해도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어도 이마와 콧등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목은 계속 마르다. 이럴 땐 빨리 버스를 타고 싶은 마음뿐이다. 다행히 5분 정도 지나자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버스에 올라타 2층에 있는 좌석에 앉았다. 사람은 많지 않았고 자리는 약 3분의 1 정도만 차있었다. 우리 동네 마온산(馬鞍山, Ma On Shan) 끝자락에 있는 동네 우카이사(烏溪沙, Wu Kai Sha)를 지나면, 거짓말같이 홍콩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산과 나무들 사이로 나있는 1차선 도로는 간간히 차들이 지나갈 뿐이고 도로 양 옆으로는 꽤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평화로운 바다마을 사이컹

    나무들 사이로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자 바다 모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태풍의 영향으로 하루 종일 비가 오곤 했던 홍콩인데, 오늘은 유난히 맑아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햇빛 때문에 눈이 아플 정도였다. 30분 정도 후에 종점인 사이컹 역에 도착했다. 역은 바다 옆에 있었는데, 이곳 역시 높은 건물이 별로 없었고 사람도 많지 않았다. 두 시가 넘어가고 있어 우리는 허기진 배를 먼저 달래기 위해 음식점으로 향했다. 해안가에는 음식점이 밀집해 있었는데, 전부 홍콩식 해산물 음식점 가게였다. 가게 앞에는 한국의 수산시장처럼 싱싱한 해산물들이 수조에 담겨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는데 랍스터, 조개, 생선, 오징어, 전복 등 다양한 종류의 수산물들이 지나가는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자신이 원하는 해산물을 직접 골라 구매한 뒤 식당으로 가져가면, 식당에서는 요리 비용을 받고 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튀기던, 삶던, 굽던- 조리해준다고 한다. 조리 비용이 꽤 비싸 우리는 해산물 요리 대신 점심 얌차(딤섬) 메뉴를 먹기로 했다. 식당 앞에는 바다 풍경을 감상하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야외 좌석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날씨가 너무 더운 관계로 우리는 실내로 들어가서 식사하기로 했다.

가게 앞에 마련된 야외 좌석
음식점 앞에 진열된 다양한 종류의 해산물

    평일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좌석은 반 정도만 차있었고, 손님들도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식사하고 있었는데, 다른 손님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받기 위해 재촉하는 모습이 일반적인 홍콩에서 이런 모습을 보니 참 어색했다. 우리도 천천히 자리로 가서 앉은 뒤 메뉴를 주문했다. 세명 다 아침을 먹지 않고 와서 넉넉하게 음식을 주문했다. 하가오(새우딤섬), 순두부 튀김, 오징어 튀김, 돼지 내장(위) 탕, 야채만두 등이 나오는 일반적인 얌차 식단이었는데, 근처 바다에서 갓 잡은 해산물 재료가 들어간 하가오와 오징어 튀김이 특히 맛있었다. 우리는 모처럼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비안의 어머니는 사시사철 더운 홍콩에는 단풍이 없는데, 한국으로 단풍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하며 언제가 단풍놀이하기 가장 좋은지 나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11월 정도가 좋을 것 같다고 대답했고, 날짜를 찾아본 뒤 말해주겠다고 했다. 비비안의 아버지는 두부에 관심이 많았는데, 한국 드라마에서 봤다고 말하며 한국인들이 출소할 때 두부를 먹는 게 인상 깊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순두부를 어떻게 조리해 먹느냐고 재차 물어서, 우리는 보통 국이나 탕을 끓여 먹는다고 대답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한 뒤, 마지막으로 차를 한 잔 마시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푸짐하게 먹은 점심 딤섬 세트

    햇빛은 여전히 강렬했다. 우리는 양산을 피고 바닷가 주변을 산책했다. 음식을 풍족하게 먹어 배가 불렀고, 기분이 좋아졌다. 음식점 앞바다에서는 어부들이 갓 잡아온 생선을 어선 위에 진열해놓고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판매하고 있었다. 손님은 난간을 앞에 두고 기대서 마음에 드는 생선이 있으면 손으로 가리키고, 어부는 가격을 부른다. 흥정은 안 되며, 생선 종류와 가격은 그날그날 다르다. 손님이 생선을 사겠다고 하면 어부는 그 자리에서 배 위에 놓여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칼을 한 손에 집어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생선을 잡아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공기를 마주한 생선은 온몸을 경쾌하게 흔들어대지만, 어부는 칼질 한 번으로 생선 숨통을 끊고, 다른 도구를 이용해 생선 표피를 연신 긁어대며 비늘을 깨끗하게 제거한 뒤, 긴 막대기가 달린 그물망 안에 손질한 생선을 집어놓고 위쪽 난간에 있는 손님에게 건넨다. 손님은 그물 안에 있는 생선을 받고, 그 안에 돈을 집어넣는다. 가격은 싱싱한 생선 치고 꽤 저렴한데-홍콩에서는 갓 잡은 고기, 생선 등에 프리미엄이 붙는다-이날 우럭 같아 보이는 놈이 100 hkd였다. 홍콩 사람들은 생선을 회로 먹는 경우는 드물고, 구워서 먹지도 않으며 잡내 제거를 위해 파, 생강 등을 넣고 쪄서 먹는 게 대부분이다. 우리는 난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서 사람들이 생선사가는 모습을 보다가, 한 마리 사갈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집 가는 길에 버스를 타야 해서 관뒀다.

바다 위 어선에서 해산물을 직접 판매한다


  사이컹에는 산책하는 강아지가 많다. 홍콩에는 강아지 출입금지 공원이 꽤 있는데, 사이컹은 거의 전 지역을 강아지와 함께 다닐 수 있다. 우리 강아지 다이아몬드도 가끔 이곳에 데리고 와서 산책을 시키지만, 차가 없어 자주 오지는 못 한다. 여기저기서 강아지 모임으로 시끌벅적했다. 강아지들 중엔 골든 레트리버, 래브라도 레트리버, 허스키 등과 같은 큰 종부터 몰티즈, 푸들, 닥스훈트 등 크기가 작은 종까지 다양했는데 강아지들끼리 냄새를 맡기도 하고, 짖기도 하고, 도망가고 쫓아가기도 하면서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상대방과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강아지의 주인들은 한 손으로 잡고 있는 목줄을 잡아당기며 다른 강아지로부터 본인의 강아지를 떼어놓기도 하고, 그냥 놀게 놔두기도 했다. 바다에는 어선 이외에 크고 작은 투어용 배들이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는데, 사이컹 주변의 섬들이나 "사이컹국립지질공원", 혹은 골프장-홍콩에서 가장 있기 있는 골프장이 사이컹 주변의 한 섬에 있다-으로 가는 배들이었다. 밤에는 오징어 낚시를 나가는 배도 있다.

사이컹의 선착장

    비비안 부모님은 더 돌아보고 싶은 곳이 있냐고 나에게 물었다. 아뇨, 더 보고 싶은 곳은 없고 배 위에 있는 물고기 중 하나가 되고 싶어요. 좁은 어장 속에서 간신히 숨을 쉬어가며 사람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그 긴장감 넘치면서 섬찟한 그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요. 만약 내가 마음에 들어 선택당하면 나는 단숨에 어부 숨에 잡혀 도마 위에 옮겨진 뒤 칼질 한 번에 숨이 끊기겠죠. 엄청난 고통이 있겠지만 잠시니까 그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고통 없이 죽는 게 참 복 받은 일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전에, 그러니까 도마로 옮겨지기 전에 어부의 악력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있는 힘껏, 정말 있는 힘껏 온몸에 힘을 주고 그 손을 벗어나려고 한번 발버둥 칠 것 같아요. 만약 성공한다면 내 몸은 배의 옆구리에 부딪혀 입수하거나 배 끝자락 선상에 튕긴 뒤 바다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이제 저의 모험이 시작될 거예요. 어디 있는지 모르는 그녀를 찾아서. 죽을 때까지 찾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왠지 바닷속 어딘가에 그녀가 편히 숨 쉬고 있을 것 같아요.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아주 작은 희망 하나로 지느러미를 끊임없이 움직일 거예요. 시간과 공간이 멈춘 그곳에서 그녀의 품에 영원히 안길 날을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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