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다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던 회사에서 워킹 비자를 대줄 테니, 홍콩에서 오래 거주할 생각이 있으면 정규직으로 같이 일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작년 11월이었다. 작년 6월부터 계속 이어진 시위로 도시 분위기가 상당히 어수선해지면서 홍콩에 있는 여러 기업이 타격을 받긴 했지만, 인도, 태국, 일본, 한국, 중국 등 각국의 기업과 로펌을 연결해주는 회사 업무 특성상 홍콩 시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웬만하면 같이 일하는 게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구정을 전후로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홍콩을 덮친 뒤, 상황은 달라졌다. 2월 초, 회사의 현재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아 새로운 사람을 고용할 만한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당분간 신규 채용은 없을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심천과 국경을 마주하며 중국 본토와 인접한 도시 홍콩. 2003년 사스 발병 당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며 홍역을 치렀던 홍콩이 중국 발 전염병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건물 사이사이로 나있는 좁은 거리에 수많은 관광객, 현지인, 차들이 뒤엉키던 거리는 사람이 거의 없어 홍콩이 맞나 싶을 정도였고, 중심가의 카페, 음식점, 상점 등은 손님이 없어 문을 닫았다. 지하철에도 사람은 없었고, 사람들은 외출을 최대한 줄이고 되도록 집 안에서 생활하며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화했다. 금융 도시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제조업이 발달하지 않은 홍콩은 대부분의 식품, 공산품, 농산품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수입에 차질이 생기는 일이 발생했을 때 사재기 현상이 일어난다. 특히 중국 본토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여름철 태풍이나,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사재기는 절정에 달한다. 통조림, 라면, 냉동식품 등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보관하며 먹을 수 있는 식품과 휴지, 물휴지, 생리대 등의 생필품, 그리고 주식인 쌀 등의 사재기가 가장 심하다. 텅텅 빈 마트의 가판대를 바라보며 이번 바이러스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워킹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만료되는 3월 전까지 무조건 홍콩을 떠나 한국에 돌아가야만 했다. 홍콩에 머물며 계속 일하고자 한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비비안과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좋아하는 도시를 뒤로한 채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웠지만, 그간 워킹 비자 발급 문제로 적잖은 스트레스에 시달렸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지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럼 비비안과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비비안은 홍콩에서, 나는 서울에서. 이 만남이 지속될 수 있는 걸까? 언제까지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건가? 해결한 줄만 알았던 문제가 다시 내 발목을 잡았고, 당장 결론을 내리기 힘든 문제라는 것을 깨달은 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일단 유보하기로 했다.
2월 중순쯤, 한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고, 홍콩 정부는 급기야 한국인 입국을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유효한 3월 중순까지는 홍콩에서 머무는 데 문제가 없으나, 비자가 만료된 다음이 문제였다. 홍콩 정부에서 한국인 입국 금지 조치를 더 강화할 수도 있었고, 한국 정부에서도 한국으로 돌아오는 외국 거주 한국인에 대한 입국 절차를 강화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홍콩에서 머무는 것 자체가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게 되었다. 고심 끝에, 현재 상황에서는 하루빨리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2월 28일 자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때가 23일 저녁이었다.
남은 4일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짐 정리는 금방 할 거고, 집에서 휴식을 해야 하나? 아니면 동네에서 시간을 보내며 마음 정리를 하며 향후 계획을 세워야 하나? 생각해보니 이런 건 한국에 돌아가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뭐가 좋을까? 그래. 남은 시간을 여행하듯이 즐기자. 정든 홍콩을 갑작스럽게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런 것들은 다 잊어버리고 남은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홍콩에서 생활하는 내내 비비안과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긴 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 편하게 여행하지는 못 했던 것 같았고, 또 아직 안 가본 홍콩의 명소들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 홍콩 생활의 마침표를 찍는 홍콩에서의 마지막 여정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