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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름 Nov 17. 2019

쎄씰리아!

Cecilia!

하루에 몇 번이나 내 이름이 불려질까. 어떻게 불려질까. 나를 아는, 내 생활권 안의 사람들에게서.     


엄마는 여전히 나를 아가라고 부른다. 물론 이제는 내가 너무 커버려서 이름으로 부르는 횟수가 훨씬 많아졌지만 종종 그렇다.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나를 알이라고 부른다. 내 전전 학번부터 다음에 다음 학번까지 성만 다른 ‘아름이’들이 한 명씩 있어서 성 뒤에 알을 붙여 구분하곤 했다. 고등학교 친구들 중 몇은 나를 아롱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부정확한 발음이지만 ‘알름’이라고 친근하게 불러주거나, 아름이 어려우면 한이라고 부르거나, 쎄씰리아 혹은 씨씨라고 불린다. 세실리아가 내 영어 이름이므로. 무교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어렸을 때 영성체를 받기 전 할머니가 세례명을 지어주셨다. 세실리아. 조금 간지러운 이름이다 싶다. 어쨌든 적당한 영어 이름 짓기가 난감해서 세례명을 썼다. 동양 친구들은 세실리아라는 이름을 기억하기도 발음하기도 어려워해서 앞자와 중간자의 알파벳 C를 따서 씨씨라고 부르게 했다.       


외에도 불특정 다수에게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호칭이 있겠지. 야, 너, 당신, 인마, 새끼야. 내 지나간 연인들은 나를 자기, 내 사랑 정도로 불렀었고.     


나는 한아름이지만, 나를 부르는 이름이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겠구나를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알겠다. 우리는 각자를 얼마나 많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까. 나를 칭하는 이 많은 이름들이 그들 각각에게 어떤 의미로 새겨져 있을까.     




이름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지만 또 다른 내 이름들은 사회적 역할, 관계, 환경 등 나를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생산되고 소멸되고 변화한다. 뉴질랜드에 있는 지금의 내 이름은 세실리아에 가깝다. 영어로 아름을 발음하기가 외국인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라.      


어쨌든, 고난과 역경을 잠깐 겪다가 다시 이전에 일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단순한 일이 대부분이라 금세 몸에 익지만 비자 타입에 따라 한 사업장에서 3개월 정도밖에 일을 못하는 동남아 친구들이나 남미 친구들은 적응할 즈음이 되면 떠나야 해서 상대적으로 내가 숙련자가 되곤 한다. 새로 들어온 친구들에게 일을 알려주거나 도와주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 보니 일하는 곳에서 나를 부르는 내 이름의 역할이 크게 두 가지가 됐다. 경미한 문제 해결이 필요할 때나 조금 복잡한 일을 해야 할 때, 불만이 있거나 재미있는 일이 생겨서 공유하고 싶을 때.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나를 부른다. 쎄씰리아!라고.     


일을 알려주거나 도와주면서 외국인 친구들과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받기도, 괴상한 제스처를 취하며 장난을 치기도 하는 상대가 될 수 있었다. 외국인들과 친해지기를, 누군가의 앞에서 우스꽝스러워지는 일을 어려워하던 나를 변화시키는 이름을 갖게 됐다. 물론 이 롤이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나를 조금은 재미있고 친근한 종류의 사람이라고, 그게 세실리아라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그들이 나를 부를 때 피곤함 없이 반가운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바라볼 수 있음이 의미가 있다. 세실리아라는 이름일 때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음이.     


지금껏 불렸거나 불리고 있는 내 이름들이 가진 의미는 나나 상대에게 좋은 것이 대부분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줬으면, 혹은 당신은 나를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얼마나 될까도 생각해본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나를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왔는지도.     


이름이 불려질 때 겁먹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부르는 이도, 불려진 이도 모두 기꺼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나는 한아름이지만 꼭 그렇게 불리지만은 않고.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내 이름이지만 그럼에도 꼭 내게서 비롯되지만은 않는다는 걸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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