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 you read just one page for me
몇 학년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마도 2학년쯤? 담임선생님은 반 전체 학생들에게 국어책 읽기를 시켰다. 나는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매끄럽게 읽지 못했고 그 날 방과 후 남아 잘 읽을 수 있게 될 때까지 연습한 후 검사를 통과해야 했다. 세 명쯤 남았는데 내가 그중 한 명이었다. 국어책을 매끄럽게 읽지 못하는 사람이 반에서 세 명 밖에 없다는 충격만큼 고작 세 명에 내가 속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부끄러웠다.
문장을 충분히 연습한 후에 선생님 앞에서 일대일로 검사를 맡아야 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대체 충분한 연습이 얼마만큼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충분함과 선생님이 생각하는 충분함이 다르면 어쩌나 두려웠고, 연습과 다르게 실전에서 실패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나는 그럭저럭 만족스럽지만 선생님의 입장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 걱정됐다. 위축됐다. 이때 이런 벌을 받을 만큼 읽기 능력이 형편없었다고 생각하진 않으나 이 경험이 내 읽기 능력 향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는 생각한다.
어쨌든 갑자기 ‘읽기’에 대한 일련의 기억이 떠오른 건 한 달 사이 책을 읽어봐 달라는 요청을 두 번이나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을 하는 중에 당장 꼭 읽어야 하거나 알아둬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이 어떤 내용을 대신 좀 읽어달라고 하는 부탁 외에 무려 소설책을, 무려 외국인이 읽어달라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의 언어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이 중 한 명은 일본어에도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듣고 싶어 했다. 한국 사람이 발음하는 한국어를. 알아들을 순 없지만 오히려 알아들을 수 없어서 더 민감하게 들리는 발음과 소리를.
참 못났지만 나는 그 두 번의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막상 읽으려니 너무 쑥스러워서 차마 읽을 수가 없었다. 목 끝에 그 페이지의 첫머리가 탁 걸려 나오지 않았다. ‘읽어도 못 알아듣잖아’라는 멋없고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며 그 순간을 넘겼다. 잘 읽어야 한다는 저 혼자만의 부담. 한국인 대표가 된 것도 아닌데, 그들이 2학년 때 담임선생님처럼 내 읽기 능력을 평가할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오면 어쩌지, 너무 진지하면 우스울 것 같고 또 너무 가볍자면 한글을 과소평가할 것 같고, 혹여 버벅대면 바보 같아 보일 것 같고. 하는 ‘할 것 같고, 그럴 것 같고’가 머릿속에 만국기처럼 매달려 나와 결국 책을 덮었다. 수줍은 듯 웃으며.
타인의 시선, 사회의 평가, 다수의 동의. 이런 것들에 내가 얼마나 장악되어 있는지 종종 소스라치게 깨달을 때가 있다. 영어 원서도 아니고 내 나라의 글자가 쓰인 책 한 페이지도 읽어주지 못하는 나를, 그들이 서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 자신에게 서운해하며 또 한 번 느낀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늘 타인의 평가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민하게 구는 게 습관이 된 것인지,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을 타인의 기준으로 설정해두고는 그게 내가 만든 것인 줄 착각하고 사용해왔던 것인지.
때에 따라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이, 우습게 보이고 가벼운 사람이 되는 것이 상대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참으로 호탕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걸, 스스럼없이 바보 같은 표정과 몸짓을 하며 주위를 웃음으로 전염시키는 사람들을 보며 느낀다. 자신의 실수를 이야기하며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는 사람들을 보며 내 속 어딘가 또한 한 뼘 더 자라는 걸 느낀다. 실패나 실수가 젊음의 또 다른 이름임을 아는 사람들이 참 많음을 이곳에 와서야 눈으로 본다. 실패는 누구나 두려워하지만 좌절을 얼마큼 할 것인지가 관건임을 몸소 체험한다.
이제 내 차례가 아닐까. 누군가의 요청에 다른 생각을 보태지 않고 그냥 행동하는 것. 별로 맞아 본 적도 없는 백점 만점의 과반을 쓸데없는 데서 맞고 싶어 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 우스꽝스러워질 수도, 그러면서도 때로는 진지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 상대가 나를 빈틈 많지만 유쾌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