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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름 Oct 13. 2019

그들에게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어

I can not say to them about it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의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관계의 친밀함 혹은 거리감? 자리의 특수성? 개인의 성격?

    

서로의 국적이 달라 제3의 언어를 쓸 때 어쩐지 말은 쉬워진다. 그 언어가 유창하지 못해 생기는 표현의 한계도 여기에서는 꽤 긍정적으로 작용하는데, 서로가 서로의 말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 듣기 때문이다. 이것은 꼭 표현의 적확함에 대한 관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적, 문화, 성격, 상대방에 대한 호감, 외국생활을 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오픈마인드 같은 것들이 섞여 만들어진 ‘감안’이라 서툴거나 말간의 사이가 길어도 기껍게 참아준다.     


물론 제3의 언어를 쓰는 모두에게 나를 열어 보이기가 쉽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같은 언어를 쓰는 모두에게 나를 열어 보일 수 없다는 말도 아니다. 어쨌든,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 앞에서만은 말이 말처럼 달려 나간다. 그런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들을 준비가 된 사람, 눈은 반짝이지만 눈 아래는 차분한 표정이라고 하면 될까. 이런 사람 앞에서는 고삐를 당길 수가 없다. 머리나 마음에 있던, 언젠가는 밖으로 꺼내고 싶었던 개인적인 이야기가 안장 위에서 끊임없이 덜그덕거린다. 그녀는 그랬다. 말 위에서 풀어 내린 말을 곱게 접었다. 너무 빨리 풀어 말이 바닥에 쌓여도 무릎 위에 펼쳐 천천히 접어 올렸다. 나에게는 소중하나 상대에게는 그저 남의 것일 뿐인 내 이야기를 그토록 다정하게 들어주다니 생각해보면 쉬운 일 일리 없다.     


나는 내가 가장 어렵게 끝냈던 연애와 내가 좋아하는 것, 꺼리는 것, 꿈, 여행, 내 부모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자신의 것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하지 못했던 종류의 단어와 말과 문장과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리는 것으로 건넸고 들리는 그대로 들었다.      


소통은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수동적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지나치게 능동적이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 다반사라 그렇고, 말하고 나면 그 뒤를 받치고 있는 의미가 뭘지 너무 많이 생각하고 지레 판단해버려 그렇다. 하는 이는 말에 함유소를 줄이고 듣는 이는 그 자체로만 뜻을 이해할 때 대화는 단순해진다. 그리고 즐거워진다. 이는 어쩌면 서로의 전사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만 가능한지도 모른다. 상대에 대한 미지가 호기심을 부추기는 한 때에만. 수 일 안에 헤어짐이 확실한 관계라면 더욱 그렇고.      


 그는 영화감독이야. 모르겠어. 그를 잊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지금도 그가 자주 떠오르지만 그건 감정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무언가를 극복하지 못한 데에 있어. 그를 존경했어. 내가 원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거든. 그런 그에게 그때의 나는 너무 어리고 가진 게 없어서 늘 바보 같이 느껴졌었어.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헤어진 게 그를 여전히 생각나게 하는 것 같아. 아마 지금껏 어느 작은 것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우린 아홉 살 차이였어.     


 내 첫 번째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웠어. 그래서 헤어졌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아프지 않더라. 고작 한 달 남짓 만났기 때문인지도 몰라. 이후에도 그저 평범하게 일상을 지냈어. 나는 내 룸메이트와 무척이나 친했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우린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 없이 전부 털어놓는 특별한 사이였어. 어느 날 우리는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녀가 날 꼬옥 껴안아줬어. 아침에 일어났는데 그게 너무나 편안하고, 그녀로 하여금 뭔가 아주 다른 감정이 들게 하는 거야. 사랑에 빠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달까. 그 날 그녀에게 고백했는데 그녀는 레즈비언이 아니어서 날 거절했어. 분명 그건 상처였지만 당연히 존중해야 할 부분이잖아. 우린 다시 완전한

 친구로 돌아갔고 여전히 베스트 프렌드야. 그녀는 노래를 아주 잘해. 들어볼래?       


저녁을 먹으면서, 먹고 나서 접시에 양념이 바짝 말라붙을 때까지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단순한 말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생각해본다. 나는 주로 듣는 사람이었나. 말하는 사람이었나. 날카로운 사람이었나. 긍정적인 사람이었나. 누군가를 위해 눈은 반짝이면서 눈 아래는 차분한 표정을 한 사람이었나.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의 차이는, 아마도 신뢰에 있다. 관계의 깊이에 따라 형성된 신뢰가 아니라 상대가 지금 이 말의 뜻을 곡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순한 신뢰. 물론 관계가 깊을수록 상대를 이해하는 깊이가 깊을 확률이 높다. 다만 그만큼 오해의 소지도 높아진다. 기대나 염려가 섞이면 의미가 고조되니까. 지금껏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들려줬던 이들의 이야기를 나는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나 싶다. 비꼬고, 뒤집어 보면서 의심하지는 않았던가.      


많은 말을 하고도 후회보다는 후련함을 느끼고 싶다면,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고도 염려보다는 나를 표현할 수 있었던 것에 안도감을 느끼고 싶다면, 내 태도를 먼저 정비해야 하는 거구나 싶다. 상대의 닫힌 태도가 나를 주저하게 한다고 단념하기 전에 내 태도가 그로 하여금 마음을 걸어 잠그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나의 의심병이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겁먹고 뒷걸음질 치는 내 소심함이, 자기 방어가 어쩌면 상대를 기웃거리다 말게 한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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