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일이 얼마나 많아
빙판에서 넘어져 이에 금이 갔다. 빙판인 게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 살얼음이 얼어 있었던 것 같다. 보도블록에 한 발을 얹자마자 넘어져서 손으로 바닥을 딛는 것보다 얼굴이 먼저 그 위에 닿았다. 그때 이에 금이 갔다.
이에 금이 간 줄은 몰랐다. 그렇게까지 심하게 입술이 바닥에 부딪힌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넘어진 이후부터 이가 시렸다. 화장실 조명에 이를 비춰 거울을 보니 실금이 보였다. 실금을 보고 나니 더 아팠다. 잇몸이 욱신거리는 것도 문제였지만 언제 금 간 아래가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 치과에 가니 -“아시잖아요. 벽에 금 간 거 어떻게 못 하잖아요 그쵸.”- ‘벽에 금 간 것처럼 이에 금 간 건’ 어쩔 수 없고 통증은 신경치료 외엔 답이 없다고 했다. 무신경하고 냉정하게 말하는 의사의 턱을 열댓 번은 돌리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신경 치료를 하면 끔찍이 아프다는 말을 이미 여러 번 들은 후였고 무엇보다 잇몸 색이 죽을 것 같아서 쉽사리 하겠다는 용기도 안 났다. 금 간 이가 하필 앞니였기 때문에.
이에 금이 간 후에 덧없음이 뭔지에 대해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순간이 그 순간일 때 얼마나 중요한지,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다는 걸 체험했다. 이에 금쯤은 가줘야 알 것 같은 일들이 있구나 싶다. 아니지. 경험을 찐하게 하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할까.
우리 집은 종점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아빠가 종점까지 데려다주면 거기에서 버스를 타고 출근을 했다. 종종 종점에 거의 다 와서 신호에 걸릴 때가 있었고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신호를 받는 중에 내려서 정류장으로 가야 했다. 그날이 그랬다. 아빠는 그냥 있으라고 했다. 나는 그럼 버스를 놓친다고 했다. 아빠 말을 들었어야 했다. 버스를 놓치면 됐다. 몇 분 지각한다고 아무도 눈치 주지 않는 회사였다. 야근이 잦았으니까. 그냥 그렇게 하면 됐는데 이상하게 이렇게 하고 싶은 때가 있다. 그날이 그랬다. 지나야 안다. 지나고 나야, 그 일을 그렇게 겪고 나야 이상했다 싶고 우겼다 싶고 왜 그랬을까 싶다. 지나고 나야.
처음 한 달은 잇몸에서 인중까지 말도 안 되게 아팠다. 이후 몇 달은 간헐적으로 아팠다. 아플 때마다 후회했다. 조심성 없는 나 자신을 원망하면서. 통증이 잦아들면서야 생각이 났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다만 내 삶을, 그때의 나를 직접적으로 타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회가 작거나 짧았을 뿐.
의사 말처럼 금이 가고 나면 금 가기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다. 그게 치아든 그릇이든 관계든 스스로든. 금 간 무엇이 결국은 깨져 버릴 때까지 전전긍긍해야 한다. 언제 그렇게 될까 하면서, 사과 하나도 시원하게 베어 물지 못하면서.
조심해야 하는 순간, 예민해야 하는 순간, 살펴봐야 하는 순간은 도처에 널려있는데, 그 순간 전에는 그 순간이 그런 순간일 거라는 걸 알지 못한다. 마음에 금이 간 건 화장실 조명에 비춘다고 보이는 게 아니라 늦게 발견하고는 어쩔 수 없지 포기하면서 지내왔다. 내 맘에 간 금도 못 보는데 남의 금은 오죽할까 싶다. 내가 금 가게 한 누군가도 내 턱을 열댓 번은 돌리고 싶었을까.
그래. 찰나의 순간이 이후의 많은 것들을 바꿔놓는다. 나는 없던 단 공포증이 생겼다. 한 단이든 두 단이든 발을 올리고 내리는 데 겁을 먹는다. 조금 무심한 편이라 곧 잊을 줄 알았는데 이에 금이 간 채로 살고 있어서 그럴까. 여전히 단이 무섭다. 그러면서도, 오래된 일을 두고 여전히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나 자신을 이해하기 어렵다. 코가 까지고, 입술이 부어오르고, 피가 맺혔던 얼굴이 기억나기 때문일까. 밤새 욱신거리며 입을 열지도 닫지도 못하게 아팠던 잇몸의 통증이 기억나기 때문일까. 이렇게 되기 전에,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다른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결국, 이에 금이 간 건 빙판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기 때문일까.
후회가, 지나고 나서 알게 된 그때의 그 순간이 이에 금이 간 것보다 시리고 지나치도록 지나치게 덧없고 소용없음을 이제사 알게 됐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