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guys won’t meet again each others
“그래요. 그 장면처럼요. 저 위에서부터 이 아래 밭을 가로질러 저 윗길까지 전속력으로 뛰어내려 가는 거예요. 그걸 사진으로든 비디오로든 찍어주세요.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걱정 마세요. 여기 모인 사람들을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요.”
마타마타에서였다. 크리스마스 겸 신년 홀리데이 기간 중 친구와 북섬을 여행했다. 잔뜩 기대하고 예약했던 호비튼 영화 세트 투어를 하는 날이었다. 가이드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각각 무리를 이뤄 한 명의 가이드와 함께 투어가 진행됐다. 그때 반지의 제왕에서 나온 장면을 설명하면서 그가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다.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다시 볼 사이가 아니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스스로에게 허용하고 불허할까. 조금 창피해도 괜찮다. 나를 너무 드러내는 것은 다소 부담스럽고. 평소에는 주저하던 행동을 오히려 편하게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사이든 관계없이 매사에 최선을 다할 수도 있고.)
생각해보니 그랬다. (안타깝게도 떠오르는 일련의 기억들이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럴 때면 알 수 없는 용기에 사로잡혀 쉽게 다른 사람이 됐다. 클럽에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엉덩이를 흔들거나, 그룹 미션 중 주도적으로 의견을 꺼내보거나, 누군가와의 대화 안에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인 양, 마치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인 양 굴며 뜬구름을 잡는다거나.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사람’이 되는 건 쉬운 일이다. 그 무리, 그 상황에 가장 부합하는 사람이 ‘잠깐’ 되는 건. 문제는 유지다. ‘척’이 가진 한계는 늘 내가 가늠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고 ‘눈치’는 대게 진정성보다 하찮기 마련이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잦은 이곳에서 나는 자주 ‘다시 만나지 않을’이라는 전제에 기대곤 했다.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에 몇 번이고 그 자리에서 같은 농담을 할 그의 레퍼토리에 웃다가는 어쩐지 씁쓸해졌다. 진짜 내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자신을 포지셔닝하면서 잘못됐음을 느낄 때가 많다. 어떤 때는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기도 하고. 내가 평가하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의 포장지를 둘러쓰면서, 그 모습에 흡족해하면서, 스스로도 속인다.
나는 나로 평생 살아가야 하는데, 그럴듯하게 포장된 그날의 나와 진짜의 나를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이로 착각하며 그때그때 안심해왔지 싶다.
나를 솔직하게 보여줬던 이들과도 오랜 시간 관계를 유지하며 그 누구와 있을 때보다 편하고 따뜻한 마음을 느낀다는 걸 알면서도, 금세 들통 날 자기 포장이 참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면서도, 나는 어쩐지 나를 나로 완전히 인정하지 못한다.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는 일은 얼마나 용감하고 대단하고 순수한지.
다시 볼 사이여도 얼굴 빨개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점잖은 척 같은 건 날려버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메아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주목받는 상황에서 얼버무리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 됐으면 한다. 그의 문장을 통해 내 행동이 지금껏 너무 많이 외부에 기반해 왔구나 부끄럽게 깨닫는다. ‘다시 만날 사이도 아닌데 뭐 .’ 쉽게 말하지만, 우연찮은 우연으로 뜬금없이 난데없이 상상도 못 해봤게 다시 만나기도 하는 이 세상에서 기왕이면 웃는 게 좋으니까, 매일매일 스스로를 맞닥뜨려야 하는 내 세상에서 기왕이면 한숨짓지 않는 게 좋으니까, ‘다시 만나지 않을’이 아닌 ‘다시 만날지도 모를’을 염두하며 살아야겠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