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하반기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저번 달 중반부터 다이어트도 시작했다. 외에도 이것저것 시작했다가 끝내거나, 시작된 줄 몰랐는데 이미 시작됐거나 또 그 반대이거나 한 일들이 많이 있었겠지. 어쨌든 다이어트를 하면서 아침으로 요거트에 사과 반쪽 정도를 넣어서 먹고 있다. 그러자 매일 잘 씻은 사과 한 알이 주방에 놓여있다. 엄마다. 냉장고에 있는 사과를 꺼내 뽀득하게 씻어서 너무 차갑지 않게 상온에 놔둔다. 그럼 나는 그걸 깎아서 반은 요거트에 넣고 반은 잘라서 접시에 담아 엄마에게 건넨다. 우리 둘은 소파에 앉아 영원한 마음의 고향 전원일기를 다시 보며 (요즘 엄빠의 최애 드라마) 아삭아삭 사과를 먹는다. 둘 중 누구도 사과를 부탁한 적은 없었다. 아침상을 치우면서 반찬을 다시 냉장고에 넣을 때, 야채 칸에서 사과를 꺼내고, 설거지를 하고 나서 사과를 씻어 두면, 나는 눈곱을 그대로 붙인 채 슬렁슬렁 가서는 사과를 반으로 쪼개 양쪽을 깎아 반은 깍둑, 반은 길게 썰어 각각 담는다.
하는 김에 하는 자발적이고 기꺼운, 수고라고 할 게 뭐야 싶은 수고를 엄마와 나는 매일 아침 이렇게 나눈다. 어느 날 문득 이 일상이 내 눈에서 줌아웃됐다. 평화롭구나. 사과 단물 같은 아침을 누리고 있구나 싶었다. 전시물을 볼 때도 어느 위치에 서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더 보이고 덜 보이고가 결정된다는데, 나는 지금껏 어느 만큼에 서서 내 곁에 혹은 안에 걸려있는 것들을 보고 있었을까. 너무 조금만 보고 있거나, 곁눈으로 보거나, 왜곡해서 해석하고 있진 않았을까. 그랬을 것이다. 명화가 걸려있어도 무심하면 그냥 지나쳐버려 언제, 거기에 있었는 줄도 모르는 게 ‘보는 것’이라. 모든 걸 볼 수 있지만 또는 보고 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보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것.
얄궂게도 내 것일 때는 잘 못 본다. 익숙하면 더 그렇고. 만약 아침마다 엄마가 딸 먹으라고 사과를 미리 씻어두는 어떤 장면을 티브이로 봤다면, 마음이 금세 따뜻해졌을 것이다. 감동받을 수 있도록 자세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기도 할 테고. 얄궂게도 타인의 것이 되면, 쉽게 긍정한다. 누리는 것을 고마워할 줄 모르는 상대의 태도를 나무라거나 속으로 한심해하기도 할 것이고. 나도 그런 줄은 모른 채.
좋아하는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나이 오십도 안 된 아들 둘, 집에서 삼시세끼 밥해 먹일 줄 누가 알았어’라고. 우리 엄마도 말을 안 해 그렇지, 한창 일을 해야 할 시기에 집에만 있는 날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싶다. 다행히 나는 드라마 속 그들보다 나이가 훨씬 어리고, 우리 엄마도 드라마 속 그녀보다 젊어서 위안이 조금 된다. 답답했다. 공부를 하고 있지만, 과정에 있지만 이게 꼭 핑계인 것만 같아서, 무언가를 자꾸 미루려 시간을 벌고만 있는 것 같아서. 사과는, 엄마가 사과를 씻어두는 것과 내가 사과 반쪽을 마저 깎아 엄마에게 건네고 함께 먹는 이 행위는. 작은 것으로라도 나를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 한 알이고, 당장 작은 것으로라도 이 지지에 보답하고자 하는 내 염치 한 알이다. 이걸 대체 사과 몇 알만에 알아챈 건지. 그러나 저러나 달달한 아침이었다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