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이해하는 것과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의 차이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얼마 전 '왕의 DNA, 극우형 아이' 상담이 한참 인터넷을 달구었다. 교사에 대한 일부 학부모의 지나친 갑질이 문제가 되는 요즘, 한 학부모가 아이 담임 교사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슈다.
요는 ADHD 로 진단받는 아이 들 중 상당수가 극우형 뇌 성향 (좌뇌, 우뇌의 역할이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다는 관념은 이미 사장된 지 오래인 난센스다. 물론 뇌의 기능은 국소적으로 세분화되어있기도 하지만, 사소한 생각과 행동에도 뇌는 전 부위가 조화롭게 작용한다.) 을 보이는 소위 왕의 DNA를 타고난 아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라 좌뇌의 활성으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이가 좋아하는 단 음식, 밀가루 음식을 마음껏 먹고 게임을 실컷 즐기게 하거나 부모나 동생, 교사 등 주변인들이 아이의 감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아이가 원하는 것들을 열심히 들어주도록 했다고 한다.
ADHD 환아는 주의력의 편차가 심하여 충동적으로 직관적인 쾌락에만 이끌릴 소지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의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만 등교는 등한시하거나 게임과 말초적인 자극을 주는 밀가루, 단 음식 을 즐기게 허용하기도 하고, 심지어 동생을 그 아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시녀로 만드는 상담을 진행하였다는 내용을 기사로 접하며 무지에 대한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시도는 그에 희생된 어린 동생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상담 대상 아동 자체에 대한 학대이기도 하다. 한 부모는 상담의 결과 아이가 등교를 거부하고, 욕구가 좌절될 시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며 게임에만 몰두한다는 것이 고민된다는 후기를 올렸다. 아이는 너무도 민감하고도 중요한 시기에 사회성, 그리고 즉각적인 욕구와 충동을 조율하는 능력을 습득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 결과로 부담과 기회가 공존하는 학교 생활, 사회로 나아가지 못한 채 안식과 충동적인 쾌락만이 존재하는 집에서 게임에만 몰두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아이를 위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글을 올렸을 부모의 심정이 가련할 뿐이다.
그런 몰이해가, 스스로의 감정을 돌아보는 방식에 대한 세간의 흔한 '오해'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오해란 바로 스스로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것 과 '최대한 자연스러운 마음 그대로 살아가는 것' 의 혼동이다.
우리는 늘 자연스러움에 집착한다.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할 마음이 잘 들지 않아요.' '나가고 싶은 마음이 안들어서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만 있게 돼요.' 와 같은 흔한 말들 아래 그 집착이 숨어 있다. 이러한 관념의 아래에는 '원하는 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것에 어울리는 마음이 선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드는 대로 행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라는 전제가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행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감정과 느낌이 늘 그 원하는 방향과 일치하기를 바라며, 그렇지 않은 것을 문제로 생각한다.
그러나 감정을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것' 과 감정이 '시키는대로만 하는 것' 은 다른 이야기다. 면담하면서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알면서도 안돼요' 다. 자녀에게 충동적으로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아이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관계에서 문제되는 말과 행동이 그것이 문제임을 알지 못해서 이루어지기보다는, 지나고 나면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이 말만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라는 느낌에 이끌려 '저질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배우자나 말을 듣지 않는 자녀를 마주할 때 드는 자연스러운 감정에 따르자면 격한 분노를 표출하거나 상처입히는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질 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당연함이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인지, 그리고 그로부터 원하는 결과가 도출이 될 지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늘 자연스럽게 편안한 감정 상태를 유지하고, 원하는 것과 마음상태가 자연스레 일치하기를 바라는 관점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그렇게 과거로부터 형성된 마음이 '지금 여기' 의 현실과 맥락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마음이 삶에 명령을 내리는 방식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데 있다.
감정과 정서는 인생을 통틀어 쌓여온 빅데이터의 산물이다. 따돌림의 고통이 큰 아이가 또 다른 대인관계의 고통을 염려하며 타인을 회피하는 것은 너무도 이해할 만 하고 또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이 당연한 것과, '그 감정대로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 은 다른 문제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홀로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우리의 감정이, 그자체로 비난할 수는 없지만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우리의 마음은 좋은 것은 가까이 하고 불편한 것은 피하라는 원칙에 의존한다. 때로는 마치 어린아이가 마트에 갈 때 마다 장난감을 사려고 하고 숙제는 하지 않으려고 하는 정도의 통찰만으로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게 한다. '그때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가 크지? 최대한 대인관계는 피하는게 좋아.' '공부나 일 같은 힘들고 재미없는 것 말고 유튜브도 좋고 마약도 좋으니 지금 즐거운 것들만 하도록 해.' 그렇게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인생일까. 그러한 인위적인 괜찮음을 추구하는 과정이 행복일까.
한동안 '힐링' 을 주제로 한 책들이 유행을 하였다. 맹목적으로 달리는 삶에 쉼표를 주자는 접근이 나쁠 것은 없으나, 조금은 그 메시지가 얕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삶은 분명, 마냥 괜찮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의 이전 글들도 그런 흐름 속에서 그런 천편일률적인 듣기 좋은 이야기, '마음이 좋아지는 방법을 소개하는 글'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글솜씨를 탓해야 겠으나 나는 그러한 몰이해가 속상하고 또 불쾌했다.
그 불쾌함의 이유는, 나는 오히려 삶이란 인위적인 괜찮음의 연속일 수 없다는 한계를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험생이 시험이 두려운 이유는 그만큼 그 시험이 삶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요하지 않은 시험이라면 두려울 이유가 없다. 그러나 '두려움이라는 정서' 자체는 회피에 연결되어 있다. 감정은 이를 위협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를 피하는 것은, 이해는 되지만 자신의 삶과 미래를 위한 결정이라 할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두려움은 부정적인 것인가? 애써 좋은 말로 잘 될 것이라 다독이며 굳이 무마해야 할 심적인 악일까? 오히려 그가 그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잘 살아가고 있다는 신호이지 않을까? 큰 시험을 앞둔 수험생에 필요한 것은 당연한 긴장과 두려움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일지도 모른다.
'괜찮아야 한다는 강박'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원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 은 오히려 불편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강박을 부른다. 그렇게 우리는 부담감을 이유로 소중한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하거나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도전을 회피한다. 어떻게 해도 괜찮아지지 않는 마음을 어떻게든 좋게 해야 한다는 본능은, 결국 우리를 소중한 삶의 순간들로 부터 모두 물려나게 한다.
'Spoiled child' 라는 용어가 있다. 직역하자면 망쳐진 아이 정도가 될 것이다. 떼를 쓸 때마다 다 받아주고, 해달라는 대로만 해주고, 규율이나 틀 없이 무절제하게 양육된 아이를 표현하는 단어다. 아이의 미래가 걱정이 될 뿐 그 아이의 마음 자체는 편안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부모 이외에 세상은 무한한 욕구의 충족을 시켜주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아이들은 부모의 틈바구니를 떠나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그동안은 비로소 접해보지 못한 틀과 규범 앞에서 불안해지고 두려워진다. 심지어는 그로 인한 고통의 화살이 무한대의 사랑을 제공해줬던 부모에게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한 투정을 받아주는 것 역시 부모 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치않는 방향으로 나를 이끄는 마음, 두려움과 무력함이라면 모두 피하려고만 하고 일시적인 즐거움만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망쳐진 아이'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녀석은 쉴 새 없이 부정적인 감정을 내뿜으며 왜 나의 삶이 잘못될 수 밖에 없는 지를 반복하여 설파한다. '저 사람도 나를 싫어할 수 있으니 피해야 해.' '그 일도 예전에 그 일처럼 무의미하거나 실패할 것이기 때문에 시도해서는 안 돼.'
진심으로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한다는 것은 그러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고 그대로만 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마음을 위하는 일이다. 과거의 아픔이 현재에서 재경험되고 또 재생산되지 않도록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그러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잊지 않고 추구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어느 무엇보다 따뜻한 위로이다.
대개 우리는 행복하고 또 사랑하며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삶은 종종 그러한 자연스러운 바람을 무참히 꺾기도 한다. 분명 우리는 상처입을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배신당할 수 있고, 버림받을 수 있다. 비록 그렇더라도, 그러한 과거의 경험들이 강렬한 아픔이 되어 지금의 나를 압도해 오더라도 나는 당신이 당신이 원하는 당신의 모습, 당신이 살아가고 싶은 삶의 방향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밀려오는 무력함과 불안, 내 삶 전부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 느낌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르다고 하여 애써 이를 무마시키거나 '좋은' 방향으로 억지로 돌리려 하지 않기를 권한다. 대신 다독이듯 따스히 이야기해 주면 좋겠다. 네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를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너무도 그럴 만 하다고.
그리고 제안하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나아가자고. 나와 나의 감정인 너, 우리의 아픔이 더욱 심화되고 일상을 더욱 옥죄는 길 길 대신 우리가 바라는 삶, 가장 사소하지만 용기가 필요한 일상으로 나아가 보자고. 우리가 정말로 원했던, 불편하지만 따뜻하고 행복한 그 길을 기꺼이 가 보자고 손을 내미는 것이다.
매번 장난감을 사달라는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은 그 요구를 모두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당연한 마음을 이해해 주면서도 매번 그럴 수는 없는 것이 삶임을 알려주는 것, 또 그 좌절을 다독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신을 기다려본다. 불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에게,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나는 오늘도 그 불편함을 딛고 나 자신을 위한 하루를 보낼 것이라 용기 내어 이야기하는 당신을 기대한다.
P.S.
사족을 붙이자면, 결코 거창할 필요는 없다. 미루던 공부를 위해 책을 펴거나 오래 보고 싶었던 그에게 연락을 하는것, 세수를 하고 필요한 물건을 사러 집 밖을 나서거나, 이왕 나선 김에 꼭 들리고 싶었던 카페에 들러보는 것이다. 무기력하고 지친 느낌이 없어 '저절로' 일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것만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좋다. 무력한 그대로 당신에게 중요한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쓰고 있다. 그렇게 우리, 함께 원하는 스스로로의 모습에 오늘도 가까워지자 라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그리고 나의 마음에게 이야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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