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 대한 의심으로 힘든 당신에게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때로 나 자신과 스스로의 삶을 좋아한다는 것이 얼마나 녹록지 않은 일인지를 생각해 본다. 나를 찾는 수많은 이들이 다양한 이유로 자신의 존재 자체 불편해한다.
사랑을 받아 본 기억이 없어서, 시험이든 취업이든 사업이든 시도하는 일들이 반복하여 좌절되어서, 외모적으로 불만족스러워서, 신체적인 불편함이 존재하여서.. 수도 없이 많은 이유로 우리는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
내노라할 만한 직장에 덜컥 한번에 합격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수십 번 이상으로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아도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 무난한 대인관계라는 말은, 사람으로부터의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어떤 이에게는 불가능한 미션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사랑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정일 수도 있다.
그래서 잘 하고 있다, 나는 나를 믿는다 는 자각은 쉽지 않다. 남들만큼 사는 것 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일정한 수입을 통한 사회적 독립, 무난한 대인관계, 안정적인 일상과 보장된 미래.. 남만큼 산다는 기준이 일반적이라 하기 어려운 성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는 스스로를 믿기 위해서는 그정도의, 비일반적이지만 보편적이라 이야기하는 성공의 결과물들을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런 것들을 해낸 사람이다, 그러한 근거가 존재해야 스스로를 믿을 수 있다는 결과론적인 논리이다.
믿음에 전제 조건이 부여되고, 그 조건을 충족한 사람들만이 '스스로를 믿을 특권' 을 얻는다. 그 특권을 소유한 사람들은 이를 통해 자신감을 부여받으며 다음 여정을 나아간다. 반면 그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은 침묵한 채,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소외된다.
어느 정도 스스로를 믿을 수 있어야 이를 바탕으로 다음의 삶을 이어갈 텐데, 그런 믿음을 형성할 만한 과정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고, 그러니 삶을 이어가도 의미있는 변화나 행복 따위가 주어질 확신을 얻을 수도 없다.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근원적인 믿음을 잃어버려 나름의 최선을 한 발 내딛을 용기조차 잃어버렸다 느낌이다.
내가 어떻게 잘못될 수 밖에 없는지, 지금 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삶은 왜 녹록치 않을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생각과 고된 느낌이 밀려오는 것. 이는 과거를 복기하며 미래를 대비하려 하는 인간의 당연한 속성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얼마나 문제가 있고 삶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분석하여,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하고 나아지고 싶은 방법을 찾고 싶은 욕망은 중독성이 있다. 마치 술, 담배, 마약처럼 어째서 우리가 잘못되었는지를 검토하는 생각이 우리에게 스며든다.
그러나 얼마나 자연스러운지와, 그것이 내게 어떤 변화와 영향을 미칠지는 다른 이야기이다. 단짠하고 자극적으 입에 당기는 음식을 계속 먹고 싶지만, 맛으로만 식사를 결정한다면 건강을 해칠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얼마나 믿을만한 구석이 없는 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분석하는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그 결과는 우리의 기대와 반대로 일어난다. 자신과 과거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기 보다는 어째서 삶이 나아지기 어려운지, 왜 스스로를 믿을 수 없는지의 좌절만을 더하기 쉽다.
그간의 나 자신과 삶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냉철하게 돌아보고 이해해 보자는 취지가 물론 잘못되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아픔과 좌절을 되돌아보며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 볼 수 있을 지' 를 생각하는 것과 '지금까지 꾸준히 잘못되고 어그러져 왔으니 앞으로도 그러한 실패를 반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 라는 예측을 하는 것은 비슷한 듯 완전히 다르다.
불확실한 미래가 괜찮을지를 확신하기 위해서는 '최악의 가정에 대한 답 찾기' 라는 난관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과거의 아픔을 바탕으로 어째서, 어떻게 나빠질 수 밖에 없는 지에 대한 생각을 시작하면, 우리는 끝도 없이 우리를 절망에 밀어넣을 수 있다.
그러니 냉철한 이성과 인과론, 사실관계 만로는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기에 충분치 않다. 확신을 주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조금은 다른 형태의 '믿음' 이 필요하다.
억지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안돼, 이런 건 잘못된 생각이야, 나를 믿어줘야해!' 라 다그치는 것은 실효적이지 않다. 그러한 관점은,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는 문제' 를 하나 더 파생시킬 뿐이며, 그런 생각이 드는 나는 잘못된 나 라는 문제적 인식을 추가하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대신 다음과 같은 생각의 흐름, 그리고 믿음을 제안하고 싶다.
'지금까지 고생했던 것들, 실패하고 좌절해 왔던 경험들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너무 당연한 일이야.'
'그만큼 힘들었다는 증거일지도 몰라.'
'다만, 나는 지금 한 번 뿐인 삶을 살아가고 있고, 이왕이면 의미와 행복을 따라가는 삶을 살고 싶어.'
'그러니 어색하고 불편하겠지만, 자꾸만 실패의 아픔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지만 어떻게 내가 잘못되어 왔고, 그래서 앞으로 잘못될 수 밖에 없을 지를 생각하는 대신, 지금부터의 삶에서 어떻게 살아가볼 수 있을 지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지금까지의 삶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아갈 수 있다고, 꾸준히 살아낼 수 있다고 '믿어주면' 어떨까? 라는 따뜻한 제안으로서의 믿음이다.
무조건 인생이 생각대로만 풀릴 것이고, 나는 잘 해낼 것이라 애써 자신하는 마음을 믿음이라 표현하고 싶진 않다. 분명 모든 것이 생각대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으므로 그러한 억지 안심은 삶의 난관 앞에서 힘없이 무너질 것이며, 그 순간 우리는 미뤄왔던 더 깊은 좌절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다른 형태의 믿음을 제안하고 싶다. 모질고 녹록치 않은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지금 이순간에도 끊임없이 고민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격려. 그간의 내가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다독여주는 위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번 뿐인 삶이라면 다가가고 싶은 의미와 행복을 꾸준히 추구할 것이라는 다짐. 그것들이 나의 믿음이다.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는 생각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이다.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 우리는 좀 더 나은 우리가 될 수 있다, 살다보면 아직은 찾지 못한 의미와 행복을 만날 것이다.. 그럴 것이라 확신이 들 수는 없지만, 한 번 뿐인 삶에서 추구하고 싶은 것들이다. 믿기 어려워 믿음이란 단어를 쓴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란 확신이 존재하지 않기에 희망을 품는다.
주어진 삶 동안 원하는 인생을 향하는 문을 반복하여 두드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우리에게는 있다. 그러니 세상이 모두 나를 의심하더라도 나는 내가 오늘 시도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자. 한 번 더 스스로를 믿어주자. 믿을 만한 이유가 없을 수록 더욱 더 한 번, 어깨를 두드려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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