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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티 구구 Sep 20. 2024

연우와 건우

  아까부터 핑크 로즈 립밤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주머니에 넣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곳 매장은 감시가 삼엄하지만, 그만큼 연우 마음에 드는 제품이 많다. 프로럴 머스크 향이 매장 여기저기에서 향을 뿜는다. 요즘 유행하는 향이다. 짙은 아카시아 향만큼은 아니지만, 달콤한 꽃향기가 연우 마음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눈이 마주치면 안 된다. 연우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비비적거릴수록 아르바이트하는 점원 눈에 띄기 쉽다. 한꺼번에 고등학생 여러 명이 매장에 들어온다. 이 때다. 연우는 핑크 로즈 립밤을 슬쩍 손에 쥐고는 다른 코너로 간다. 주머니에 넣지 않은 이유는 혹시나 주머니에서 발각되면 이도 저도 변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손에 쥔 립밤을 소매 속에 감춘다. 이번 코너는 향수 코너이다. 아까부터 플로럴 머스크 향이 났는데, 이번에 제대로 향을 뿌려봐야겠다. 연우는 시향지를 공중에 들어 올리고 향수를 한 번, 두 번 뿌린다. 달콤함 속에 시원한 향이 들어있다. 향 노트를 보니 백합이 있다. 백합 때문일까? 백합은 향이 독하기로 이름난 꽃이다. 노트에는 은방울꽃도 보인다. 연우는 은방울꽃을 떠올리니 사고 싶은 기분에 휩싸인다. 좋아. 이것은 구매하고, 립밤은 접수한다. 계산대로 연한 노랑 빛의 향수를 갖고 간다. 향수액은 살짝 연두빛깔을 머금은 노랑 빛이다. 계산대에 있는 아르바이트생은 연우만 한 나이이다. 향수를 건네자 아르바이트생은 몇 가지 이벤트를 알려준다. 연우는 자신이 소지한 카드를 생각해 보고는 그중에 포인트 차감으로 살 수 있는 이벤트를 선택한다. 그렇게 해도 향수 금액은 6만 원이 넘는다. 향수는 정사각형 상자 안에 고이 모셔진다. 연우는 묵직한 소매를 의식한다. 아무도 눈치를 못 챘다. 인사를 건네며 향수가 든 상자를 아르바이트생이 연우 쪽으로 건넨다. 연우는 깜찍한 눈웃음을 보이며 인사를 하고는 룰루랄라 매장 밖으로 나간다. 차가운 공기를 흡 들이마시고, 핸드폰을 꺼낸다. 건우에게 전화를 건다.


- 나 배고파

- 너 배고프면 전화하지, 나 바빠.

- 야. 나 그날 이란 말이야.

- 그날이 무슨 이웃집 개 이름이냐. 너는 그날만 되면 왜 날 갈구냐.

- 흥... 너 그럼... 연식 선배한테 전화한다.


   건우는 연식 선배를 싫어한다. 특히 연우 볼을 꼬집으며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건우는 더욱 연식 선배를 라이벌로 느꼈다. 연우는 그런 건우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필요할 때 선배 얘기를 꺼내서 속을 뒤집어 놓는다. 연우는 귀염성 많고, 조잘조잘 말을 잘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간파한 듯이 말을 할 때면 솔직히 정이 떨어진다. 그러면 연우는 용케 건우 눈치를 알아보고는 팔짱을 끼며 건우에게 살갑게 대한다. 또 그러면 연식 선배는 술을 자작하면서 건우를 째려본다. 건우와 연식 선배는 동아리 선후배인데, 건우가 다크호스이다. 영어 신문을 어찌나 잘 해석하는지, 다들 건우가 영어 신문을 발표할 때는 동아리 멤버가 거의 전원 참석한다. 연식 선배는 건우를 경계하지만 한껏 포용하고 칭찬을 한다. 둘은 허허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고 서로 뚫어져라 쳐다본다. 둘 사이에 연우가 있다. 연우는 연식 선배가 밥 사주고, 술 사주는 것을 좋아한다. 연우는 동아리에 들어와서 영어는 잘 못했지만, 붙임성이 많았다. 연우는 영어로 대화를 해야 할 때도 한국어를 떠들어댔는데, 여자 멤버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남자 멤버들은 조잘대는 연우를 좋아했다. 왜냐하면, 연우는 파트너 칭찬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연우는 소매에 든 새 립밤을 뜯는다. 연우는 그날이 되면 화장품을 하나씩 슬쩍한다. 그 아슬아슬함을 느끼며 물건을 손에 꼭 쥐어보면 아랫배 통증을 잊는다. 이 버릇은 한 신문기사를 보고 직접 실험을 해보았기 때문에 생겼다. 미국의 할리우드 여배우가 PMS로 상품을 수시로 도난했는데 결국 CCTV에 여러 번 찍혀서 범법행위자로 잡혔다는 기사였다. 그때 연우는 고등학생이었고, 평소에 그날이 되면 생리통이 심했다. 연우는 방과 후에 자신이 잘 가던 문구사에 들렸다. 복부 통증은 허리까지 퍼져서 그녀는 발을 질질 끌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문구류를 찾아냈다. 그것에 집중하자 놀랍게도 통증이 잊혔다. 연우는 보라색 펜을 집어서 교복 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방과 후라서 학생들이 많았다. 첫 도난행위를 무사히 마치고, 연우는 꼭 한 번씩은 그날이 되면 상품을 접수했다. 그녀는 은밀한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꼈을 뿐, 도둑질이라는 생각을 안 했다. 그 이유는 꼭 도난을 하면, 물건을 하나 샀기 때문이다. 연우가 가진 손버릇은 그 후로 대학생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 나 떡볶이 먹고파.

  연우 입술은 매끄러운 핑크빛으로 물들어있다. 하얀 치아가 보이게 웃는다. 건우는 연우가 웃는 모습을 좋아한다. 연우는 역시 끌리는 매력이 있다. 분홍빛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보이자, 건우는 움찔한다. 여자애들은 왜 핑크색을 그렇게 좋아할까. 핑크색은 금방 질리는 색이라고 건우는 생각하는데, 연우 입술은 질리지 않을 것 같다. 건우는 연우와 함께 잘 가는 떡볶이 집으로 향한다. 연우는 앉자마자 핑크 로즈 립밤을 꺼내서 입술에 문지른다.

- 금방 떡볶이 먹을 텐데, 뭐 하러 바르냐?

- 떡볶이한테 잘 보여야지. 오늘 산 거야. 어때?

- 핑크색이네.

- 핑크색이네. 흥 그게 다야? 나도 그건 알거든.

- 너 그거 안 발라도 보기 좋아. 저번에 갖고 있던 분홍색이랑 뭐가 다른 거니?

- 이건 핑크 로즈고, 코랄 핑크, 로즈 핑크, 퍼플 핑크, 인디언 핑크. 다 달라.

- 배는 안 아파? 너 그날 이라며?

- 응. 이제 괜찮아졌어. 건우 너 덕분이야.


   연우는 핑크빛깔 입술 사이로 중지 손가락만 한 떡볶이를 입 안 가득 넣는다. 눈웃음 보내는 연우를 보는 건우는 마음이 놓인다. 연식 선배에게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연우는 쌀쌀한 늦가을인데, 미니 스커트 차림이다. 여자애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도 추운 날씨를 끄떡도 안 하고 걸어 다닌다. 건우는 그 점도 참 신기했다. 그렇지만 연우라면, 연우의 예쁜 다리라면 미니스커트가 좋다고 생각한다. 참, 연우는 그날이라고 했는데... 건우는 잠시 상상하다가 고개를 도리질한다.

-왜? 무슨 생각하는 거야?

건우는 떡볶이가 목구멍에 걸리는 것 같다. 물 컵에 든 물을 쭉 들이켠다. 연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건우에게 계속 추궁한다.

-아니야.

-아니긴 뭘. 얼굴에 다 보인다 보여.

건우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연우는 그 모습을 보자 흐뭇하게 웃더니, 떡볶이를 건우 입에 쏙 넣어준다.



   연우는 건우와 떡볶이를 다 먹고, 팔짱을 끼고 걷는다. 시내를 걸으며 연우는 쉬지 않고 조잘조잘 떠든다. 건우는 연우 얘기에 집중하려고 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튀는 공인지 모르겠다. 친구 얘기, 화장품 얘기, 드라마 얘기, 뉴스 얘기 등등. 이 주제, 저 주제 많이도 얘기를 해서 어떤 타이밍에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건우는 그냥 응응하면서 열심히 듣는다. 말을 쉬지 않고 하면서, 연우는 쇼윈도에 디스플레이된 옷을 놓치지 않는다. 연우가 걷다가 건우에게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말한다.

- 지하상가로 내려가자.

- 흥. 거기는 화장실이 깨끗하지가 않잖아.

- 음. 그럼 카페로 갈까?

연우는 건우 팔짱을 더 꼭 낀다.


   카페에는 젊은 대학생들이 많다. 연우는 화장실 급하다면서 자리를 먼저 맡고는 천천히 커피를 고른다.

- 나 바닐라 라테.

- 골랐으니까 어서 다녀와.

건우가 더 걱정한다. 연우는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에는 그녀가 고른 플로럴 머스크 향보다 질 나쁜 달콤한 향기가 난다. 연우는 킁킁 향을 맡더니 아까 구매한 향수를 꺼낸다. 연둣빛 노랑이 찰랑거린다. 향수를 공중에 분사시키고는 한 발짝 움직인다. 연우 몸에 골고루 뿌려진 향수는 은은하다.


   카페 안에는 머룬 파이브 노래가 흐른다. 건우가 고개를 들자 연우가 저쪽에서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걸어온다. 오늘이 정말 그날 맞나? 건우는 의심이 생긴다. 연우가 자리에 앉자 달콤하지만 코 끝을 찌르는듯한 향이 난다. 건우는 머릿속이 어찔해진다. 연우가 바닐라 라테를 한 입 마신다.

- 어디서 무슨 향기 나지 않니?

- 응? 어디서?

연우는 향기를 맡는 흉내를 낸다.

- 향이 어떤데?

- 글쎄, 좀 독한 것 같아.

- 흥. 너 취향은 대체 어떤 거니? 이 정도면 은은하고 달콤한 건데. 저번에는 장미향을 지리다고 했잖아. 너는 대체 향에 대한 감각이 없구나.

-...

- 내가 뿌린 향수야. 마음에 안 드는 거지?

- 너 그런 거 안 뿌려도 된다고 했지.

- 내 맘!

- 나는 샴푸에서 나는 향 정도가 좋더라.

- 흥. 여자들한테 향수는 쉴이야.

- 쉴?

- 그래 방패라고. 여자들은 거리에서 지나칠 때도 상대방 향기를 다 맡으며 생각하지. 음. 이 여자는 소녀 취향이구나, 이 여자는 섹시하구나, 이 여자는 보이쉬하구나. 남자들이 향수를 쓸 때는 알만한 여자애들은 다 경계하려고 해. 좋아할 것 같지? 아니야. 남자들이 향수를 잘 쓴다는 것은 분명 여우 목도리를 갖고 있다는 거거든. 한데, 마치 솔로처럼 굴지.

- 넌 뭘 그런 걸 다 아니?

- 우리 건우가 그걸 모르는 거지. 영어 박사님.

- 실드이면 방패인데, 대체 어떻게 보호막이 된다는 거지?

- 네가 방금 싫어했잖아. 이 향을 싫어하는 사람은 일단 접근이 쉽지 않겠지. 너는 스컹크가 악취를 왜 뿜는지 모르니?

- 향수는 좋으라고 뿌리는 건데, 왜 스컹크랑 비교하는 거지?

- 흥. 스컹크도 다 제 짝이 있거든. 연식 선배는 내가 뿌리는 향수 다 좋다고 하던데, 너는 왜 그러니?

- 연식 선배 얘기 좀 그만해라. 넌 나랑 있는데, 왜 그 인간을 거들먹거리냐.

- 그럼 지금 뿌린 향에 대해 다시 품평해 봐.

건우는 머리를 긁적인다. 다시 맡으려니 향이 흐려진 것처럼 잘 느껴지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얘기하자.

- 아침에 일어나서 맡은 꽃향기 같긴 하다.

- 엉? 무슨 꽃? 얼렁 말해봐.

- 음. 그게 국화 향기 같으면서 달콤해.

- 국화?

- 좀 짙은 향이 끝에 느껴졌거든.

- 맞아. 이 향기 노트에 백합이 있어.

- 백합은 방 안에 두면 안 되는 꽃이잖아.

- 그렇지. 그래도 하얗고, 고고한 기품이 느껴지잖아. 나랑 어울리니? 이 향이.

- 야. 근데 섹시하고, 보이쉬하고, 소녀 같다는 것을 어떻게 향수 취향 하나로 편견을 갖니?

- 들어봐. 소녀 같은 여자애가 있어. 그런데 이 애는 자신이 소녀로만 보이는 것이 싫어지지. 왜냐고, 여자들은 다 그래. 그래서 그런 여자애들이 은근히 섹시한 샤넬 넘버 5 같은 것을 뿌리고 다니지. 게다가 화장도 짙게 하고.

- 그럼 보이쉬한 여자애는?

- 나도 그 타입은 좀 애매하긴 한데, 좀 드물거든. 그런데 내 생각에 그런 여자애들은 자기 개성이 강해. 그래서 남자향 같다고 여자애들이 품평을 해도 끄떡없어. 한 마디로 남자 같은 기질이 있는 여자애들이지. 간혹 아주 여성스러운 애들도 보이쉬한 향수를 즐겨 써. 그런 애들은 향수가 어마 어마하게 많을 걸. 처음부터 그런 향수를 선택한 진짜 보이쉬한 애들하고는 달라.

- 그럼 섹시한 여자애는?

연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한다.

- 몰라서 물어?

- 뭐가?

- 바로 앞에 두고 그러냐고.


  건우는 순간 움찔한다. 갑자기 연우가 1.5배는 더 예뻐 보인다. 연우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바닐라 라테를 세 모금쯤 쭉 들이킨다. 연우는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지 않고, 생수라도 마시듯이 한꺼번에 들이키는 타입이다. 연우는 간혹 말과 행동이 다를 때가 있다. 바로 이럴 때이다. 작은 새처럼 포로롱 날아드는,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여자애였다가, 이렇게 거침없이 말을 내뱉고 커피를 원 샷 인양 들이키는 모습을 보인다. 건우는 움찔한 자신을 가다듬는다. 건우는 곧 군대를 가야 하는데, 그동안에 연우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그동안에 연식 선배랑 지낼 연우를 상상하면 탈영병이 되는 군인들이 이해가 된다. 연우가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정말 연우말대로 무척 섹시해 보인다. 그게 눈에 그린 아이라이너 때문인지, 카키색으로 눈두덩이에 바른 아이쉐도우 때문인지, 로즈 핑크를 바른 도톰한 입술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그 모든 변장 뒤에 숨어있는 진짜 연우 얼굴이 이런 순간에 드러나서 일지 모른다. 말이 없는 연우는 좀 지쳐 보인다. 속 쌍꺼풀 눈이 조금 풀려서 가느다래지는 눈매 때문인 것도 같고, 턱을 살짝 앞으로 빼고 생각에 잠긴 표정 때문인 것도 같다.


   건우는 말이 없는 연우의 모습을 보는 것은 자신 뿐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어쩌면. 어쩌면. 건우는 연우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건우 눈이 긴장이 된다. 연우가 그동안 자신을 만나면서 항상 자신을 나무랄 때, 연우는 지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건우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테이블 아래 건우 손이 주먹을 쥐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연우는 커피를 들이마시고 스마트 폰으로 혼자서 놀고 있다. 건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점점 초조해진다.


- 연우야.

- 응?

- 우리 사귈래?

빼꼼히 고개를 든 연우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 바보.

-...

- 바보. 바보. 바보.

- 왜?

- 모르니까 바보지.

- 그러니까 말해 봐.

- 너는 내가 너랑 사귀는 게 아니면 이러고 시간을 보내러 왔겠니. 그날인데.

- 그래. 그날만 되면 너는 꼭 나를 찾았지.

- 흥. 영어 박사님이 드디어 연애에 눈을 뜨시네. 그럼 다시 품평해 봐.

- 뭐를?

연우는 엄지를 들고는 자신을 향해 손짓한다.

- 너. 너...

- 그래 나 이연우를 품평해 봐. 제대로 안 하면 이제 국물도 없는 줄 알아.

- 잠깐. 너부터 나를 품평해 봐.

- 건우 너는 말 그대로 범생이지. 내가 조잘댈 때, 얼마나 실없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모범생. 아마 내가 매우 그럴싸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믿나 본데, 사실은 아니야. 그냥 떠벌 떠벌 시간 보내느라 나도 진땀을 뺀다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계속 들어주고만 있지. 만약 내가 그렇게 떠들어대며 너 팔짱을 끼지 않았다면, 건우 너 자신이 바보인 걸 알았을까?

분명 우리는 계속 눈치만 봤겠지.

-...

- 계속해볼까? 나 그날이라 날카로울 수 있어. 내가 연식 선배를 정말 좋아하는 줄 아니? 그 담배 냄새 풀풀 내는 노땅을 말이야.

-...

- 연식 선배를 싫어하는 너를 알고는 더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네가 경계할 정도로.

-자. 네가 이번에 내 품평을 해봐.

건우는 할 말을 잃었다. 연우가 이렇게 톡 까놓고 이야기를 하자 건우는 할 말을 잃고 머뭇거린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긴장을 풀려고 한다. 피식 웃음이 난다. 연우가 팔짱을 끼고 기다린다. 건우는 웃음이 나올 것만 같다.

- 나는 너를 그동안 잘 몰랐다.

- 남자가 여자를 어떻게 알겠니? 그 반대는 말이 돼도.

- 우리 사귀자. 너에 대한 품평은 나중에 해줄게.


  연우는 한숨을 쉰다. 그러더니 의자를 뒤로 밀고는 핸드백을 든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아래층 현관문까지 가는 동안에, 건우는 착각을 했다. 연우가 화장실에 가는 거라고. 연우는 건우를 두고 나가버렸다. 연우 자리에 미색 정사각형 상자가 놓여있다.



- 어서 오세요.


  연우는 매장을 둘러본다. 아까 왔던 그 매장이다. 천천히 걷는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들으며 상품을 만지작거린다. 연한 보랏빛 향수병이 눈에 띈다. 친구들이 그 향수가 가장 달콤한 향수라고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장 달콤한 보랏빛이라. 연우는 그것이 마음에 든다. 어깨에 든 핸드백을 슬그머니 연다. 보랏빛 향수병이 든 상자를 핸드백 속에 넣는다. 콧노래를 흥얼흥얼 거리던 연우는 자신이 그날에 두 번째로 물건을 접수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잠시 망설인다. 눈썹 용품이 있는 코너에 다다른 연우는 마스카라를 하나 집는다. 그동안 마스카라를 안 했던 그녀였다. 이제는 마스카라 변장술까지 하나 더 늘어난다. 계산대 이른 그녀는 그러나, 핸드백에 들어있던 향수 상자를 계산대에 꺼내 놓는다. ‘바보같이 실수하면 안 되지.’ 연우는 눈웃음 하며 아르바이트생이 계산을 하는 것을 바라본다. 인사를 하고 마스카라와 향수를 핸드백에 넣는다. 매장 문을 열고 나오니, 첫눈이 내리고 있다. 어스름 저녁에 첫눈. 스마트 폰이 울린다. 건우이다. 연우는 무시한다. 바보는 접수 안 해. 연우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거리를 걷는다. 거리에서가 이곳저곳에서 흐른다. 추운 겨울에 히트한 가요이다. 연우는 슬픈 노래를 들으며 발걸음을 세차게 한다. 건우가 없는 겨울이 연우는 기다려진다. 아마 그녀는 다음번에는 바다향기가 나는 향수를 고를 것이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향에 대해 감각이 있으니까. 연우는 걷다가 쇼윈도 앞에서 멈추고 턱을 빼고는 잠시 쳐다본다. 끝이 없는 매장들을 하나씩 쳐다보며 걸을 연우의 뒷모습이 점점 거세지는 눈발에 묻혀 점점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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