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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티 구구 Sep 13. 2024

누가 나를 알아줄까

골라봐.

-송곳, 칼, 도끼, 혁대, 망치.


-송곳.


-왜?


-가장 뾰죡하잖아.


나는 상상한다. 그의 가슴에 두 손으로 송곳을 깊숙이 찌르는 것을. 그의 피가 그에게 날개가 되어준다. 피가 점점이 방울져 떨어지고 상처는 아주 가느다랗게 깊이 파인다. 다만 바로 심장에 꽂아야 하리라. 그래야 그가 편안히 잠들 수 있겠지.


 


달린다. 비틀거리며 달린다. 그 애는 지금 큰 적을 피하고 있다. 술에 취한 적은 그를 찾아 이곳저곳을 쑤시고 있다. 그 애는 흐르는 코피를 닦지도 못하고 뛰어간다. 그 적이 그 애의 얼굴에 주먹질을 했다. 술을 마시면 그 적은 그 애가 샌드백이라도 된 줄 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술을 마시니, 그 애는 하루도 샌드백이 되지 않은 날이 없다. 그 애는 울지 않는다. 가슴이 무겁다. 울음을 꾹꾹 누르고 뛰어가는 그 애는 다리가 땅에서 멀어지기를 바란다. 하늘 위로, 위로 올라가길 바란다. 누군가 그 애를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


 


그 애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어느 지하 노래방이었다. 혼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음정과 박자가 맞지 않는 듣기 괴로운 노래였다. 고함과 같은 그 노래 때문에 옆방에서 놀고 있던 나와 친구들은 짜증을 냈다. 노래방 사장에게 방을 바꿔달라고 하려고 나가자, 노래가 끝나 있었다. 그 애를 본 순간 나는 시간이 멈춰진 것 같았다. 그 애는 너무 깊은 눈빛을 하고 있어서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정도였다. 나는 그 눈빛에 공간을 잊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애에게 말을 붙여 보고 싶었다. 친구들이 조잘대며 나를 방 안으로 끌고 갔다. 그 애를 만나기 위해 다시 그 노래방에 혼자서 갔다. 사장에게 물어보니, 그 애는 귀가 잘 안 들리는 애라고 했다. 노래방 손님들이 그 애 때문에 불평이 많다고 했다. 다행인 건 그 애가 매주 한 번씩만 이 노래방에 오고, 딱 한 곡만 부르고 간다고 했다. 나는 사장에게 그 애가 언제 오는지 물어보고 노래방에서 나왔다. 그 애를 만나고 싶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생각에 빠져서 걷다가 무심히 그 노래방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때, 그 목소리가 들렸다. 괴로운 소리지만 마음을 훔쳐가는 소리. 나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 이상한 소리가 어느 방에서 흘러나왔다. 문을 열었다. 모자를 쓰고 빗물이 축축이 젖은 점퍼를 입은 그 애였다. 내가 들어온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노래방 기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미묘하게 뒤틀린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우산에서 흐르는 물이 내 다리를 적시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소리가 내는 거센 파도에 묻혀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 애 기척을 못 느끼고 부동자세로 있다. 그 애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그 애의 눈을 두 번째로 본다. 그 애는 눈이 어둡지만 깊고, 매섭지만 외롭고, 풀린 듯 한 눈동자로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나는 그 애가 내 곁을 바람을 가르며 지나치는 것을 세우지 못했다. 그 애는 다시는 이 노래방에 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부동자세로 서 있다. 내 눈에서 무엇인가가 흘러내린다. 그것은 뜨겁다. 나는 피가 나오는 것 같아 무서웠다. 나는 내 눈을 마구 만졌다. 다시 듣고 싶은 그 애의 목소리였다. 그 후, 그 애를 그 노래방에서 볼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가을이 가고, 눈이 내린 추운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봄이 되었다.


 


-야. 잤어?


-무슨 소리야?


-기집애. 너 얼굴 빨개지는 거 보니 맞네.


-웃기지 마. 딴생각했어.


내 친구는 나를 자꾸 닦달했다. 잤냐는 것이다. 그 애 얘기를 계속하는 내가 좀 이상하긴 하다. 그런데 한시라도 그 눈빛을 잊을 수 없고, 그 목소리, 그 뒤틀린 음정을 싫어할 수 없다. 내가 이상하긴 한가 봐... 그 애는 나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였다. 그날 마지막으로 보고 나서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 노래방은 없어졌다. 다시 찾아갔을 때, 중국집이 개업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서 그 애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나는 대학 도서관에 간다. 그곳에서 화집을 구경하며 논다. 카라바지오의 섬세하고 둥그스름한 인물들의 몸이 보인다. 루오의 두꺼운 붓 터치가 그려진 인물들도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해괴한 그림도 있다. 무엇을 그렸는지 알수록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그냥 대충 봐줘야 하는 그림이다. 공포영화를 많이들 본다.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공포영화의 마니아였다. 오빠의 눈에는 그 영화의 색감이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너무 생생했다. 공포 영화에서 나온 캐릭터의 분장 기술은 당시 한국에서는 따라갈 수 없는 능력들이라서 나는 그 새로운 캐릭터들에게 끌려 다녀야 했다. 그 캐릭터들은 붉은 피를 쿨럭쿨럭 거리며 분출해 댔다. 나는 어렸고, 그 비현실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영화 속 효과음은 나를 전율시켰다. 얼어붙게 했다. 꼭 그 캐릭터들이 등장할 때는 신호음이 있다. 날카로운 금속음, 이상한 전자 음악소리, 샤아악 거리는 숨소리. 나는 TV밖에 있었지만, 내 몸은 영화 속에 있었다. 나는 온몸으로 부딪혀야 했다. 화집을 구경하고 나서 패션 잡지를 본다. 모든 모델들이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특히 한 명의 모델이 등장할 때 그렇다. 나는 미용실 유리 창문에 DP 된 사진을 한참 바라볼 때가 있다. 눈동자를 나에게 고정시킨 모델들은 날렵한 턱을 갖고 있고, 세련되고 풍성한 머릿결을 보여준다. 나는 그들과 눈을 맞추는 것을 좋아한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한 때, 나는 그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 모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친구에게 말했더니 나보고 농담하지 말라고 했다. 난 분명 보았다. 긴 머리의 남자 모델의 눈동자가 나에게 말하는 것을.


 


 


비가 내린다. 봄비이다. 봄비는 물비린내를 맡을 수 있다. 우산으로 촉촉이 비가 내려오고 그 우산 아래에서 물비린내를 한껏 들이마신다. 이대로 계속 걷는다. 우산이 마를 때까지 걸어봐야겠다. 땅에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걸으며 봄비를 밟는 소리이다. 신발 앞코가 푹 젖는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횡단보도 앞에 섰다. 횡단보도 건너편에 얼굴을 왼쪽으로 향하고 있는 한 남자가 서 있다. 그 사람이 어디를 보고 있나 시선을 따라가자, 내 뒤편으로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 남자는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다. 다리가 땅에 닿자 동시에 무릎과 허벅지가 반동으로 오징어 다리처럼 휘어지며 절뚝된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본다. 횡단보도를 건넌다. 나는 아주 천천히 걸으며, 다리를 저는 남자가 앞으로 가는 모습을 훔쳐본다. 넓적하고 폭이 넓은 바지 안의 그 다리는 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저렇게 절고 있는 걸까? 세상은 참 뒤엉킨 것들이 많다. 그 뒤엉킴 속에서 아름답게 보이려면 추함을 뚫고 넘어설 수 있는 어떠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것이 나는 궁금하다. 그것은 절대로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떤 음악이 있다. 매우 새로운 사운드를 지향한다. 분명 거친 음색들이 가득한데, 그 소리들이 어떠한 구조 속에서 매우 강렬하면서 멋진 느낌을 준다. 물론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몫도 있다. 그 사운드에서 박자를 느끼고, 음정을 맞추고, 소리의 흐름에 몸을 던지며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에너지가 큰 몫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세상에도 적용시킨다면! 아까 봤던 그 아저씨의 출렁이는 다리를 받쳐주는 튼튼한 신발이 멋지게 신겨져 있어서, 그 사람이 다리를 저는 모습이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마 그런 세상이 온다면 그 아저씨는 좋아할까? 장애인은 절대로 불편하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히려 그 장애인을 안타깝게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주는 감옥이 괴롭다는 것이다. 우산이 빳빳하게 마르자 내 신발 앞코도 뽀송해졌다. 우산을 가지런히 접어서 돌돌 말아서 백팩에 넣는다. 무심히 하늘을 스윽 쳐다보고, 빗물에 씻어진 건물들을 본다. 건물들이 하나같이 비슷하다. 직사각형 3,4층 건물. 벽돌이든지 시멘트이든지 외관이 닮아있다. 간판들은 색색으로 제각각이지만 역시 직사각형이다. 그리고 그 속에 간판 활자는 2곳에서 3곳을 규칙적으로 비슷하게 닮아있다. 어떻게 다들 비슷한 것을 추구할까? 왜, 이곳에는 눈에 띄는 멋진 간판 하나, 멋진 건축물 하나 없을까? 삶이 비루해지는 순간이다. 건물들 너머에 엷은 파란 빛깔의 하늘이 없다면 나는 거리를 걷지 않을 것이다. 간판을 보는 것, 건물을 보는 것은 표정이 없는 인간 군상을 보는 것처럼 지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어폰을 끼고 걷는 이유는 시선의 자유를 더욱 느끼기 위해서이다. 소리에 반응하며, 나의 눈동자는 스타카토처럼 길거리를 응시한다. 한 번에 다 보는 것 같지만, 동시에 작은 스티커를 찾아내는 것처럼 길거리 속의 악센트를 짚어내고야 만다. 음악은 그 행위를 위해 도와준다. 나는 계속 걷는다. 그러다가 지루해지면 카페에 들어가야지. 대학교 후문에서 직선으로 곧장 걸어서 오거리 교차로 이르러서 다시 직선으로 걷는다. 사거리 교차로에 이르러서는 우회전을 해서 명동에 다다른다. 걸을 때는 최대한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 명동에서 좌회전해서 다시 직선으로 걷다 보면 호수가 있다. 그곳까지 와서 나는 벤치에 앉아 쉰다. 비는 이미 그쳐 있었고, 봄날을 맞은 사람들이 우산을 하나씩 들고 호수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야, 그 애 나 봤다.


-뭐? 그 노래 부르는 남자 애 말이야?


-응. 맞아 그 애가 명동에서 마이크도 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 앞에 동전 바구니를 두고. 노래가 하도 뒤틀려서 사람들이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고 지나가고 있었어.


-언제 본거야? 명동에 가면 매일 있는 거야?


-그건 모르겠고, 지난 토요일 명동에서 점심 먹고 걷다가 본 걸. 네가 말한 그 애 맞지?


 


새 학기가 시작하고, 곧 여름이 다 되어가는 동안 나는 그 애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친구가 내게 그 애 얘기를 먼저 꺼냈다. 나는 벌써부터 내 배가 싸르락하며 반응을 한다. 왜인지 모르게 그 애 생각만 하면 나는 몸에 이상한 전조 증상처럼 느낌이 왔다. 이번 수업 시간에는 중국의 고대 왕조에 대한 역사를 공부한다. 강사 선생님은 수업 시간 내내 영화를 한 편 감상할 것이라고 했다. 원형으로 생긴 강의실에 스크린이 내걸리고, 조명이 꺼진다. 영화는 중국인의 음악적인 성조가 없다면 지루하기 그지없을 영상을 계속 내뿜는다. 고대 중국의 왕조라고 해서 특별한 것을 발견하기에는 내가 아는 역사 배경이 없다. 영화 막바지에는 한 신하가 왕의 어명으로 눈을 잃는다. 뜨거운 쇳덩이를 눈앞에 갖다 대는 무서운 형벌을 받고 실명을 한다. 그 장면에 가서야 나는 정신이 든다. 영화가 끝나고 강사 선생님은 말한다. 중국 고대 왕조에 대해 이 영화가 말하고 있는 점이 무엇일까요? 누군가가 손을 든다. 한 남학생이 말한다. 고대 왕조에도 살벌한 형벌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학생들이 모두 웃는다. 강사 선생님은 그 말을 나름 깊이 있게 받아들이며, 말을 이어나간다. 그 말에도 뭔가 고대 왕조의 특징이 있지요. 또 다른 것은 없나요? 내가 손을 든다. 그 상형문자요. 그 상형 문자를 거북이 등껍질에 새기는 장면이 인상적인 대요. 좋아요. 강사 선생님이 말한다. 그 점도 간과할 수 없지요. 또 없나요? 나는 그 대답을 끝으로 살그머니 강의실을 나간다. 그 애를 보려고 명동으로.


 


걸으며 계속 되뇐다. 안녕! 나는 김지영이라고 해. 네 이름은 뭐니? 안녕! 나는 너를 예전에 본 적이 있어. 너 그때 노래방에서 나 본 거 기억하니? 안녕! 나는 대학생 누나야.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는데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지 않을래? 안녕! 나는 김지영이야. 너를 만나고 싶어서 지금 학교에서 여기까지 왔어. 시간 좀 내줄래? 나는 계속 내 말을 되짚어본다. 그 애를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인사가 무엇일지 고민한다. 그 애를 단숨에 사로잡지 못하면 어물쩡거리다가 나는 그냥 바구니에 돈만 넣고 지나칠 것만 같다. 해내야 해. 나는 계속 우물우물 말을 걸어본다. 그 애가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명동 거리를 걸으며 나는 그 애 목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쫑긋 세운다. 눈동자를 길거리에 고정시키고 샅샅이 뒤져본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 애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세 번을 명동거리를 왕복한다. 나는 지친다. 그 애를 보기가 이리도 힘들다니.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중앙시장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냄새나는 순대를 판다. 나는 순대와 떡볶이를 시켜놓고 먹는다. 꾸역꾸역. 왜 그렇게 먹는지 나 자신은 모른다. 그냥 먹어야 힘이 날 것 같다. 순대는 모락모락 김이 난다. 시뻘건 떡볶이는 국물이 걸쭉하다. 순대를 국물에 한껏 묻혀서 입안에 들이민다. 혼자 먹기에 많은 양을 시켰다. 나는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그 애를 못 본 대신 이 짓이라도 해야 분이 풀릴 것 같다. 왜? 나도 모른다. 나는 모른다는 생각으로 또 떡볶이를 입안에 들이민다. 다 먹어치우자 가게에 들어온 지 10분이 지나있다. 그렇게 빨리 해치우고 나는 밖으로 나선다. 다시 그 애를 찾자는 것은 아니지만, 미련이 남은 눈빛으로 길거리를 구석구석 뒤져본다. 그 애는 어디에도 없다.


 


집에 돌아온 나는 침대에 털썩 누워버린다. 침대 맞은편 벽에는 브로마이드가 붙어있다. 영화배우가 공중 부양하고 있는데, 십자형으로 포즈를 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이다. 얼마 전에 나온 영화에서 뱀파이어로 나왔다. 나는 그 사진을 바라보며, 그 애의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그 애의 노래는 형편없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가 호소하는 바를 나는 느꼈다. 그것은 부르짖음이었고, 울음이었고, 비명과 같았다. 내가 보았던 공포영화들을 모두 섞어 놓아도, 그 애의 목소리만큼 강력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그래서 그 애를 찾고 싶은 것이다. 내가 겪은 간접 경험이 그 애에게는 아마 직접 경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이상한 예감이 든다. 나는 자꾸만 허밍을 부른다. 허밍은 빈 내 방을 채우고 있다. 나는 그 허밍이 조금이라도 그 애의 노랫소리를 닮아있기를 바라며. 계속 웅웅 소리를 낸다.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밖은 어두웠고 내 베개는 침으로 푹 젖어 있었다. 낮에 먹은 떡볶이와 순대가 소화가 덜 되었는지, 신물이 올라온다. 나는 일어나서 천천히 옷을 벗는다. 샤워를 하러 목욕탕으로 들어간다. 샤워기를 틀고 입 안으로 갖다 댄다. 아-하고 소리를 낸다. 부글부글 샤워기 물이 입안에서 헛돈다. 나는 왜 그 애의 목소리에 이다지도 집착을 할까? 나는 그 애를 붙잡고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고 싶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내 안에 있는 내가 바뀔 것 같다. 그 애를 본 순간 느꼈던 몸의 반응은 계속 그 애의 목소리를 따라 반응을 한다. 나를 깨뜨리고 싶다. 그 애를 통해.


 


밤 9시가 넘어서 나는 다시 명동으로 간다. 네온사인이 켜진 골목길을 지나서, 닭갈비 냄새가 진동하는 골목을 지나서, 명동 큰 거리에 도착한다. 어디선가 그 애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바구니 앞에서 고함을 지르는 그 애를 발견할 것만 같다. 나는 울고 싶다. 그 애의 노래가 나를 울게 해 줄 것 같다. 그 애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명동 한복판에서 나는 무릎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다. 귀를 막는다. 나는 소리 없이 가슴으로 고함을 지른다. 꼭 막은 두 귀에는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소리 없는 고함을 지른다. 입을 크게 벌리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주파수로 소리를 지른다. 이 소리를 듣고 그 애가 반응하지 않을까. 나는 주저앉아서, 입을 벌리고 뿅뿅뿅 에너지를 뿜어댄다.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본다. 오직 그 애만이 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계속 뿅뿅뿅 해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물 밀리듯이 밀려온다. 나는 지친다. 발을 질질 끌며 걷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누가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뒤돌아보았다. 그 애였다.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그 애였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 우리는 햄버거 가게에 들어갔다. 내가 그 애 손을 잡고 데리고 들어왔다. 그 애은 먹을 것을 잘 못 골랐다. 나는 세트 2개를 시키고 그 애 손을 잡고 2층으로 올라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펜으로 종이에 쓴다. ‘나는 너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어. 너도 알지?’ 그 애는 그 아래에 적는다. ‘누나가 저를 부른 거예요? 아까부터 누군가가 계속 이상한 소리로 저를 부르는 것 같았어요.’ 나는 방긋 웃는다. 그 애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아준다. 그 애는 눈을 제대로 뜨고 나를 바라본다. 저번에는 게슴츠레해 보였는데, 이제 보니 까만 눈동자가 반짝인다. ‘나는 네 노래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어. 너의 노래를 들으려고 너를 찾아다녔어. 너는 어디에서 온 거니?’ 그 애는 더 이상 적지 않았다. 다만 그 까만 눈동자로 나를 천천히 관찰했다. 그리고 수화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그 애는 수화를 끝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1층으로 달아났다. 밖으로 나가버리는 그 애를 나는 붙잡지 못했다. 나는 2층 창문 너머로 그 애의 뒷모습이 인파 속에 파묻히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바라만 보았다. 내가 잘못했나 봐...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울었다.


 


어두운 내 방에 앉아 나는 생각해 본다. 스물이 된 나.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무작정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냥 숨 쉬는 중. 나는 그냥 먹고 마시는 중. 나는 그냥 대학생.


아까 봤던 그 애는 어쩌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지 않을까? 나는 노트와 펜을 꺼낸다. 책상 위의 스탠드 불빛이 들어온다. 펜으로 쓰기 시작한다.


 


-골라봐.


-송곳, 칼, 도끼, 혁대, 망치.


-송곳.


-왜?


-가장 뾰죡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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