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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티 구구 Sep 02. 2024

너잖아, 너

  다음 차례는 너야.

반 아이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본다. 100미터 달리기 선 앞에 선 기분이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다. 교단 앞에 나온 그녀는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몰라서 반 아이들을 다 쳐다본다. 한 명씩 쳐다보며 해야 할 말을 머뭇거리고 있다. 그 때다. 담임이 말한다. 요즘은 자기 PR시대야. 이런 자리에 서봐야 해. 지영이는 무슨 얘기를 꺼낼래? 책, 영화?

그녀는 눈을 잠시 감고는 그녀가 좋아하는 그림을 생각해 낸다. 그리고 눈을 뜬다. 빛깔이 석양 빛깔이야. 그림자가 어른어른 질 무렵의 석양빛. 골목이 있어. 골목으로 어떤 소녀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뛰어가지. 골목길은 원근법으로 그려져 있지만 그 비례가 맞지가 않아서 다소 환상적으로 보여. 그래서 더욱더 보는 사람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켜. 나 자신이 그림 속에 있는 것 같아. 골목에 있는 건물과 석양과 소녀의 그림자가 전부인 이 그림을 어떤 이는 마법의 도마뱀 살라만다를 숭배하는 연금술사들의 비밀이 있다고 얘기해. 그의 색채감에서 말이지. 원근법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이상한 기둥을 보면 그것이 연금술과 연관이 있다고 하지. 딩동댕 하고 쉬는 시간 종이 친다. 반 아이들은 와아하고 신나 한다. 지영이 이후에 발표해야 하는 아이들이 다들 좋아라 한다. 그녀는 교단을 내려오며 할딱였던 가슴을 쓸어내린다. 할딱이기도 했지만, 묘한 만족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림을 말로 표현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화집을 사서 묵묵히 쳐다보고 화가에 대해 정보를 찾아보는 일을 즐겨하는 그녀였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 작품을 이야기해 보기는 처음이었고,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즉흥적으로 그녀의 감상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담임이 교실 밖으로 나가며 지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씽긋 웃는다. 반 친구들 중 몇 명도 그녀 곁으로 와서 말했다. 야, 그림 좀 한 번 구경하자. 그녀는 다음 날 화집을 교실로 갖고 왔다.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그녀는 화집을 책상 위에 꺼낸 둔다. 2학년 3반 아이들은 몇 명씩 모여서 재잘대며 수다를 떤다. 그녀는 반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다. 선미가 지영의 눈빛을 보고 그녀 책상 가까이로 다가온다. 아, 이게 어제 네가 말한 그 화가 그림이구나. 밝은 오렌지 색상으로 된 표지 가운데 여인의 두상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있다. 그림에는 고무장갑도 그려져 있다. 다소 투박한 선으로 그려져 있어서 섬세함이 없는 이 그림은 색감이 묘하다. 강렬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어두운 색깔로 덮여 있는 그림은 단순해 보이기까지 하다. 볼래? 그녀가 선미에게 선뜻 화집을 건넨다. 선미는 휘리릭 책장을 넘기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린다. 에게, 뭐 그냥 그림이네. 뭐가 색깔이 석양빛이라는 거야? 그녀는 얼굴 표정을 가만히 두고 말한다. 잘 봐봐. 하늘빛이 슬며시 물들고 있잖아. 그리고 거리의 그림자가 해질 때처럼 길게 늘어져있고. 멋지지 않니? 선미는 화집을 탁하고 닫고 책상 위에 쿵하고 올려놓는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선미가 돌아서자 그녀는 당황한다. 수업이 시작된다. 수학 시간이다. 그녀는 수업 시간 내내 선미 생각에 집중을 못한다. 왜? 선미는 이 그림 색깔을 잘 모를까? 분명 데 키리코의 그림에서 선과 색깔은 매력 덩어리인데. 그녀는 선미에게 화집을 빌려줄까 생각해 본다. 그녀는 어제 발표한 자신의 감상을 선미도 공감하기를 바란다. 선미는 분명히 관심을 먼저 보였다. 지영은 점심시간에 선미와 대화를 나눠 보겠노라고 마음을 굳힌다.


   도시락을 들고 선미 자리로 가려고 하니, 선미와 친한 친구들 3명이 함께 앉아있다. 그녀는 멈칫한다. 저렇게 많은 친구들과는 밥을 먹다가 체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할 수 없이 밥은 혼자 먹고 선미가 쉴 때 말을 붙여야겠다. 지영은 밥을 혼자 먹는다. 가끔은 친구들 몇 명과 함께 먹을 때도 있지만, 그녀는 밥을 혼자 먹는 것을 편하게 생각한다. 화집이 도시락 옆에 있다. 화집에 있는 두상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다. 그녀는 밥을 먹으며 선미가 갖고 있는 필통을 생각한다. 강렬한 핑크색깔의 필통집 안에는 색색의 펜들이 있다. 그녀는 선미가 그렇게 다양한 색상을 즐기는 것을 보면 색 감각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지영 그녀 자신은 펜을 다양하게 갖고 있지 않다. 그녀는 오히려 다양한 굵기의 펜을 갖고 있다. 그것도 검은색으로. 그녀의 필통 색깔은 검은색이다. 그녀는 검은색을 좋아한다. 그녀는 필기구를 살 때도, 옷을 살 때도 어두운 색깔에 눈길이 간다. 다양한 색깔 중에 그녀는 검은색에 유독 손이 간다. 물건을 사고 나면, 그녀는 또 검정이네하고 책망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는 검정에 항상 꽂힌다. 그녀는 자연에서는 그러나, 다양한 색깔이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는다. 푸르른 녹색 잎사귀에 맺힌 이슬, 선홍색의 영산홍 빛깔, 노란 개나리의 귀여운 꽃잎, 구름을 품고 있는 연한 하늘빛, 오후가 끝날 무렵의 오렌지 빛깔의 노을. 그녀의 눈을 아름답게 비춰주는 자연 속의 색깔들을 감상할 줄 안다. 그녀는 밥을 다 먹고, 화집을 들고 선미 곁으로 간다. 또 그 화집이야. 짜증 섞인 목소리이다.


   친구들 세 명도 함께 그녀를 쳐다본다. 지영은 눈치를 못 챈다. 아니, 그녀는 지금 어제의 감상에 젖어서 선미가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 짐작도 못한다. 오히려 웃으며 말한다. 너희들과 이 화집을 함께 보고 싶어, 어때? 다들 지영을 보고는 슬쩍 입꼬리를 올린다. 선미가 팔짱을 끼고 눈을 내리깔고는 지영이 너 그림 좋아하는가 본데, 다들 너 같지는 않아라고 말한다. 그녀는 그래도 여전히 웃고 있다. 그래 알았어. 그냥 네가 이 화집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했어. 빌려줄게. 너 보고 싶은 만큼 보고 돌려주면 돼. 선미는 지영이가 웃으며 화집을 건네는 것을 째려보고 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화집이 가만히 선미 앞에 놓인다. 내가 보고 싶은 만큼? 선미는 또 입꼬리를 올린다. 세 명의 친구들이 화집을 끌어다가 펼쳐본다. 빳빳한 화집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친구들은 대체 무엇이 좋다는 것인지 잘 모르고 빠르게 화집을 넘겨본다. 선미가 빤히 그 모습을 쳐다본다. 지영, 그럼 이 화집 내가 빌려간다. 언제 갖다 줄지는 나도 몰라. 그녀는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 두고는 기쁘게 웃으며 말한다. 그래 그건 아무래도 좋아. 네가 보고 싶은 만큼 보고 돌려줘.


   5교시는 체육시간이다. 여자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옷을 갈아입느라 교실 이곳저곳에서 엉켜서 몰려있다. 지영이 빌려준 화집이 선미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느라 바쁜 선미는 화집을 그대로 책상 위에 두고 체육관으로 가버린다. 교실이 텅텅 빈다. 이제 교실에는 아무도 없다. 그 화집 속의 두상이 멍하니 빈 공간을 쳐다보고 있다. 체육관에 도착한 아이들은 농구를 한다. 드리블을 배우느라 텅텅거리는 농구공 소리가 들린다. 농구공은 크고 무거워서 여자 아이들의 여린 손목을 욱신거리게 한다. 드리블을 하며 체육관을 반쯤 돌아야 하는 것이 실기 시험 과제이다. 모두들 연신 공을 두들기며 발을 쿵쿵거린다. 시험을 준비하는 지영은 농구공에 집중하느라 여자애들끼리 몰려다니며 화집을 구경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아이들 한 명씩 시험을 치른다. 공을 놓치는 아이들이 많다. 공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그 공을 따라가는 아이들이 울상을 짓는다. 수업 종이치고 체육시간이 끝난다. 교실로 돌아온 아이들은 또다시 재빨리 옷을 갈아입는다. 뭐야. 왜 책이 없지? 선미의 목소리이다. 아이들이 일제히 시선을 쏘아본다. 재경아 너 화집 어쨌어? 재경이는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한다. 선미는 교복으로 갈아입고 화집을 어디에 두었는지 교실 곳곳을 찾는다. 재경이가 말한다. 아까 체육시간에 그 화집 들고 보던 애들이 있던 걸. 화장실에 다녀온 지영이가 이 소식을 듣고 얼굴이 창백해진다. 선미는 지영에게 미안해하기는커녕 귀찮다는 듯이 화집 반 아이들이 돌려 봤나 봐 하고는 자리에 앉아버린다.


   지영은 교실 칠판에 ‘데 키리코 화집을 돌려줘’라고 글씨를 또박또박 쓴다. 반 아이들은 키득대며 그 화집 아까 체육관에서 보았다는 둥, 누가 다시 교실로 가져왔다는 둥, 체육 선생님이 가져가셨다는 둥, 말들이 많다. 선미는 이제 제 알바가 아니라는 듯이 다음 수업 준비만 하고 있고, 지영은 교무실로 간다. 체육 선생님은 그 화집을 보지 말라고 했을 뿐 가져가지는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교실로 돌아온 지영은 털썩 자리에 앉는다. 그 화집은 해외에서 직수입된 화집이라서 한국에서는 다시 구하기가 힘든 걸로 알고 있다. 반 아이들은 분주히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일제히 앉는다. 6교시는 담임선생님 시간이다. 지영이가 칠판에 써 놓은 글씨를 당번이 지운다. 지영은 화집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 채로 문학 수업을 듣는다. 수업이 끝나면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문학 시간에는 담임선생님의 단조로운 목소리에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리며 졸고 있다. 그때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도 들린다. 담임이 문학 교과서를 읽다가 고개를 든다. 다시 교실은 조용해진다. 지영이는 아까 그 소리가 선미 책상 근처에서 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선미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다. 수업이 끝나고 담임이 나가는 것을 붙잡고 지영이가 화집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담임은 종례시간에 찾아보자고 말한다. 지영은 아까 찢어지는 소리가 어떻게 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 소리는 빳빳한 종이를 억지로 찢을 때 나는 소리였는데, 지영은 애써 모른 척한다.


   종례가 끝나고 지영이 선미에게 간다. 선미야 학교 끝나고 나랑 문구사 가지 않을래? 선미는 삐뚤한 입술로 왜 거기 가서 뭐 하게?라고 묻는다. 응 나 펜을 사려는데, 네가 색깔 좀 골라주지 않을래? 너는 펜 색깔을 다양하게 쓰더라. 선미는 지영을 쏘아보며 그까짓 것 네가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눈빛을 보낸다. 지영은 침착하기만 하다. 지영은 선미에게 오히려 미안해하는 것 같다. 선미에게 화집을 빌려주었는데, 잃어버리게 된 것이 마치 자신의 탓인 마냥 선미에게 친절한 자세이다. 둘은 문구사로 간다. 문구사에는 펜 수십 종이 시판되고 있다. 선미는 펜을 하나씩 꺼내서 자세히 들여다본다. 지영은 펜을 꺼내서 하나씩 써본다. 나는 검은색 펜이 많아. 너는 참 다양한 색깔 펜들을 갖고 있더라. 나한테도 밝은 색상이 몇 개 있었으면 해서. 선미는 별말 없이 펜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 선미는 자세히 펜을 돌려보더니 핑크와 하늘색을 지영에게 건넨다. 지영은 선미가 펜을 건네주는 것을 기뻐하고는 펜을 계산한다. 선미에게 지영이 묻는다. 너는 무슨 색상 펜을 가장 좋아하니? 선미는 여전히 그 삐뚤어진 입술로 말한다. 색깔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나는 검은색이 이상하게 항상 끌려 이쁜 색상들이 많은데, 아무리 봐도 검은색이 가장 멋있어 보이거든. 자. 이거 가져. 지영이 손에 검은색 펜이 쥐어져 있다. 고급스러운 사인펜이다. 한 뼘 정도의 길이에 새끼손가락 굵기 정도로 디자인된 펜은 뚜껑을 열자 펜촉이 뾰족하다. 사인을 하면 아주 훌륭하게 써질 것만 같다. 선미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펜을 건네받는다.


   다음 날 아침 교실에 도착했을 때, 지영은 자신의 책상 위에서 화집을 발견한다. 화집은 군데군데 찢겨 나가 있다. 그녀는 말없이 손으로 화집을 쓸어내린다. 겉표지의 두상이 눈물을 똑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이다. 지영은 가방에서 스카치테이프를 꺼내서 찢어진 그림을 이어 붙인다. 투박한 선들이 얼기설기 맞춰지면서 그림이 그로테스크해 보인다. 그림 속에 있는 기둥이 조각이 나서 테이프로 그림을 이어 붙여도 금이 가있다. 그녀는 선미 자리를 쳐다본다. 아직 선미는 오지 않았다. 어제 분명 선미 자리 근처에서 화집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영은 눈을 꼭 감는다. 머리채를 흔든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나마 화집이 그녀 손에 다시 돌아온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곧 드르륵 문이 열리고 선미가 친구들 2명과 함께 교실로 들어온다. 지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선미에게 화집이 찢어졌다고 말해야 할까? 그래서 빌려주지 못한다고. 그때, 선미가 지영 앞으로 온다. 검정 사인펜이다. 그것을 그녀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난 이 색상 별로야. 너나 써. 지영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선미가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본다.


   화집은 그날 내내 지영의 가방 속에 얌전히 꽂혀있었다. 찢어진 그림을 테이프로 붙여서 화집은 다소 부풀어 보였다. 지영은 하루 종일 검정 사인펜을 손에서 쥐고 놓지를 않았다. 손에 땀이 베였다. 그녀는 더욱더 차분해진다. 이틀 전에 교단 앞에서 발표한 ‘데 키리코’의 화집이 다시 그녀 손에 돌아왔다. 반 아이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아무도 그 화집이 찢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이다. 화집 겉에 있는 그림 속 두상의 눈빛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창 밖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고, 교실 안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하늘이 오렌지 빛깔로 변하려는 순간 학교 교정으로 아이들이 하교를 하고 있다. 지영도 그중에 한 명이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검정 사인펜이, 왼손에는 ‘데 키리코’ 화집이 들려있다. 그녀 얼굴은 그림 속 두상처럼 어둡다. 어두운 안색에 깊은 눈동자. 그녀는 이제 화집을 집으로 갖고 가서 그녀의 책장에 영원히 꽂아둘 것이다. 모든 그림이 이미 그녀 머릿속에 다 저장되어 있다. 그녀는 그림을 보여주지 않고, 말로 할 것이다. 그러리라고 마음먹으며, 손에 꼭 쥐었던 사인펜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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