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지듯이 그녀의 발이 나무 바닥 위를 탁탁거린다. 그녀가 신은 구두는 탭 댄스화. 그녀는 탭 댄스를 배운 지 1년이 되었다. 그녀의 발은 굉장히 빠르게 리듬을 타고 있다. 댄스화의 소리가 진동으로 울려서 나무 바닥이 둥둥둥하고 울렸다. 그녀의 상체는 단순한 손짓에 지니지 않았지만, 발동작은 현란했다. 발을 타다닥 거리며 나무 바닥 위를 계단을 오르듯이 움직이는 듯했다. 연습 공간이 거대한 징이 되었다. 징을 두드릴수록 소리는 분명해진다. 그녀의 탭 댄스 소리가 하나하나 또렷하다. 그녀의 발동작만 보인다. 왜 그녀의 모습이 흐릿해 보이는 것일까? 나는 아까부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흐른다. 땀방울이 똑 떨어지고 움직이는 찰나에 방울이 튄다. 그녀는 거울을 쳐다보지 않는다. 오직 소리만을 듣고 있다. 그녀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그녀의 발소리에 온 정신을 맡기고 있다. 나는 서서히 무너져간다. 그녀는 내가 알 수 없는 여자이다. 나는 그녀가 쓰러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마 내가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겠지.
그녀의 이름은 은수이다. 정은수. 그녀는 나보다 3살이 많다. 그녀는 대학원을 그만두고 댄스에 목을 매기 시작했다고 댄스 선생님에게 들었다. 나도 1년 전부터 이곳에서 탭 댄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의 발은 모래주머니라도 달은 것처럼 무겁게 움직이고 만다. 선생님이 아무리 리듬을 타고, 들으라고 해도 내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 그 무렵, 나는 은수가 탭댄스를 추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음악을 틀어놓고 고개를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발끝으로 리듬을 밟기 시작하더니, 발뒤꿈치를 탁탁거리며 공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끊어지지 않는 선 위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그녀의 몸은 탄력을 받아있었다. 처음보고 나는 기쁜 마음에 이름을 물어보려고 다가갔다. 그녀는 나를 흘끗 보기만 했을 뿐, 침묵을 했다. 그리고는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고 말했다. 댄스화 줄이 풀렸네. 나는 부끄러웠다. 댄스화 줄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허둥댔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는 학원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선생님에게 들었다. 정은수. 이름이 예뻤다. 그렇지만 그녀의 눈빛은 따가웠다. 그녀가 춤을 추는 모습처럼 그 눈빛은 너무나 꼿꼿했다. 아마 그때부터일 것이다. 내가 그녀를 지켜보기 시작한 것이.
나는 그녀와 함께 리듬을 타는 상상을 한다. 꿈도 꿨다. 내 발이 무거운 주머니가 달려서 나는 발바닥 전체로 쿵쿵 거리며 그녀의 주위를 걷자, 그녀는 마치 토슈즈를 신은 발레리나처럼 내 앞에서 발끝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우리는 돌고, 돌고 돈다. 눈을 마주 보며 서로의 발소리를 들어준다. 그녀의 발은 인간의 발이 아닌 빛나는 쇠붙이로 된 발 같다. 그녀는 쇠붙이로 된 발로 쉼 없이 춤을 추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내 발은 원시적인 인간의 발이 맞다. 나의 발은 송곳에 찔리면 피가 흐르는 살점으로 이루어진 발이다. 나는 어서 이 모래주머니가 떨어지기를 바라며 내 발을 잡아 뜯기 시작했다. 그녀는 쇳소리를 내며 이미 저만치 춤을 추며 사라져 간다. 내 발은 상체기에 피가 나고, 발은 그 피에 적셔져서 바닥에 끈적이며 달라붙는다. 나는 잠에서 확 깨어난다. 그녀와의 춤은 오늘 밤에도 실패이다.
은수야. 야 정은수.
권태가 부른다. 은수는 고개를 돌리고 가만히 서 있는다. 권태가 은수 앞으로 뛰어간다. 요즘 통 보이지 않던데, 또 춤췄냐? 은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은수는 대학원을 그만두었지만 학교에 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대학교에는 연못이 있는 작은 공원이 있다. 그곳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헤드폰을 끼고 MP3를 듣는다. 권태는 은수가 대학원을 그만두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듣고 걱정했다. 권태는 은수 같은 여자를 알기에는 너무 FM이다. 그가 이해하는 것은 은수가 도서관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읽는 책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녀는 주로 소설을 읽는다. 지금도 그녀의 손에는 ‘겨울, 아틀란티스’라는 책이 들려있다. 권태는 책 제목을 대충 보고는 20대 후반의 여성이 읽는 감성 소설 정도로 짐작한다. 권태는 은수에게 항상 한결같다. 은수가 말을 안 하고 묵묵히 있어도 그는 항상 배려해서 말을 한다. 권태는 은수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갈 수 있을지 잠시 고민을 한다. 그의 지갑 속에 있는 지폐를 떠올려본다. 그녀를 데리고 어느 정도 레벨의 식당에 갈 수 있을지 생각한다. 은수는 권태의 표정을 보고 알아차린다. 나 점심 갖고 왔어. 권태는 화들짝 자신의 치부를 들킨 것처럼 놀란 표정이다가, 곧 말한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 너 또 고구마 싸왔지? 은수는 별 다른 표정 없이 응이라고 답한다. 둘은 말없이 실랑이를 벌인다. 은수는 발을 톡톡 거리며 좀 심심하다는 표정이다. 권태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은수의 마음을 어떻게 돌릴지 머릿속을 굴린다. 권태는 이내 한숨을 쉬며 말한다. 그럼 나랑 잠깐 편의점에 가자. 나도 너랑 공원에서 점심 먹게 간단한 먹거리를 좀 살게. 은수는 그래라고 말하고 함께 편의점으로 향한다.
공원은 서서히 오르막이고, 아래 지점에 작은 연못이 있고, 윗 지점에 벤치가 있다.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고, 햇살이 나무 사이로 비친다. 벤치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서 이곳저곳에 커플이 앉아있기도 하고, 솔로가 앉아있기도 하다. 권태와 은수는 나무로 만들어 놓은 계단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나 음악 들을게. 은수가 말한다. 권태는 아쉬운 얼굴이지만 그래라고 말한다. 은수는 노래를 들으며 고구마 껍질을 깐다. 그녀는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몸무게가 많이 줄었다. 권태는 그녀가 날씬해진 것이 싫지는 않지만, 예전 모습이 더 편했다. 지금은 은수가 솔직히 더 고고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있는 모습으로 그의 앞에 있다. 둘은 대학원에서 만났다. 영어 영문학과에서 은수는 바이런의 시를 공부하고 있었고, 권태는 경영학과 대학원에서 영어로 된 논문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처음 본 은수는 주로 서서 책을 보았다.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이 적었다. 그녀는 책장에 기대어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조용히 걸으며 읽기도 했다. 권태는 움직이는 사람을 인식하다가 그녀의 얼굴을 익혔고, 어느 날 그녀에게 커피를 뽑아주었다. 은수는 권태가 준 커피를 말없이 받아 들더니 다 마실 때까지 권태의 얼굴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권태는 그녀의 표정이 좋았다. 그 후부터 그는 은수에게 항상 변함없이 다가갔다. 은수는 권태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권태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권태가 은수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은수는 혼자 있는 시간을 갖기 때문에 권태가 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녀가 홀로 있을 거라고 짐작하면 그는 마음이 놓였다. 시간을 천천히 갖다 보면 자신의 마음을 은수가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나 석사 논문 심사가 거의 막바지야. 아마 한창 바빠져서 한동안 얼굴 보기 힘들걸. 은수는 가볍게 권태의 어깨를 치며 파이팅 한다. 권태는 은수가 추는 춤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탭 댄스라고 했다. 그는 소리가 나는 춤 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 춤이 얼마나 리드미컬하고 감각적인지는 짐작도 못한다. 은수가 그 춤을 출 때 얼마나 빨려 들어서 그녀의 발을 움직이는지 상상조차 못 한다. 그는 그냥 그녀가 춤을 잘 추긴 하나보다 하고는 금세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은수는 그런가 하면 권태 옆에 앉아서 머릿속으로 자신의 발을 상상한다. 귀에 얹어있는 헤드폰으로 그녀가 추는 춤곡이 흐른다. 그녀는 옆에 권태를 두고 홀로 나무 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자신을 떠올리고 있다.
나는 또다시 이 공원을 걷는다. 역시 그녀와 그놈이 앉아있다. 1주일에 서너 차례 그 둘이 앉아있는 걸 보면,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 옆을 서성이다가 앉을자리를 찾는다. 둘은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지만, 그놈이 은수를 쳐다보는 걸 보면 다정한 눈길에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내가 그녀 옆에 있다면 그녀와 함께 춤에 대해 이야기 나눌 것이다. 이 녀석은 그런 이야기도 할 줄 모르는지 그녀 옆에서 희번덕거리며 웃기만 한다. 나의 그녀 은수는 오늘도 고구마를 까먹고 있다.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은 건강한 손톱으로 얇은 고구마 껍질을 까고 한 입 베어 물고는 꼭꼭 씹는다. 물을 마신다. 그녀의 발은 그러나 춤을 추고 있다. 리듬을 타는 모습이 내 눈에는 보인다. 그녀는 타고난 춤꾼이다. 그녀는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지점에 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배고픔을 참고 있다. 나는 점심을 항상 거르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것이 그녀를 위한 나의 의식이라면 의식이다. 그녀에 대한 내 심정은 이토록 순정이다. 그런데 이 자식은 헤헤거리며 그녀 옆에서 뭘 처먹고 있다. 나는 그 자식이 은수를 잘 모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은수 역시 그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안다. 나의 그녀 은수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오직 고구마와 자신의 리듬에 빠져 있을 뿐이다.
나는 수학을 전공으로 한다. 나는 과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는 수학 그 순수한 공식에만 관심이 있을 뿐 부수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다. 수학을 문제로 푼다고 해서 잘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만 푸는 인간들은 수학을 습관화할 뿐이다. 수학은 이론을 천천히 이해하고, 그것을 그림을 그리듯이 머릿속에 내 방식대로 이해한 후에 문제를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문제를 풀고 좋은 성적을 내는 인간들은 결국 새로운 공식과 접근 방법에는 도대체 아이디어를 내지 못한다. 마치 수많은 책을 읽었다는 듯이 자신의 유식함을 자랑하지만, 책 하나를 두고 자신의 목소리로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수학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균형을 잡고 있을 뿐이다. 나는 수학 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내기보다,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접근하기를 택한다. 그리고 공부를 안 하는 나머지 시간에 내 일상이 얼마나 수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 찬찬히 생각한다. 일테면 플러스와 마이너스라는 쉬운 수학 접근을 보면 나의 하루는 플러스보다 마이너스가 많은 것이 더 낫다고 여긴다. 플러스가 많으면 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생긴다. 욕심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서서히 나의 치부를 들추어낸다. 마이너스가 많으면 다소 의기소침하더라도 세상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많이 보여주지 않게 된다. 그것은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한다. 사람들은 나를 내성적인 인간으로 보겠지. 좋다. 나는 그런 시선 속에 있을 때 스스로 더 자유롭다. 많은 인간들 앞에서 내 애기를 꺼낼 필요도 없고, 그 사람들 얘기를 있는 대로 다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 적당한 거리감은 오히려 공손한 분위기를 낸다. 그렇지만 예외는 있다. 바로 은수이다. 나는 그녀와 내밀한 관계가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녀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다 그녀는 나에게 안드로메다와 같다. 너무 멀지만, 너무 신비로운. 그리고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는.
신발끈이군요.
...
우리 학원에서 만났잖아요. 그때, 신발끈이 풀려있던 분이죠.
아. 안녕하세요.
이상하네. 여기서 자꾸 만나네.
신발끈이군요.
뭐라고요?
못 들었으면 됐어요. 저 아시죠? 학원에서 봤잖아요.
안녕하세요.
여기에서 자주 만나네요. 제가 여기에 자주 오는데,
저 따라오신 거예요?
신발끈이군요.
...
나는 그녀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말이 원래 없으신 거예요?
...
저는 이곳에 자주 오는데, 그때마다 저 벤치에 앉아 있는 걸 봤어요.
신발끈이 또 풀렸네요.
나는 그녀가 앉아있는 벤치 곁을 슬그머니 곁눈질하며 지나가다가
그녀에게 덜미를 잡혔다.
놀라지 마세요. 항상 제 옆에서 지켜본다는 걸 다 아니까.
제 이름은 알 테고, 이름이 뭐예요?
나는 혼자 상상을 한다. 그녀가 언젠가 내게 말을 걸어주기를. 그와 그녀가 점심을 다 먹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난다. 둘은 천천히 공원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나는 그 둘을 쫓아간다. 그때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나는 순간 깜짝 놀란다. 내가 걸어가는 속도를 늦추지 못하고 나는 그들보다 몇 계단 앞으로 간다. ‘정채가 너 대학원 그만둔 거 아까워하더라. 교수님도 너 대학원 휴학을 하지 왜 자퇴를 했냐며 자주 언급하신대.’ ‘정채는 공부 잘 마칠 수 있을 거야. 나는 공부하기에는 잡념이 많은 것 같아. 바이런 시를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나도 바이런처럼 인생에 뛰어들어야겠다고. 언제까지고 상아탑에 머무를 수는 없잖아.’ 나는 둘이 하는 얘기를 더 들으려고 발걸음을 그들의 보폭에 맞추려고 한다. 계단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그들은 영화를 보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진다. 내일 저녁 8시이다. 나는 영화제목을 듣는다. 나는 그들을 따라 영화관에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이다. 나는 내일 저녁에 있을 과모임을 못 나가겠다고 거짓말로 둘러댄다. 과대표는 너 또 못 오냐며 짜증 섞인 목소리이다. 나는 간단히 말한다. 나 내일 부모님이 시골에서 올라오셔. 과대표는 매번 부모님이 오시냐며 비아냥거린다.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나는 묵묵히 듣는다. 내일 은수를 볼 생각을 하고 참는다. 과대표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내 어깨를 툭 건드리고 지나간다. 나는 숨을 쉬고 참는다. 그게 상책이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은수와 그놈과 함께 보는 날. 나는 늦지 않기 위해서 잘 타지도 않는 택시를 불러 세운다. 영화 상영 시간까지 15분이 남았다. 어두운 상영관 어디에 그들이 앉아 있을지 모르지만, 같은 공간에서 그녀와 영화를 볼 생각을 하면 가슴이 뛴다. 그녀, 은수와 나라면 팝콘과 콜라 같은 것 필요 없이 영화에 푹 빠져서 볼 것이다. 분명 그녀의 시선과 나의 시선은 하나의 스크린 안에서 똑같은 씬에 꽂힐 것이다. 나는 그러리라고 느낀다. 영화를 보며 시시덕거리는 연인들과 우리는 다르다. 눈은 영화를 쫓아가고 있지만, 그 영상이 움직일 때, 우리의 숨소리는 하나가 될 것이다. 이심전심. 택시가 도착했을 때, 이미 영화는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는 만원이었다. 나는 발이 빠르지 않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몇 번이고 휘청거린다. 겨드랑이에 촉촉이 땀이 난다. 내가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그놈 옆에 앉아 있을까? 어두컴컴한 상영관 안에서 나는 정은수를 찾는다.
메기가 알바로 일하는 곳에서 손님들 눈치를 보며 남은 음식을 호일에 싸는 장면일 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녀다. 정은수이다. 혼자이다. 그녀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더니, 내가 앉은 좌석 앞에 앉는다. 그녀에게서 몸 내음이 난다. 춤을 추다가 왔는지, 짙은 땀내가 난다. 왜 혼자서 왔을까. 그놈은 그녀를 혼자 영화관에 보낸단 말인가? 내 손이 미끄러워진다. 그녀의 몸 내음을 맡자 몸이 뜨거워진다. 그녀는 왼쪽으로 삐딱하게 고개를 두고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린다. 가늘지만 길다. 나는 몸을 앞으로 수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 가까이에 코를 갖다 대었다. 그녀의 숨이 머리 꼭대기로 느껴진다. 고요한 숨소리가 들리고, 좋은 몸 내음이 나고, 움직임이 없다. 나는 그녀가 자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녀는 이곳에 쉬려고 온 것이다. 춤을 추고, 땀을 식히러, 이곳에 온 것이다. 영화는 막바지이다. 메기는 안락사를 선택했고, 프랭키는 그녀의 뜻대로 도와준다. 프랭키가 홀로 아일랜드 레몬 케이크를 먹는다. 그녀가 손을 들어 얼굴을 훑는다. 아마 그녀는 눈물을 흘리리라.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무겁게 일어선다. 그녀는 주제가가 끝날 때까지 앉아 있다.
영화관에서 나와서 그녀는 발걸음을 명동 방향으로 꺾는다. 나는 그녀가 무서워하지 않게 조심히 쫓아간다. 그녀의 뒷모습은 춤출 때 보았던 모습과 다르게 쓸쓸해 보인다. 그놈과 함께 오지 않아서일까. 그녀는 걷다가 잠깐씩 스텝을 밞는다. 그녀의 발을 훔쳐보며 나는 그 신발 속의 그녀의 은빛 발을 상상한다. 매끄럽고, 번쩍일 것이다. 무척 단단할 것이다. 그녀의 발소리가 울리며 내 귓가를 때린다. 나는 어느새 그녀와 함께 춤을 추는 나를 떠올린다. 나는 혼자 상상하며 걷다가 그녀를 놓쳤다. 시야에서 벗어난 그녀. 나는 멈춰 서서 사방을 둘러본다. 그때, 저 찾으세요? 그녀다. 나는 그녀를 쳐다본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서 있다. 두 발짝 앞이다. 그녀를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다. 그녀는 왼쪽 볼에 작은 점이 있다. 나는 그 점을 쳐다보며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말이 없다. 우리는 계속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그녀의 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왼발과 오른발이 직각으로 벌어져 있었다. 왼쪽 발뒤꿈치를 조금씩 톡톡 거리는 모습이 그녀가 듣는 음악과 박자가 일치했다. 그녀가 한 발짝 걸어왔다. 숨이 멈췄다.
그녀는 내게 귓속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울고 싶었다.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건넨 말이 그 말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그녀는 나를 알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 그 말속에 함축되어 있었다. 그녀가 귓속말을 하고 두 발을 돌려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내 작은 방에는 큰 사진이 하나 있다. 그 사진 속에는 생명체가 크게 클로즈 업 되어있다. 나는 그 생명체를 위해 항상 잠자기 전에 인사를 한다. 오늘 그 생명체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그 말을 큰 사진 위에 마커로 적어 놓는다. ‘신발끈이 또 풀렸어요.’
내가 상상했던 대로 그녀는 내게 말을 했다. 나는 그녀에게 항상 신호를 보냈는데, 그녀가 그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내가 항상 그녀를 만나러 연못 벤치에 앉아있을 때 혼자 떠올렸던 대화대로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내일 그녀를 만나러 댄스학원으로 갈 것이다. 그녀를 위해 무엇을 준비할까? 꽃, 책, 음반.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밤 나는 그것을 골똘히 생각해야겠다.
나는 정은수이다. 나는 이름이 정은수인 것이 싫다. 자기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내 주변에는 남자들이 많다. 그리고 내게 관심을 갖는 남자가 몇 명 있다. 오늘 그중에 한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났다. 아니, 그 사람이 나를 쫓아왔다. 그 사람은 항상 퀭한 모습으로 있다. 나는 그 점이 항상 궁금했다.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인데, 왜 그렇게 퀭할까? 오늘 권태가 나를 차고 말았다. 내가 차게 도와줬다. 권태는 나랑은 안 어울린다. 권태는 FM이고, 나는 예술가이다. 권태는 내가 춤을 추고, 소설을 읽는 것을 잘 모른다. 그는 나랑 점심을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와 이야기를 하면 졸리다. 편해서 졸린 것이 아니라 지루해서 졸리다. 권태에게 말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너랑은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아. 권태는 내게 별 말이 없었다. 의외였다. 권태가 순순히 내 말을 받아 준 것이. 돌아서자 화가 났다. 권태도 내가 그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나를 만난 걸까? 다시 가서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그렇지만 참았다. 기분이 똥 같아서 신나게 춤을 췄다. 춤을 다 추자, 권태가 보자던 영화가 떠올랐다. 그래서 보러 갔다. 가서 한참을 졸았다. 막바지에 가서 여자 주인공이 전신마비로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녀에게 안락사 주사를 놓고는 혼자 케이크를 먹는 장면에서 나는 눈물을 훔쳤다. 그때 누군가가 내 머리 뒤에서 숨을 쉬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이 그 퀭한 사람이었다. 극장을 나와서 명동으로 걸어가는데, 그 사람이 나를 쫓아왔다. 나는 슬쩍 옷가게로 들어갔다가 나를 찾는 그 사람을 보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 사람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권태랑은 달랐다. 그 사람은 기다렸다. 나는 보았다. 신발끈이 풀려있었다. 생각이 났다. 신발끈이 풀린 그 사람을 댄스 학원에서 보았던 것을. 나는 그 사람이 무안할까 봐 귓속말을 해주었다. 그 사람은 내 귓속말을 들었는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그 퀭한 사람을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꽃을 샀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꽃이 무엇인지 꽃집에 가서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꽃은 선인장이다. 선인장은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쳐다보는 눈길에서 그 가시가 어울린다고 느낀다. 선인장은 수많은 가시와 철갑 같은 잎 때문에 투박해 보이지만, 꽃을 피우는 순간은 매우 아름답다. 그 꽃이 피는 순간 선인장은 숨어있던 매력을 발산한다. 그녀 역시 그럴 것이다. 그녀는 숨어있는 매력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 다른 여자들처럼 화장과 옷에 신경 쓰지 않지만, 그녀는 춤을 추며 자신을 다스리는 아름다운 능력이 있다. 그녀는 보통과는 다르다. 그녀는 알면 알수록 수없이 많은 껍질을 뚫고 나올 여자이다. 마치 선인장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여리고 고운 빛깔의 꽃을 피울 그런 여자이다. 나는 선인장을 두 손에 들고 걸었다. 내 걸음은 무겁다. 나는 모래주머니를 달은 남자이다. 나는 신발끈이 잘 풀리는 어리숙한 남자이다. 나는 수학을 사랑하지만, 재빠르게 생각할 줄은 모른다. 내 눈은 그러나 다르다.
그가 왔다. 퀭한 차림은 여전하다. 나는 모른 척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의 발이 서서히 빨라졌다. 탭소리를 들으니 내 몸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소리만이 그곳에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빛이 있다. 권태가 생각났다. 권태는 내가 춤을 추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권태라면 어쭙잖은 박수를 치며 좋아할 것이다. 그러면 내 발은 멈추겠지. 이 퀭한 사람은 그런데 멀거니 쳐다보고 있다. 그 쳐다봄이 나를 긴장시킨다. 발 박자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음악과 맞지가 않았다. 아니, 음악을 뛰어넘어서 내 발 리듬이 살아나기 시작했달까. 나는 창문 너머 퀭한 사람을 쳐다보며 추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작은 화분이 들려있었다. 그 화분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발을 빠르게 움직여서 그것이 무엇인지 가까이에서 보려고 했다. 그것은 노란 꽃이었다. 꽃이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마술인가. 나는 잠시 멈췄다. 전자 드럼소리가 나를 계속 춤추라고 들려오는데, 나는 더 이상 춤을 출 수가 없었다. 퀭한 사람과 나는 서로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나를 통해 춤을 추고 있었다.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눈빛 속에 내 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는 내가 처음 보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녀. 정은수가 내가 왔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다. 그녀가 춤을 멈췄다. 우리는 서로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나는 그녀의 발을 보았다. 그녀는 내가 들고 있는 선인장을 보았다. 우리의 시선은 서로 엇갈렸지만 정확히 볼 것을 보았다. 나는 그녀를 통해 나의 시선을 느끼고, 그녀는 선인장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틀어놓은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그녀의 탭댄스 소리가 멎었다. 나는 천천히 눈길을 그녀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녀의 눈을 쳐다보기는 처음이다. 우리의 시선이 팽팽한 줄이 되어서 탭댄스를 추는 그녀를 묶어버렸다. 그녀는 그 안에서 나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다. 나를 기다렸다고. 나는 알 수 있다. 우리는 함께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