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티 구구 Sep 27. 2024

열쇠구멍

열쇠구멍이 있다. 비좁고 어두컴컴한 구멍 속으로 두 눈을 고정시킨다. 그동안에 수는 숨도 멈추고 있다. 정지 상태에서 바닥이 음험하게 파이는 것을 수는 감지한다. 파인 지점이 수 앞인지, 뒤인지, 옆인지 알 수 없다. 수는 두 눈을 고정하고 깊이 파인 어둠 속으로 낙하한다. 수의 두 눈은 모두 암흑이다.


 -전화한 사람이 너지? 공중전화번호 같은데, 너인 줄 알아.

 -나 아냐. 난 어제...

 -거짓말!

 -...

 -여기에서 다 말해볼까? 네가 전화한 이유. 네가 궁금해하는 모든 걸.


 수는 머리카락이 짧다. 두 귀가 정면에서 보이는 길이만큼 짧게 머리카락을 다듬는다. 수는 한 달이 지나가기 전에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을 알아챈다. 그러면 머리카락을 다듬으러 간다.

-귀가 보이게 다듬어주세요.

수가 가는 곳 디자이너는 항상 그렇듯이 얇고 가볍고 촘촘히 빗살이 있는 머리빗으로 수 양쪽 귀를 살짝 덮는 머리카락을 한 번 빗어보고는 가위질을 시작한다. 수는 가위질 소리를 들으며 얌전히 앉아있다. 머리카락 자르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본다. 디자이너는 빗질을 하고,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잡고 가위를 든 오른손으로 싹둑싹둑 자른다. 뭉텅뭉텅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쳐다본다.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지자 수의 두개골 모양을 덮은 검정 머리가 거울에 비친다. 수는 한쪽 입가를 쓱 올린다. 가벼워진 머리. 한결 나아진 기분. 뒷목이 슬쩍 시리다. 그 기분을 수는 좋아한다. 한 손을 들어 목을 감싼다. 한 손에 잡히는 얇은 목이다. 돈을 지불하고 수는 그곳을 나선다.


 -또냐.

 -시원해서 좋아요.

 -왜 자꾸 머리카락을 자르지? 이제 겨울인데.

 -목도리 두르면 돼요.

 수는 문을 닫고 방 안에 혼자 있다. 옷을 다 벗고 짧아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 사람이 그 랬던 것처럼. 그때, 수의 머리카락은 길었다. 건강한 모발이 물결쳤다. 그 사람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수를 어루만지고는 했다. 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응시하며 숨을 죽인다. 착각하지 마.


 -넌 좀 더 먹어야 해.

 -...

 -고등어 튀김 좀 먹어라. 깨작거리지 말고.

-...


 수는 최대한 열심히 씹고, 젓가락질했다. 수는 턱이 아픈 것도 참고 씹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먹어라' 소리를 들었다. 수는 뜨거운 불덩이를 삼키는 기분으로 먹을 것을 삼켰다. 배가 볼록 불러오는 기분마저 들었다.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치질을 오랫동안 했다. 수는 머리카락을 적시고 샴푸를 풀어서 슥슥 마사지를 했다. 머리카락이 짧아서 샴푸질이 수월했다. 헹구는 것도 수월했다. 짧은 머리카락에 있는 물기를 목을 도리질하며 없앴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머리카락이 아직 물기를 머금어 반짝일 때, 수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해가 저물어 공기가 차가웠다. 머리카락이 젖어 있어서 수는 몸을 떨었다. 수는 귀걸이를 사러 간다. 피어싱을 하러 간다. 양 쪽 귓불에 귀걸이가 달랑거린다. 수는 왼쪽 귓바퀴 부근에 피어싱을 할 것이다. 그 부근에 반짝이는 보석을 박을 것이다. 그것은 수에게 부적이 될 것이다. 착각할 때마다 반짝일 것이다. 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하늘에 초저녁 별이 반짝인다.


귀걸이, 피어싱이라고 쓰인 곳으로 들어간다. 작은 방안에 탁자가 두 벽면에 있고 그 위에 빼곡하게 귀걸이와 피어싱이 진열되었다. 터키석이 박힌 것, 까만 오닉스가 박힌 것, 반짝이는 크리스털이 박힌 것, 은으로 만들어진 것, 그것들 중에 수는 오닉스를 고른다. 귀걸이는 한 쌍이지만, 짝짝이로 디자인되었다.


-앉으세요.

은빛으로 빛나는 얇은 금속봉으로 수의 왼쪽 귓바퀴를 찌른다. 그 후에 그 자리에는 루비같이 빨간 피어싱이 반짝인다. 머리카락이 귀 위까지 짧게 잘라져서 까만 귀걸이와 빨간 피어싱이 섹시하게 한 쌍을 이룬다. 수는 양손으로 귀를 가볍게 문지른다. 통증은 짧게 지나가고 피어싱 부분이 뜨거울 뿐이다. 수는 찬공기에 뜨거운 귀를 식힌다.


수는 걸으며 혼잣말을 한다. '나야. 분명 나야. 나는 그 자리에 있었어.' 수는 언젠가부터 과거의 그때를 떠올리며 골똘히 생각을 한다. 너무 골똘히 빠져서 누가 수 앞에서 박수를 쳐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수는 사람이 필요하다. 수의 생각을, 기억을 고스란히 받아서 들어줄 누군가가 절실하다. 수는 곧 무너질 것처럼 과거의 늪에 빠져 있다. 하나의 기억이 다른 기억을 생각이라는 수면 위에 부표처럼 떠오르게 한다. 그 부표는 연결 고리가 되어서 그물처럼 수를 기억의 바닷속에 익사시킬 것이다. 위험해 수!


찬바람에 얼얼한 귀가 무감각하다. 수는 검은색 가죽 재킷 안에 따뜻한 모직 남방을 입고 있다. 목에 두른 스카프가 초겨울에는 다소 추워 보이는 초록색이다. 꼼꼼하게 목에 둘렀지만 어딘가 모르게  추워 보인다. 수의 양미간과 이마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수는 숨을 깊게 쉬지 않고 있다. 거의 정지된 듯한 얕은 호흡으로 수의 몸이 지탱하는 것이다. 그녀가 보는 것은 현실 바로 그 자체가 아니다. 수는 현실과 기억, 그 경계선에서 서서히 침잠해 간다. 수는 자신을 가두고 있다. 그럴 수밖에. 수는 혼자이다. 절대적으로 고립되었다. 수는 기억 속으로 걸어간다.


-너와 나, 그리고 한 명이 더 있었어. 우리는 눈을 가리고 목소리를 따라 가까워지고 있었지. 그리고 내가 잡은 사람은 네가 아니었어. 아직도 그 숨결이 느껴져. 넌 그 뒤에 서서 나를 불렀던 거야. 내가 두 눈을 감은 손수건을 풀자 그 사람은 도망쳤어. 넌 그 사람을 뒤쫓던 나를 붙들었지.

수는 혼자서 거울을 보고 말한다. 거울에 비치는 사람은 수뿐이다. 수는 언젠가부터 잠들기 전, 독백을 한다. 수는 깊은 밤이 되어도 작은 스탠드 하나를 켜 놓고 조용히 읊조린다. 수의 기억을.


 수는 서서히 망상과 기억의 경계가 흐려진다. 아무도 수를 돌보지 않는다. 수는 긴장되어서 더욱 자신을 가둔다. 사람과 사람 간의 믿음이 무너졌다. 수는 심한 배신감과 그것을 일으킨 기억 속에 자신을 꺼낼 수 없다. 그것은 사랑을 기초로 세워진 관계에서 비롯되어 수를 상처 입혔다. 우정이라는 사랑. 이성을 향한 기억의 조합. 이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 내면의 목소리가 수를 점점 망상으로 걸어가게 한다.


 수는 눕는다. 마치 딱딱한 수술대 위에 누운 것처럼 수의 몸은 긴장했다. 눈을 감았지만, 머릿속이 윙윙거리는 어지럼증으로 가득하다. 차라리 눈을 뜨고 계속 침잠하는 자신을 붙들고 밤을 지새우고 싶다. 두 눈으로 어둠을 헤쳐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수는 그 무언가에게 말을 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말을 건넨다. 그런데 수의 귀 속으로 어떤 응답이 들린다. 수는 계속 대화를 하고 싶다. 한 밤을 지새우기 힘든 수에게 그 응답은 안온한 기분을 가져온다.


 새벽이 다 오기도 전에 수는 눈을 부릅뜬다. 한밤 중, 수가 무언을 하고 수의 머릿속으로 응답이 오고 그러는 동안에 수는 짧은 잠을 잤다. 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수는 머리가 더 무거워진 것을 감지한다. 수는 도리깨질을 한다. 수는 참기 힘든 무게에 짓눌려서 머릿속을 누군가가 해체해 주기를 바란다. 수는 그런 안간힘 속에서 몸을 일으킨다.


 라디오를 튼다. 라디오에서는 새벽이 오기 전 치지직 거리는 소음을 내본 낸다. 수는 그 소리에서 무언가를 감지한다. ‘그으래, 너야…’ 마치 그렇게 들린다는 듯이 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스탠드를 켠다. 거울에 수가 비친다. 거울 속에서 수를 쳐다보는 수를 보며, ‘너지! 바로 네가 나를 감시하고 있어’라고 조용히 되뇐다. 수는 거울 뒤를 뒤져본다. 타인이 거울을 통해 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수는 착각한다. 아니 망상을 한다. 방 안이 온통 거울로 덮여있다는 망상이 불현듯 덮치고 수는 더욱 정신을 또렷하게 한다. 그 또렷함이 현실을 더 넘어서게 한다.


 라디오는 5시를 알리는 소리를 내고 명료하고 울림 있는 라디오 시그널 음악이 흐른다. 라디오 진행자는 시그널 음악 못지않게 하이톤으로 말을 한다. 수는 귀를 기울인다. 라디오 소리가 수의 귀로 쏙쏙 들어온다. 수는 라디오 진행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믿어버린다. 라디오 진행자가 노래를 들려준다. 노래는 어느 나라 음악인지 모르게 섞여 있다. 노래는 둥둥둥 북소리 같다가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는 얼룩말 무리의 소리를 닮았다가 비음(鼻音)이 섞인 흑인 영가 같다가 고요한 바다처럼 묵직한 존재로 수에게 다가온다. 수는 라디오를 끈다. 수는 두렵다. 수는 지친다.


 자리에 다시 눕는다. 이브자리는 수가 밤새 뒤척이며 땀을 흘려서 축축하다. 수는 울고 싶다. 꺼이꺼이 울면 수 가슴에 꽂힌 정(釘)이 빠질 것 같다. 수는 울음이 불가능하다. 수의 감정은 바닥으로 꺼져서 낙하해 버렸다. 그녀의 눈은 열쇠구멍에 빠져버렸다. 열쇠를 찾아줄 이는 수의 곁에 없다. 수는 열쇠구멍 속 암흑으로 낙하했고, 거기에서 빠져나오려면 스스로 화(火)해 버려야 한다.

수는 육신이 정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온몸으로, 수의 머리로 감지한다. 수는 궤도에서 벗어난다. 수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굳게 열고 옷을 입는다. 밖으로 나간다.


 밖은 초겨울이고 새벽이고 해가 뜨기 전이라 땅이 얼어 있다. 수는 걷는다. 아주 빠르고 잽싸다. 수의 온몸에 흐르는 에너지는 매우 긴장되어서 가장 높은음을 울리는 종소리처럼 날카롭다. 수는 그 날카로움에 의지해서 거리를 걷는다. 칼바람이 불어도 수는 끄떡없다. 수는 짧은 머리에 얇은 티셔츠와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목에 두른 것이 그 초록색 목도리이다. 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앞으로 앞으로 전진한다. 수 앞에 누군가가 다가온다. 그 여자는 조깅 중이다. 수에게 묻는다.


-한국사람들 친해지려면 어떻게 하죠?

-친해져요?

-한국에서 입양되어서 미국에서 지내다가 왔어요.

-술. 술을 마셔보세요.

-아! 감사합니다.


 날씬한 그녀는 수를 지나쳐서 뛰어간다. 수는 순간 눈에 보이는 간판이 ‘술이야’ 간판인 것을 보고 마치 계시라도 받은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수 역시 조깅하는 그녀처럼 뛰기 시작한다. 칼바람이 그녀를 관통하고, 수는 세차게 숨을 몰아 쉬면서 수의 두 눈에 거리를 고정시킨다. 수는 얼마쯤 뛰다가 2층 교회에서 기도하는 소리에 뛰던 발을 멈춘다. 교회에서 들리는 기도소리는 고함과 비명과 흐느낌이 섞여 있다. 수는 그 모든 감정을 다 받아들였다는 듯이 서있다. 수는 이 역시 어떤 계시라고 생각한다.


 수는 계속 뛴다. 수의 집에서 이미 1시간 거리를 걸어야 하는 지점까지 뛰었다. 새벽이 점점 밝아오고 칼바람이 조금 무디어지고, 거리에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걸어가는 것을 수는 기뻐한다. 수는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저씨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크게 내쉬세요.’ 수는 마치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을 지나가는 행인에게 하는 것 같다. 수는 놀랍도록 명랑하다. 수는 버티는 중이다. 그 어둠 속에서, 뛰고 숨 쉬고 말하는 동안에 벗어났다고 착각한다. 수의 심장은 마치 수의 발바닥에 있는 것처럼 펄떡대며 뛴다. 심장은 요동을 쳐서 수는 아주 쾌활한 목소리로 아침인사를 한다.


 수가 이제 그만이라고 생각한 곳은 그 도시의 강변에 이르러서였다. 잔잔한 물결을 바라본 수는 새벽에 들은 노래가 떠올랐고, 방 안에 들어가고 싶어 졌다. 다시 라디오를 틀고 수가 두려움을 떨쳤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어 졌다. 수는 다시 뛰어갈 수 없어서 택시를 탄다. 택시비도 없이 탄다. 수는 역시 명랑 쾌활하게 운전기사님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한다. 운전기사는 넉넉한 미소를 띠며 수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수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수가 방안에 들어왔을 때, 방안은 라디오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수는 라디오를 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라디오에서는 진행자와 게스트가 낄낄거리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수는 듣기 싫었다. 수는 둘 다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수는 아침을 먹으러 부엌으로 간다. 부엌에는 먹다 남은 음식물이 그릇 여러 개에 쌓여 있다. 수는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릇만 쌓아 놓고 지냈다. 수는 갑자기 숨이 막힌다. 남은 음식물과 그릇들이 수를 더럽힌다고 느낀다. 수는 흔들린다. 수는 큰 비닐을 꺼내서 음식물이 담긴 그릇을 모두 담는다. 큰 비닐은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그릇들이 부딪힌다. 다 치운 부엌에는 냄비와 머그잔만 즐비하다. 수는 큰 비닐을 부엌 구석에 둔다. 수는 지친다. 무엇이 수를 자꾸 열쇠구멍으로 밀어 넣는 것일까.


 수는 물을 한 잔 다 마시지도 못하고 앉아있다.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는데, 수는 여전히 어지럼증이 있다. 수는 숨쉬기가 힘들다. 수는 천천히 방 안을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상한 손동작을 한다. 걸으며 국민체조를 하는 것인지, 앞 뒤로 크게 팔을 휘젓고 있다. 수는 마치 자신이 큰 돌개바람이 된 듯하다. 가슴이 뻥 뚫리기라도 할 것처럼 돌개바람을 더욱더 세게 한다. 수는 거리에서 뛰었던 것처럼 온몸이 그 동작에 집중해 있다. 수는 방안을 계속 돌고 돈다.


수의 귀로 돌개바람 소리가 휙휙 지나가는 듯하다. 그 바람 소리 너머로 수에게 무슨 응답이 있는 것 같다. 수는 더욱더 몰아간다. 동작에, 소리에, 수 자기 자신에게. 그러다가 쓰러진다. 수는 누운 것도 아니고 일어난 것도 아닌 것처럼 몸이 뻣뻣해졌다. 수는 자신이 몸을 벗어나려고 한다고 느낀다. 그러고 싶다. 이곳을 벗어나려면 수는 몸을 버려야 한다. 수는 뻣뻣한 자신의 몸을 가누느라 손동작이 이상한다. 발을 몹시 쿵쾅거리고, 손은 이상하게 까딱까딱한다. 수는 지금 입은 옷에 초록색 목도리를 꼭꼭 두른다. 그녀의 목을 잘라내야 한다는 듯이.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동여맨다. 수는 까만 커트에 한쪽에 루비색 피어싱과 까만 오닉스 귀걸이 한 쌍이 귀에 박혀있다. 수는 귀걸이 한쪽을 번개같이 떼어낸다. 그리고 문 밖으로 나선다. 그녀는 조금 차분해졌다.


 바다. 그곳으로 간다. 수는 그녀가 사는 도시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가 어디인지 안다. 잔잔한 물결이 일던 그곳. 바로 새벽에 다녀왔다. 수는 천천히 걷는다. 너무 차분한 수. 폭풍의 눈은 잠잠하다지. 수는 이제 폭풍 속에 들어섰다. 수는 그 폭풍을 이끌고 간다. 폭풍은 수를 두려움, 배신감, 외로움, 지독한 아픔, 그리고 분열로 데려갔다. 그런데 폭풍은 보았다. 수를. 이제 그녀를 데려간다.


 수는 처음으로 운다. 그녀는 그동안 울지 못했다. 그동안이라는 것은 그녀가 그와 헤어지고, 그 와 헤어진 후 시달린 기억 속에서 1년 남짓 보낸 시간 동안이다. 그동안 수는 따지고 따졌다. 스스로에게. 왜 그 기억이 이제야 나는 거지? 수는 지나가는 길에 공중전화박스로 간다. 전화를 한다. 전화를 일찍 받은 수의 친구는 잠긴 목소리로 ‘여보세요’라고 한다.


-나야.

-…

-너 서지훈 알지?

-뭐?

-…

-뭐라는 거야? 나는 그런 이름 몰라.


 딸깍. 수는 느낀다. 그녀 가슴속 정(釘)이 쨍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수는 순간 두 눈이 뜨거운 걸 알아챈다. 수는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을 감지한다. 수는 두르고 있던 초록색 목도리를 푼다. 수는 그곳에 왔다. 수는 뒷 목을 두 손으로 깍지 껴서 잡아본다. 파르르 떨리는 몸. 수는 눈앞에 거대한 단두대가 있다는 듯이. 이제 수는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하고 싶다. 수는 알아챈다.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수는 그곳에 다다랐다. 잔잔한 수면이 아래에서 기다리는 그곳. 수는 난간에 기대어 목을 드리운다. 머릿속이 온통 환해진다. 수는 수면으로 똑똑 떨어지는 방울을 통해 자신이 자유로워진다고 믿는다. 이제 그녀의 머리는 점점 수그러들고 뒷 목이 이완되는 것처럼 가볍게 낙하하는 것을 느낀다. 열쇠구멍에 열쇠가 꽂히는 순간이다. 철컥.

이전 06화 귓속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