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어디에 있게요? 선생님.
아이가 잘하는 놀이이다. 아이는 내가 오기 전에 항상 숨어 있다. 숨는 장소도 일정해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도, 아이는 자신을 드러내기 전에 숨어서, 내가 찾기를 바란다.
지난번에는 피아노 의자 아래에서 훤히 보이는 몸통을 보이고 웃으며 내게 물었는데, 이번에는 벽장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짐짓 어려운 듯이 기웃거리며 어디에 있을까 하며 아이 물건을 주섬주섬 만졌다. 아이는 키득거리며 웃는다.
-여기에 있지요.
아이가 벽장문을 벌컥 열고 나온다. 아이는 고학년인데,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아서 남자아이 목소리가 소프라노처럼 높고 곱다. 벽장에서 나오며 환하게 웃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오늘 피아노 레슨은 잘 될 것 같다. 아이는 귀가 예민하고 절대음감이 있어서 피아노 소리를 아름답게 울리는 타건을 할 줄 안다. 아이의 손은 매끄럽고 고운 데다가, 손톱이 뾰족하게 다듬어져 있다. 처음에 나는 손톱이 길어서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는 요령 있게 건반을 건드린다. 피아노 건반은 누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건반이 내려가는 깊이를 따라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야 소리가 아름답게 울린다. 아이는 오늘도 톡톡 거리는 손톱 소리를 내며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를 들려준다. 아이의 피아노 소리를 듣자 얼마 전에 갔던 호수가 떠오른다.
호수에 다다랐을 때, 물안개가 덮여있는 광경을 보니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침부터 엄마와 다투는 말을 해서 기분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아침밥을 먹으며 속이 불편해서 집에 있기가 싫었다. 무작정 밖으로 나와서 경차를 몰고는 호숫가로 왔다. 가을이라서 물안개가 자욱했다. 차창을 내리자 짙은 안개가 콧속으로 스몄다. 안개는 습하고 차가웠다. 아무런 냄새가 없지만, 무게는 느껴졌다. 무게. 안개가 공기 중에 떠있는데 왜 무게가 느껴졌을까.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안개는 내 호흡을 길게 늘이며 걸음을 무겁게 했다. 발밑에는 작은 모래 알갱이가 밟히며 자글자글 소리를 냈다. 호수는 소리가 없었다. 고요함과 습함 사이에서 나는 걸었다. 엄마와 말다툼은 요점이 없었다. 나는 요점을 분명히 하려고 말을 하는데, 엄마는 감정에 중점을 둔다. 그럴 때 나는 내가 딸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나는 마치 남자인 것만 같다. 나는 엄마보다 논리적이다. 엄마는 내가 주관 있게 이야기를 하면 너는 생각이 너무 강해라며 어깃장을 놓는다. 나는 내 생각이 강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조금 남다르기는 하다. 그게 나인데, 엄마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를 계속 담금질을 하듯이 부드럽게 연마하려고 말을 한다. 나는 말을 섞다가 지친다. 그러면 말이 끊기고 내 마음은 육중한 철문이 닫히듯이 갑갑해진다. 안개를 보며 그 마음을 열어보려고 하지만 철문은 오히려 녹이 스는 것 같다. 내 곁에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 그 누군가가 누구일까 과거를 되짚어본다. 현재를 떠올려본다. 미래를 바라본다. 그 누군가가 내게 있다면 나는 이 고독을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있었지만, 현재는 없고, 미래에 만날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분홍빛 꿈을 꾼다. 아침 햇살이 서서히 안개를 걷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선생님!
아이는 또 이상한 질문을 할 것이다. 아이는 예술적 기질을 가진 만큼 독특한 생각을 가졌다. 나는 그런 아이가 좋다. 질문에 대한 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이는 궁금해서 질문을 하는 것뿐이다. 나도 그랬기에, 나는 아이가 질문을 하면 재미있게 들어주고, 나도 재미가 떨어지지 않게 아이에게 도로 질문을 한다. 그래서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신의 생각을 주어 담는다. 아이는 그러나 고집이 있어서 다시 반문을 한다. 그런 반문은 가끔은 짜증이 난다. 그럴 때는 내가 어른이기는 하나보다 싶다. 고분고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른들에게는 조금씩 생긴다. 그게 아마 나이가 들면 생기는 권위가 아닐까. 반문을 하는 아이는 목소리가 살짝 갈라진다. 이 아이는 예술가 기질도 있고, 고집도 있고, 성깔도 있다. 나중에 이 아이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나는 아이가 반문을 하는 것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한다. 그러자 아이는 목소리가 잦아들면서 다시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를 들려준다. 나는 이 아이가 굳이 피아노를 배우지 않고 독학을 해도 충분히 잘할 것이라고 아이 어머니에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이가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피아노 레슨을 즐거워한다고 말했다.
아이 어머니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상자에 들어가기를 좋아했다고 나에게 얘기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도착하기 전에 방 안에서 오늘은 어디에 숨을지 온통 쑤신다고 했다. 그것은 아이에게 한 가지 애정표현인 것이다. 다정하게 웃거나, 공손하게 말하는 것을 못하지만, 아이는 제가 어디에 있게요 하는 질문으로 나를 반기는 것이다. 처음에 아이가 방 안에 없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방안에 흐르는 정적 때문에 갑자기 내가 있으면 안 될 곳에 온 것 같았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서 나는 큰 소리로 ‘어머니 아이가 방 안에 없어요’ 하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아이가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며 저 여기 있는대요 했다. 나는 이게 무슨 조화이지 싶었다. 어머니는 레슨이 끝나자 아이가 조금 독특하다고 이해해 달라며 내게 상자 이야기를 해주었다. 상자는 아이에게 아늑한 공간이며 숨어 있는 것은 그 아이에게 즐거움이었다. 나는 아이가 측은해졌다. 아마 아이는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내게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이 반가웠다.
오늘 배우는 새 곡은 마블홀이다. 멜로디가 3박자 속에서 묘하게 음정이 반음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래서 느리게 흘러가는 멜로디가 꿈꾸는 느낌을 준다. 아이는 그 반음정을 놓치지 않고 피아노의 검은건반을 명료하게 울린다. 반음 부분이 깨끗하게 들려서 마치 종소리 같다. 나는 흐뭇하다. 이 아이는 분명 예술가가 될 충분한 소질이 있다. 나는 피아노를 전공하며 이 아이만큼 음정에 민감한 사람을 아직 못 봤다. 아이가 마블홀을 다 치자. 이 곡이 마음에 든다며 마블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너 대리석 알아? 건물에 들어가 보면 아주 매끄럽고 구슬같이 빛나는 돌이 바닥에 깔린 것 본 적 있지? 그게 마블이야. 마블홀에 들어가면 아마 자기 발소리가 너 피아노 소리처럼 똑똑히 들리겠지.
아이는 마블이 무엇인지 몰라도 소리로 충분히 표현하고 느낀다. 마블이 무엇인지 알아도 소리를 들을 줄 모르면 다 허탕인 것을 이 아이는 뛰어난 음감과 손가락 감각으로 피아노로 표현한다. 사람 마음도 이런 것 아닐까. 말이 아무리 번드르르해도 마음속을 간파하지 못하면 한마디로 끝나는 것을 열 마디를 해도 상대방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 포장은 알 수 없다. 포장은 그 사람 스타일을 알려주는 것뿐이지, 그 사람 속은 결국 겪어봐야 안다. 내가 그 사람과 악기를 연주한다면 아마 얘기가 다를 것이다. 악기는 호흡이 함께 하는 것이니까. 말을 하는 것은 그럼 어떨까? 만약 한 사람이 한 사람을 계속 맞춰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분명 언젠가는 깨질 관계일 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왜 코가 끝이 굽어있어요?
-그걸 매부리코라고 하는 거야.
-매부리코?
-선생님 어렸을 때 마녀라고 많이 놀림받았어.
-마녀면 좋은 거잖아요.
-왜?
-마법을 부릴 줄 알잖아요.
-하하하. 너 덕분에 선생님이 마법이 생겼다. 고마워.
아이는 기분 좋게 내게 덕담까지 했다. 아이가 보는 눈은 분명하고 의미가 있다. 나도 어릴 적 눈으로 본 사람을 생각해 보면 한 번에 간파하는 일이 많았다. 아이는 꾸밈이 없기 때문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질문을 할 줄 안다. 어른이 되면 그것이 버릇없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사는 동안에 그 시선을 잃어버리면 관찰자가 죽어버리는 것이다. 관찰자는 죽고 그 대신에 눈치 보는 사람이 들어서겠지.
차창을 내리고 경차로 달렸다. 이른 봄이라 아직 바람에 찬 기운이 있었지만, 햇살은 따뜻했다. 요새 나의 기분이 안 좋은 이유는 꼭 엄마 때문이 아니다. 친구 정희 때문이다. 정희와 나는 고교 동창인데, 대학에 와서 친해졌다. 정희는 나와는 다른 과이다. 그녀는 경영학과를 다닌다. 그녀는 나보다 한 뼘은 더 넘게 키가 크다. 우리는 많이 걷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오늘 또 걷다가 서로의 대화가 싸늘하게 식어서 끝났다. 나는 그녀와 대화를 하면 내가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뭐가 문제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내가 매우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고 그러면 나는 꼭 울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처참해진다. 우리는 처음에 그러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만남이 고역이 되었다. 그녀는 큰 근심거리가 있는 것 같은데,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바로 내가 그 근심거리인 것인지 분명치 않게 말을 한다. 우리는 강변을 따라서 많이 걷는다. 오늘도 그 길을 걸었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걷다가 그녀가 점점 심각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통에 긴장이 되었다. 내가 너무 내 멋대로 이야기를 하는 걸까? 나는 정희와 걷는 것을 좋아하고, 그녀를 만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만, 만남이 점점 어긋나는 것 같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나야말로 관찰자는 죽고 눈치 보는 사람만 있다. 관찰자가 되기에는 이제 내게 정희는 너무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중요한 말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녀의 생각에 몹시 다다르고 싶다고 생각한다. 내게 있어서 친구 정희는 꼭 처음인 마냥 소중하다. 우리는 함께 밤길을 걷다가 말이 트였다. 그녀는 대학 생활이 좀 별로인 듯했고, 나도 동감이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와 그 밤길을 걸으며 그녀를 동경(憧憬)하게 되었다. 그날 밤, 하늘에는 반달이 차갑게 떠 있었다. 나는 묘했다. 반달과 정희. 나는 어떤 예감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와 나의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고교 시절에 잠시 마주치거나 얘기 나누었을 때는 몰랐던 내 감정은 그날 밤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그 감정을 반듯이 세워서 내 마음에 곱게 모셨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시작된 것과 같았다. 나는 열아홉 살이 되었고, 대학 청춘 시절이 시작되는 순간이었고, 성인으로 첫 발을 내딛는 시간이 맞물리고 있었다.
차 안에는 별 물건이 없다. 나는 경차를 깔끔하게 썼다. 나는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쓰는 버릇이 있다. 물건은 항상 그 자리에 있고, 나는 먼지가 쌓일 정도가 되어야 장소를 정리했다. 좀 건조하고 냉랭한 경차 안에 나 홀로 있다. 도로를 따라 경차는 가볍게 속도를 낸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속도를 줄이기도 하고 올리기도 한다. 핸들을 아웃코스에서 지그시 당기는 기분으로 조작하며 천천히 풀어준다. 속도를 느끼는 순간에는 마음이 고요하다. 아무리 큰 사운드의 음악을 틀었다 해도 속도가 주는 집중력에 마음은 단 하나로 모여진다. 나는 지금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어디에도 발 붙지 못하는 나의 이십 대 마음을 말이다. 다행이다. 내게 경차가 있어서. 계기판을 보고 기름이 어느 정도 들어있나 가늠해 본다. 반 이상을 썼다. 나는 드라이브를 마치고 천천히 브레이크로 속도를 줄이고 앞에 보이는 주유소로 향한다. 주유소에 도착하자 알싸한 기름 냄새가 난다. 3만 원어치 기름을 넣고 계기판을 보니 주유 눈금이 서서히 올라간다. 나는 좀 더 달리려고 핸들을 꺾어 좌회전을 하며 주유소를 빠져나간다.
생각해 보니 정희와 가장 처음 있었던 시간이 고교 시절 영화를 함께 본 시간이었다. 나는 그때 말이 없고 조용해서 정희가 말을 더 많이 했다. 우리는 학교 특별 활동 시간에 함께 영화관에 갔다. 단체로 갔는데, 정희가 내 옆에 앉아서 보았다. 스크린에는 거대한 우주선이 떠 있고, 그 우주선에서 광선 검을 든 주인공이 로봇들과 싸우고 있었다. 블랙 투구를 쓴 로봇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주인공은 블랙 로봇이 하는 말에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그가 주인공에 게 ‘I’m your father.‘라고 말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비명과 동시에 한쪽 팔을 광선 검에 잃는다. 그리고 우주 속으로 떨어지는 주인공. 사실 이 영화는 어렸을 때 오빠와 함께 본 영화이다. 다시 보아도 그 장면은 가슴을 움찔하게 한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정희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장면이 인상적이었니? 정희는 딱히 대답을 안 했다.
과거를 떠올리니 현재의 정희가 더욱 이해가 안 된다. 한 번은 그녀와 나 사이에 누군가가 있는 건가 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나는 ’ 너에게 남자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그래서 너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지?‘라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정희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내게 더 이상 말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살얼음을 내딛는 심정으로 서로의 말을 들어야 했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다. 내가 무심코하는 말이 정희에게는 비수에 꽂혔고, 그러면 다시 내게 화살이 되돌아왔다. 지겨웠다. 더 이상 그만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정희는 친구였다. 친구란 모름지기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 그녀가 연락을 안 한다면 이대로 서서히 소원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희는 꼭 그럴만한 시간이 되면 연락을 하고 나를 만났다. 우리는 걷고, 이야기 나누고, 서로에게 아픔을 주고, 헤어지고.
외곽 도로를 타고 달리는 경차는 미세하게 진동을 하고 있다. 왜 이리 외로운지 모르겠다. 겨우 스무 살이 지났는데 왜 사는 게 이리도 지겨운 것인지 모르겠다. 나에게 관계란 무엇인가 싶다. 엄마와 나, 정희와 나. 둘 다 여자들이다. 나는 여자들이 그래서 싫다. 동성이 주는 친숙함과 편안함 속에는 이상한 자학이 들어있다. 내게 무엇이 결핍이 되어있는 것일까. 수다를 떨 줄 모르는 것이 나의 결핍일까? 정희 심중을 꿰뚫지 못하는 나의 아둔함이 결핍일까? 엄마의 말에 순응하지 않는 나의 고집이 결핍일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궁핍하게 만드는 걸까?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순간에도 어쩔 수 없는 공허함이 나의 내면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좀 더 밟는다. 경차가 소리를 왜앵 내며 앞으로 내달린다. 정희에게 전화를 하자. 그래야겠어. 이번에는 내가 뭔가 말하고 말겠어. 그것이 무엇이든지. 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나는 문자를 날린다. 그리고 그곳으로 간다.
기다린 지 1시간이 다 되는데, 문자 답도 없고, 전화도 없다. 나는 기다린다. 이 기다림이 망쳐지면 내 의지가 산산 조각나서 나는 정희에게 할 말을 한마디도 못할 것만 같다. 시켜 놓은 페퍼민트 차가 식어서 쓴 맛이 난다. 나는 눈을 감는다. 이대로 눈을 감고 정희가 인기척을 낼 때까지 수면(睡眠)을 해야겠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봐.
정희가 맞은편에 다소곳이 앉아서 나에게 먼저 말을 시킨다.
나는 가슴이 시리다. 말을 하기도 전인데, 벌써 나는 지고 들어간다.
-나는 우리 사이가 힘들어. 왜 그런지 네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해.
-나는 힘들지 않아. 뭐가 어떻게 힘든 지 얘기해 봐.
-...
나는 할 말이 점점 없어진다.
-나는 전공이 너와 달라서 그런 거겠지. 너의 생각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우리는 자주 만나는 편이고 많이 이야기를 나누지만, 쉽지 않아. 나에게는 뭔가 다른 돌파구가 필요해.
정희는 천천히 차를 마신다.
정희 눈빛은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다.
오히려 내 눈빛은 정처 없이 나부낀다.
나는 너무나 배신감이 든다. 나는 이렇게도 힘이 든데, 그녀는 어쩌면 저리도 평안해 보일까.
우리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정희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나는 패배자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정희의 찻잔이 달그락 소리가 날 때, 나는 벌떡 일어선다. 나는 그냥 나와 버린다. 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흐린 하늘에 눈이 조금씩 날리고 있었다. 나는 뜨거운 것이 내 속에서 흘러넘치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계속 걷는다. 핸드폰이 울린다. 정희다. 도저히 받을 수가 없다. 나는 핸드폰을 끈다. 걸으며 주르륵 눈물이 흐른다. 내 눈은 빨갛게 변하고 눈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나는 그녀에게 처절하게 패한다. 나는 정희 그녀가 나를 짓뭉개는 것을 수없이 참아왔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으리라. 걷다 보니 길 옆에 나뒹구는 큰 종이 상자가 눈에 띈다. 바람에 종이상자 뚜껑이 흔들리고 있다. 나는 무심코 그 종이상자를 집어든다. 내 몸이 너끈히 들어갈 만한 크기이다. 아이가 생각난다. 아이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몸을 숨기고 나를 기다렸다. 어둡고 좁은 공간. 그 속에서 조용히 맞이하는 자신만의 세계.
난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 상자 안에 내 몸을 살포시 집어넣는다. 뚜껑을 닫자 바람이 들어오지 않고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상자 안에서 마분지 냄새가 난다. 나는 그 속에서 1부터 100까지 세어보겠다. 하나, 둘, 셋... 밖에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인도 아래에는 차들이 쉭쉭 지나간다. 나는 숫자를 세다가 다시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하며 셈을 반복한다. 나는 누구에게 이 상자 속의 나를 찾아달라고 해야 할지 생각해 본다. 아무도. 아무도 없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나는 여전히 외롭고, 지치고, 패배자이다. 상자 안은 암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