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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티 구구 Oct 07. 2024

소라색

                     

 우연이란 없다고 주인공이 영화 속에서 말하고 있다. 이 영화를 두 번째 보고 있다. 대사가 참 좋다. 여주인공의 눈빛이 나를 이끈다. 오크룸에서 만나자고 말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는 주인공과 남겨진 또 하나의 주인공. 둘은 말을 별로 안 했지만, 둘의 눈빛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이 영화는 말한다. 둘은 여성이고, 동성으로 만나서 세상에 또 이런 사랑이 있을까 하며 서로가 헤어져 있는 시간을 되짚어본다.


  서랍을 연다. 그 속에 꽃분홍색 사진첩이 있다. 이제 20년 전 그때 그 일을 떠올려본다.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필연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 사건. 이 서랍을 열었으니,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지. 우리의 꽃분홍 시절. 그러나 세밀한 조각칼로 우리를 계속 금 가게 했던 그 사람. 그 사람은 이 서랍 속에서 20년 동안 봉인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동안 한 번도 입 밖에 내뱉지 않았으니. 지수는 여전히 아름다울까? 나는 이제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데. 꽃분홍 벚꽃이 점점이 날리는 봄날을 기억해 본다.


"돌아봐."

"눈이 부셔서 못 돌겠어."

"정말 잘 어울리는데, 지금 이 원피스 색깔이 소라이지?"

"소라? 일본어잖아."

"그러니까 하늘색이란 말이야."


  지수는 원피스가 잘 어울린다. 전체적으로 마르고 긴 몸매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항상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지수는 물 오른 꽃망울처럼 향기로운 아름다움이 있다. 수수해 보이는 옷차림인데 볼수록 그녀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지수와 나 그리고 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이 딱 한 장 있다. 사실 그 사람은 지나가는 행인이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은 정말 항상 지나가는 행인처럼 지수와 나 사이를 맴맴 돌았다. 그 사람이 존재함을 알았을 때부터 지수와 나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수의 하늘색 원피스에 돈까스 소스가 튈까 봐 조마조마하는 사람은 나이다. 지수는 먹기에 다소 크게 썰어 놓은 돈까스를 한 입 한 입 먹고 있다. 나는 지수가 다 먹을 때까지 불편한 속을 참으며 스파게티를 포크로 돌돌 말아놓기만 한다. 지수는 기분이 좋은지 내가 먹는 모습이 눈에 띄지 않나 보다. 아까부터 점심 먹고 보게 될 영화 이야기에 빠져있다.


  나는 기분이 좀 가라앉는다. 지수는 여전히 그 사람 얘기는 쏙 빼놓고 있다. 분명히 그 사람 때문에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을 텐데 말이다. 웃으며 이야기하는 지수의 눈을 보면 내가 넘겨짚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저 눈빛과 목소리에 오히려 내 양심이 가책을 받는다. 그렇지만, 한 손이 이상하다 지수의 왼손 말이다. 그 손에 붕대가 감겨 있다. 이제야 알아챈 이유는 붕대 겉에 손수건으로 감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왼손이 왜 그래?"

 "그냥."

 "그냥? 붕대에 감겨 있잖아."

  지수가 한숨을 쉰다.

  나는 더 물어보지 못했다.


서랍에는 지수와 내가 주고받은 편지들도 있다.


나야. 지수. 놀랐지. 첫 편지를 쓰니까 기분이 말랑말랑하다. 우리는 고교 동창인데, 어째 대학 와서 이렇게 친해졌을까? 참 신기해 그치? 이건 편지라기보다는 쪽지다. 쪽지. 자 그럼, 또! Jisoo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을 치는 지수의 모습이 생각난다. B 플랫 메이저 곡이라서 시를 검은건반을 쳐야 하는데, 지수는 일부러 시를 제자리로 쳐서 이상야릇한 곡으로 만들고는 했다. 지수는 느린 악장을 잘 쳤다. 느린 악장의 4분 음표를 다다다다 입술로 16분 음표 리듬을 집어넣어서 느리게 쳐주었다. 느리지만 흐름이 자연스러워서 집중해서 듣게 되곤 했다. 지수는 지금 먼 이국땅에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다.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나에게 함께 가자고 했는데, 나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클라리넷을 공부하고 있었다. 지금은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이다. 나는 이제 글을 쓴다. 리뷰를 쓰기 시작해서, 혼자 소설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지수와 나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서 쓰고 있다. 이것은 나의 추측이 바탕이 된다. 왜냐하면 결국 지수와 나 그리고 그 사람을 한 번도 함께 만나게 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수의 소라색 원피스는 내 방 상자 안에 있다. 사실 그 원피스를 내가 훔쳤다. 나는 한 번도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원피스를 벗은 그때, 지수와 나는 한 여름 야외 수영장에 갔다. 톡 쏘는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야외 수영장에 풍덩 들어가서 우리는 한참을 놀았다. 나는 먼저 올라왔고, 지수의 하늘색 원피스를 내가 슬쩍 훔쳤다. 지수는 검은색 수영복에 내 가디건만 걸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지수는 울었다. 나는 지수의 원피스를 내놓지 않았다. 그것을 검정 비닐 안에 꼭꼭 숨겨 내 가방에 넣어놓고 나는 모른 체했다.


 그날 나는 지수가 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지수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지수는 그 남자를 알고 있는데 내게 계속 돌려서 얘기했다. 이것은 내 추측이다. 우리는 한 번도 그 사람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삼자대면을 해본 적이 없다. 만약 했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더 나아졌을까? 그러니까 지수와 내가 단짝으로 지내지 않고 각자 남자 친구를 한 명이 데리고 다니는 성인 대학생이 되어서 지금과는 다른 인생 방향을 모색했을까. 우린 대학생이지만 여고생 단짝처럼 지냈기 때문이다. 지수가 나의 클라리넷 반주자였고, 내가 지수의 대학 내내 짝꿍이었으며, 그녀의 운전수였다.


"여기서 내릴게. 땡큐."

"어디 가는지 끝까지 얘기 안 해 줄 거야?"

"궁금하면 너도 같이 가자니까."

"나는 레슨 있다고 했잖아. 너 일부러 나 떼어놓고 가려고 지금 가는 거구나."

지수는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헤프게 웃었다.

"다녀와서 얘기해 줄게. 걱정 마."


  지수를 그곳에 데려다주고 나서 나는 그녀가 입은 소라색 원피스를 찢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야외 수영장에서 나는 보드랍고 시원한 소재로 만들어진 그 원피스를 검정 비닐봉지에 꼭꼭 싸매서 가방 안에 숨겼다. 나는 지수가 내게 숨기는 것만큼 그녀를 혼내줄 생각이었다. 여전히 이것은 추측이지만, 나의 직감은 틀리지 않는다.


안녕. 나. 지수. 오늘 그 사람을 만났어. 말이 없고, 침착하고, 말을 꺼내면, 아주 점잖았어. 나중에 너도 함께 만나자. 그럼 또. 쪽지 보낼게. Jisoo


  내가 과거를 추측하고 그 당시를 정의 내리는 이유는 그녀가 내게 쪽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에게 명백한 증거물을 남겼다. 여기 이 쪽지에 그 사람은 분명 그 남자이다. 그 소라색 원피스를 입고 나는 빼놓고 만나러 간 사람이 바로 그 남자이다. 아무리 내게 숨기려고 해도 나는 내 직감으로 알 수 있다


  지수는 썰어 놓은 돈까스를 남김없이 다 먹었다. 나는 스파게티 면을 이리저리 헤쳐 놓기만 했을 뿐 반도 못 먹고 있었다. 지수는 붕대가 감긴 왼손으로 포크를 들더니 내 스파게티를 함께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2인분을 해치울 것처럼 먹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를 쿵 찧고 싶었다. 왜 그녀는 내게 아무 말도 안 해줄까. 나는 그녀와 그 사람이 무언가가 있어서 지금 이런 상태가 되었으리라고 짐작했다. 나는 그녀가 스파게티 마지막 면을 후루룩 입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나는 지수의 뒤통수를 때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렇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 컵을 들고 뿌리는 상상을 했다. 그렇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그런다 해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을 지수일 것이다. 그녀가 무섭다. 나는 왜 그녀의 친구일까?


  점심을 먹고 들어간 영화관에서는 칼을 들고 목숨을 부지하는 검투사들이 나오는 영화였다. 현란한 검투사 복장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에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수는 화면에 빨려 들어갈 듯이 의자 위에서 상체를 앞으로 보내고 있었다. 지수는 칼싸움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는 액션영화를 좋아했다. 나는 별로이다. 나는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영화관에서 나는 천천히 생각을 했다. 그 남자는 지수를 좋아한다. 그런데 지수는 헤프다. 마음이 헤픈 지수는 그 남자가 어떤 상태인지 그냥 넌지시 쳐다본다. 그때 그 남자 손에 쥐어진 지수의 왼손은 너무 연약해서 그 남자의 완력에 의해 시퍼렇게 멍이 든다. 그렇다 바로 그거야. 그 남자는 지수에게 어떠한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거지. 왜냐하면 나 때문에. 내가 그 남자 얘기를 내가 먼저 꺼냈거든. 지수는 나보고 그 남자를 가지라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오늘은 비가 내린다. 소나기가. 우산을 들고 첨벙첨벙 비가 고인 물을 찾아서 발을 굴렸어. 너랑 함께 하고 싶었는데... 네가 아직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 같아서. 나는 그 사람 관심 없어. 네가 가져. 그 사람은 너도 알고 있던 걸. Jisoo


  지수는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한 것 같이 내게 쪽지를 보냈지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을 한 번 보고 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인상을 가졌기 때문이고 그 사람이 지수와 한 동네에 살았다는 과거 때문에 계속 지수와 연관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그냥 그 남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껌처럼 여겼다. 나는 그녀가 그 사람을 생각하는 태도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장벽이 있음을 알았다. 지수, 그녀는 태도와 말에서 주변인으로부터 주목된다. 주목된 자신에 대해 그녀는 싱겁게 대처한다. 그냥 무심함으로 말이다. 우쭐해하거나, 우월감을 갖는 것과는 다르다. 그녀는 그냥 큰소리로 웃어젖히거나, 조용히 앉아 있는 것으로 주변인들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그 점은 나도 그녀, 지수에게 끌리는 매력 중에 하나이긴 하다. 그녀와 있으면 시간을 잊는다. 그녀가 집중하는 것에 대해 나 역시 동조하게 된다. 마치 그날 영화관에서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액션 영화를 함께 본 것처럼 말이다.


"정말 죽이지 않니? 그 검투 장면은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렇지? 나는 오늘 밤에 그 검투사를 내 꿈에 초대하겠어. 나도 검술을 배워보고 싶어."

"...  ."

"호랑이와 싸우는 장면에서 어쩜 그렇게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을까? 그게 물론 영화라고는 하지만 정말 리얼하잖아."

"...  ."

"봐봐. 너는 어떻게 봤어?"

"음. 그냥 그냥 보았어."

"사람을 죽이는 걸 밥 먹듯이 하는 것이 어떤 기분일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잖아."

"...  ."

"아. 영화 보고 나니 벌써 점심 먹은 게 다 꺼진 것 같아. 우리 파르페 먹으러 가자."

"그래 그러자."


  그 카페에서 지수의 소라색 원피스는 더욱 밝아보였다. 모든 것이 무채색인데, 그녀만 칼라인 듯이 도드라졌다. 나는 초코 파르페를 그녀는 딸기 파르페를 시켰다. 우리는 과자를 하나씩 입에 물고 앞니로 똑똑 부러뜨려 먹기 시작했다. 소라색 원피스에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서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헤픈 웃음을 지으며 손수건을 그녀의 가슴께로 가져갔다. 나는 그녀가 내게 말하기를 바랐다. 그 때라도 솔직하게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수는 생글생글 웃으며 파르페에 푹 빠져있었다.


"인상파 남자를 한 명 봤어."

"인상파? 마네, 모네, 드가...?"

"농담하지 마. 어떤 남자가 내 옆으로 스쳐 지나가다가 물건을 떨어뜨리길래 주워서 불렀지. 그 남자가 인상적이라고."

지수는 여전히 인상파 화가들 이름으로 농담 따먹기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별 물건은 아니고, 그냥 어떤 물건의 꼭지 같았는데, 떨어졌다고 했지. 그래서 주워주고는 살짝 인사를 하며 얼굴을 봤는데, 그런 무뚝뚝한 인상은 처음이었어. 그런데 잘 잊히지 않아."

"네가 좋아하는 인상이 무뚝뚝한 거였어? 몰랐다. 나는."

"나 지금 진지해. 벌써 한 달도 더 전에 그랬는데, 왜 그 남자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지 모르겠어."

그제야 지수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는 서랍 속에 있는 지수가 보낸 쪽지들과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 몇 장만이 남아있는 지금, 왜 나는 여전히 그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녀 지수에게도, 또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 둘을 똑같이 좋아했는데, 나는 그 두 사람에게 똑같이 버림받은 기분이다. 나도 한 때는 그 둘을 버리고 싶었다. 나의 존재감이 없는 듯한 기분에 시달리기 시작하자 모든 것에 나태해졌다. 지수는 결국 전공을 찾아서 앞으로 나아갔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의 클라리넷은 20대가 분다고 할 수 없는 바람 빠진 듯이 축 쳐진 음색으로 점점 변해갔다. 레슨 선생님은 내가 부는 클라리넷을 듣고 있으면, 삶을 다 산 사람 같다며 좀 더 명쾌하고 또렷한 음색을 들려달라고 주문을 했다. 나는 리드에 집중하고, 클라리넷 몸통에 미세하게 움직이는 나의 숨결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언제나 소리는 쉰 소리였다. 나의 클라리넷이 바로 나의 마음이었다. 나는 슬픔과 무심함이라는 큰 벽 속에 갇혀서 나의 목소리를 계속 먹어대는 그 공간에서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관악기를 부는 데에 침이 모자라는 현상이 생겼다. 다른 이들은 침이 생겨서 불편해하는 것을 나는 침이 말라서 목구멍이 아프고 입 안이 얼얼했다. 나는 클라리넷에 메마른 내 혀를 자꾸 찔러 넣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2학년 모든 동기들이 연강홀에 앉아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정기 연주회에 지원한 동기들이 모두 자리에 엄숙히 앉아서 가뜩이나 무거운 공기를 더 텁텁하게 했다. 나의 클라리넷은 사막의 뜨거운 공기라도 받은 듯이 바싹 말라있었다. 내 입 안에 침이 고이지가 않아서 리드도 악기도 건조함 그 자체였다. 지수가 나의 반주를 맡았다. 지수는 나보고 눈짓으로 응원을 했다. 협주곡을 피아노 반주로 쳐내는 첫 도입부에서 지수는 긴장감 없이 휘몰아쳤다. 나는 박자와 마디를 느끼며 천천히 리드를 입 가까이 갖다 대었다. 나의 클라리넷이 치고 올라올 부근에 다다랐을 때, 호흡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리드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첫소리는 괜찮았다. 둥글고 따뜻한 음색이 나왔다. 16분 음표가 빠른 패시지로 진행되고 있는 부분에서 나와 지수의 콤비가 완벽해야만 했다. 그때, 나의 클라리넷이 서서히 수면에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침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건조한 바람이 들어서는 클라리넷은 건강한 피아노 소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소리가 잦아드는 내 악기는 그 페시지가 다 끝나기 전에 쉭쉭 바람이 빠진 듯이 목이 쉬어버렸다. 지수가 당황하며 다시 그 페시지의 첫 소절을 반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바람을 넣을 수 없었다. 나의 입 속은 바닥이 갈라진 땅처럼 메말랐다.


  정기 연주회에 나와 지수가 나란히 연주를 할 줄 알은 동기들은 내 리허설을 모두 안타까워했다. 지수는 리스트 ‘타란텔라’를 2학년으로서는 쉽지 않은 곡이었는데,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연주를 해냈다. 그녀는 쉼표 부분에서 교수에게 지적을 많이 당했다. 너무 여유가 많다는 것이었다. 음악이 끊기는 기분이라며 단점을 들었지만, 그녀에게 그 쉼표가 에너지를 모으는 부분이었다. 지수는 박자를 자기 느낌으로 고집하고 쳐냈다. 그래서 늘어지는 부분들이 간혹 있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 이 곡을 매력 있게 어필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매우 빠르고 테크니컬 한 곡이었는데, 지수는 노래 부르기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박자에 맞게 쳐낸 것이다. 그녀는 이 곡을 쳐내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서 조깅을 했다고 나에게 넌지시 알려주었다. 지수는 자신이 ‘타란텔라’ 빠르기에 익숙해지려면 온몸이 함께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완벽한 연주를 바란 사람에게는 단점이 많았을지 모르지만, 동기들에게는 지수가 앞날이 창창한 피아니스트로 보였다. 그녀가 선택한 곡이 그 해 정기연주회에서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로 꼽혔다. 지수는 그때부터 유학을 꿈꾸었을까.


"너는 유학을 갈 것 같아. 나는 아닌 것 같고."

지수는 딸기 파르페를 떠먹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기 연주회가 인생에서 뭐라고. 평소에 너 연주 좋았어. 빠른 페시지는 그 곡에서 일부분이잖아. 너 반주하며 너의 전체 연주를 들어보면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고."

지수는 나를 치켜세워주었다. 나는 지수의 소라색 원피스에 눈을 고정하고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못하나 봐. 그래서 침이 자꾸 마르는 것 같아."

"나도 긴장을 하지. 그렇지만 그 긴장감이 에너지가 되는 순간을 찾아내야 해."

지수의 눈빛이 진지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어쩌면 그녀는 내게 그 남자 얘기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고 느껴졌다.

리허설에서 내 연주는 완전히 드러났어. 교수들이 결국 나를 선택하지 않았잖아.

지수는 파르페에 꽂힌 스푼을 헛손질하며 말했다.

"교수들이 너의 음악을 얼마나 알겠니? 너 음악은 너가 아는 거야."

지수의 말이 옳다. 나는 그 점을 그 당시에는 몰랐다. 지수는 자신에 대해 분명한 부분이 있었다.


  지수는 파르페를 싹싹 비웠다. 나는 지수에게 내 초코 파르페를 밀어주었다. 지수는 웃으며 난 초코 별로야. 그녀의 표정이 해맑아서 나도 웃었다. 우리는 친구, 콤비, 짝꿍이지. 나는 속으로 다시 한번 그녀와 나를 정의 내렸다. 그녀와 나 사이에 그 사람이 비집고 들어오는 틈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찰나, 지수가 말을 꺼냈다.


"우리가 세 명이 되면 어떨까?"

"세 명."

"응. 너, 나, 그리고 한 명 더."


  지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카페에서 나오며 파르페는 지수가 지불했다. 나는 머리에서 미열이 나기 시작했다. 지수를 태우고 운전을 하며, 나는 속이 불편했고, 머리가 지끈거렸고, 눈앞이 흐려졌다. 지수가 내 손을 잡으며, ‘너 왜 그래?’하는 순간에 나는 브레이크를 잡는다는 것이 액설러레이터에 헛발질을 했다. 순간 앞 차와 살짝 부딪혔다. 지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자동차 앞과 뒤가 경미한 접촉 사고가 났지만, 부딪히는 소음은 컸다. 지수는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누군가를 불러야 했다. 지수가 부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병원에 누워있다가 눈을 떴을 때, 지수가 옆에 앉아 있었다.

"괜찮아?"

병원의 찬 공기가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주위 둘러보고 여기가 병원이구나 싶었을 때, 의사가 왔다. 의사는 별 이상이 없으니 퇴원해도 좋다고 말하고 바쁘게 사라졌다. 지수가 나를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손을 잡아주었다.

"차는 어떻게 되었어?"

"보험사도 왔고, 앞 차 주인이 우리가 대학생이라고 너그럽게 봐주시더라고. 보험 회사에서 잘 처리해 준대."


지수는 자꾸 응급실 한 귀퉁이에 눈길을 주었다.

"너는 이상 없는 거야? 나만 정신을 잃었나 봐."

"나는 괜찮아. 있지 곧 네 부모님이 오신대. 나 이만 가볼게."


지수는 좀 바쁘게 재촉했다.

나는 지수 손을 꼭 잡았다.

지수는 좀 어색해하며 내 손을 당겨서 내 무릎에 올렸다.

"부모님이랑 잘 들어가."


  지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서글퍼졌다. 지수가 가버리는구나. 나만 홀로 두고. 부모님이 오셨을 때, 나는 울고 말았다. 부모님은 깜짝 놀랐냐며 어떤 남자분이 내 차를 사고 처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울음을 그치고, ‘어떤 남자?’하며 생각에 휩싸였다. 지수는 그럼, 그 남자를 부른 것인가. 나를 두고 가버린 이유는 그 남자가 가까이에 있기 때문인가. 잠시 멈춘 눈물이 더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가서 그 해, 여름 내내 나는 아팠다. 속이 불편하고, 식은땀이 자주 났고, 설사를 해댔다.


  나는 점점 더 지수에게 배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기를 바란 그녀. 나는 지수에 대한 분노만큼 내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며칠 후에 나는 지수와 야외 수영장에 갔다. 여전히 소라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지수가 어린아이처럼 야외 수영장에서 헤엄을 쳤다. 나는 물보라를 일으키는 지수를 뒤에 두고 수영장을 나와서 탈의실로 갔다. 야외 수영장 탈의실은 바구니들로 가득했다. 주황색 바구니 틈바구니에서 소라색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준비한 검은 비닐 안에 원피스를 집어넣고 내 가방에 넣었다.


  지수는 검은색 수영복을 입고 내가 빌려준 가디건을 걸치고 버스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말이 없었다. 내가 그녀보다 더 피곤했다. 지수는 울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해 보였다. 나는 그러나 마음속이 더 복잡해졌다. 지수와 나 사이에 금이 가고 있었다. 지수는 내가 원피스를 가졌다는 것을 알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남자 때문이라는 것도 알까. 지수는 그날 헤어지고 나서 연락이 없었다.


  가을학기가 시작되어 학교로 간 나는 동기들 틈에서 웃고 있는 지수를 보았다. 지수는 나를 보더니 달려왔다. 나는 내 앞에 그녀가 있는 것이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지수는 나에게 여름 방학 내내 해외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다녀오느라 너와 만날 수 없었다고 흥분해서 말했다. 동기들이 한 차례씩 지수에게 마스터 클래스는 어땠냐고 물었다. 나는 그 대화 틈바구니 속에서 숨이 막혔다. 지수는 이미 나와는 다른 세상에 있었다. 그녀는 탄탄대로로 뚫린 길을 향해 가고 있었고, 나는 사막을 향한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여름 내내 아파서 피부가 푸석했고, 머리카락은 거칠었다. 나는 10년은 더 늙었다. 지수는 내가 뒤처져있자, 내 팔짱을 끼고 강의실로 향했다. 내 팔에는 어떠한 완력도 없었다. 누군가가 지수를 불렀고, 나는 홀로 강의실 문을 넘어섰다. 홀로 앉아서, 나는 혼자가 된 나 자신을 되짚어보았다. 나, 지수, 그 남자. 나는 강의 내내 창밖만 쳐다보았다. 가을학기 내내 나는 지수를 피했다. 지수는 마스터 클래스를 다녀와서 한층 더 성장해 있었다. 교수들이 그녀를 칭찬했고, 동기들이 모두 선망했다. 나는 홀로였다.


  서랍을 열어 사진과 쪽지를 꺼내고, 소라색 원피스를 문에 건다. 사진 속에 지수는 이 원피스 차림이다. 그녀의 얼굴은 카메라 렌즈에 있지 않고,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셋이 되면 좋겠다고 한 그 말은 그때 이후로 다시는 들어볼 수 없었다. 지수는 빠르게 피아노 전공 공부에 몰입해 갔고, 나와 그 사람만이 지수 곁에서 겉돌았다. 가을학기가 끝나갈 무렵 예술 대학 근처를 서성이던 그 남자를 발견했다.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다시 봐도 인상이 깊은 얼굴이었다. 말이 없고 침착하다고 했지. 나는 천천히 그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나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지수 얘기를 꺼냈다.


"지수 불러줄까요?"

"...  ."

"지수는 언제 만났나요? 제게는 말이 없었거든요."

그는 담뱃불을 붙이더니, 머리를 긁적이고 돌아섰다.

나는 바보같이 따라갔다. 그 사람은 내가 뒤따라오는 걸 알면서 계속 걸어갔다. 대학교 후문에 다다라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흘끗 보는 눈빛이 뭔가를 부탁할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게 자신이 지수와 자주 가던 카페가 있다며 함께 가겠냐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카페는 모퉁이 2층에 있었다. 좌식 카페였고, 칸막이가 되어있어서 개인 공간이 확보되는 곳이었다. 그와 나는 한 공간에 함께 마주 보고 앉았다. 나는 그가 여전히 무뚝뚝한지 관찰했다. 그러나 무뚝뚝하기보다는 침착하다는 지수 말이 옳았다. 반듯한 이마가 보기 좋은 남자였다. 그는 차를 시키고, 나는 코코아를 시켰다. 그는 말이 없이 차를 마셨다. 지수와 있으면 말이 많아질까. 지수가 말을 많이 했을까. 나는 여전히 속이 좋지 않았다. 따뜻하고 달콤한 코코아가 속을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양 미간이 찡그려졌다.

"지수와 사귀고 있는 건가요?"

그는 나를 그제야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다소 절망적이었다. 찻잔을 들은 손이 한참 공중에 있다가 그가 입을 뗐다.

"지수라는 이름을 오늘 처음 알았어요."

나는 머그잔을 놓칠 뻔했다.

그는 지수를 사귀는 것보다 바라만 보는 것이 더 행복하다며 나에게 오늘 일은 지수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카페에서 나와서 그는 목례를 가볍게 하고는 돌아섰다. 나는 그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외쳤다. "저기요! 지수는 그냥 잊으세요." 그가 멈칫 섰다. 그리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못 들었을까 봐 다시 외쳤다. "지수는 잊으세요!" 오후 한낮에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나도 잊고, 그 사람도 지수를 잊고.


  나, 지수, 그 사람 중에 누가 가장 이기적일까. 나는 금방 답을 알았다. 지수였다. 사랑은 이기적인 사람이 이기게 되어있다. 사랑은 이기적으로 하는 것이 결국 자신의 행복을 찾는 지름길이다. 특히 이렇게 얽혀있을 때는 말이다. 아픔을 감당하는 자는 이기적이지 않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든지 자유롭다. 지수는 자유를 만끽하며 피아노에 몰두했다. 나에게는 여전히 쾌활했지만, 지수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공기는 냉랭했다. 지수는 어림없었다. 그 냉랭한 공기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에너지는 더욱 넘쳐났다. 그 사람은 그 후에도 간혹 예술 대학을 지나가고는 했다. 난 항상 그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지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처럼 비치는가 보다.


  그날, 경미한 접촉사고가 일어난 날 밤에 나는 밤새 지수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밤새도록 전화를 받지 않은 지수. 나를 살며시 밀어내는 지수의 마음이 감지되는 순간이었다. 나에게 지수는 1순위였지만, 그녀는 이제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내가 연강홀에서 지수의 피아노 소리를 넘어서지 못한 내 클라리넷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가 더 이상 짝꿍이 아니라는 것을 묵언으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소중한 것을 내가 빼앗아오고 싶었다. 내 분노는 밤새 뒤척이고, 지수에게 전화 걸고 하며 점점 더해졌다. 나는 많이 아팠지만, 지수에게 수영장에 함께 가자고 문자를 남겼다. 그 시간은 새벽 4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지수는 그 문자 답에 이렇게 응했다. ‘밤새도록 전화하고 결국 하고 싶은 말이 수영장 가자는 거야? 눈 좀 붙여.’


  한 여름 햇살은 아침부터 톡톡 살갗을 건드리며 파고드는 강렬함이 있었다. 나는 눈을 잔뜩 찡그리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내 차는 아직 카센터에 맡겨두었고, 지수와 함께 버스로 야외 수영장을 가기로 했다. 그녀는 그날 펄럭거리는 치마 너머로 길고 늘씬한 다리라인을 비추며 내게로 걸어왔다. 그 소라색 원피스를 입고, 레몬 빛깔 비닐 가방을 들고, 성큼성큼 걷는 지수가 내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너는 내 친구잖아. 내 짝꿍이잖아. 이런 내가 안 보여!’


  나는 그 큰 외침을 참느라 그녀에게 눈인사만 했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수는 그런 나를 무시하는 걸까. 내 표정은 관심 없이 한 여름 날씨 얘기만 이러쿵저러쿵하고 있다. 지수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람 같다. 나는 그녀와 있으면 그 에너지에 빨려서 내가 할 행동과 말을 망각한다. 버스는 한참을 기다려서 탈 수 있었다. 버스는 낡았고, 에어컨이 부실해서 창문을 열어야 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지수는 내 맞은편 차창을 쳐다보며 바람을 맞고 앉아서 저 멀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빈틈이 없다. 무엇이든지 깊이 빠져있는 듯 한 표정. 나는 그 표정을 훔쳐보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수영장은 이미 아이들과 가족들로 북적였다. 지수는 검은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나는 반팔 티로 내 몸을 가렸다. 우리는 물장구를 치고 튜브를 타며 더위를 물속에서 식혔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첨벙거리는 물소리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나의 몸은 그동안 아파서 힘이 없었다. 나는 튜브에 그냥 몸을 내던지고, 지수가 자맥질을 하는 모습을 넌지시 쳐다보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려고 여기를 온 것인지 잊고 있었다. 지수가 잠수를 하고 어푸 숨을 내쉬며 물 밖으로 나와서 큰 소리로 웃으며 나보고 누가 더 오래 잠수하는지 겨루자고 했다. 우리는 공기를 최대한 많이 입 속으로 빨아들이고 물속에 잠겼다. 지수는 둥글게 몸을 말아서 아기 같아 보였다. 나는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숨이 막혀오는 것에 겁을 내고 있었다. 지수는 마치 물속에서 사는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나는 숨이 막혀서 물 밖으로 나왔다. 멍했던 귀가 뻥 뚫리자, 멀리 탈의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 탈의실에서 옷을 벗던 지수가 떠올랐고, 소라색 원피스를 차곡차곡 개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소중한 것. 소라색 원피스였다.


  지수가 부드럽게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나를 툭 쳤다. 얼마나 오랫동안 탈의실을 쳐다보았는지 몰랐다.

"야. 너 무슨 생각을 그리 해?"

"아. 나 배가 좀 아프다."

"화장실 갈 배? 얼른 다녀와."


  나는 물 밖으로 나왔다. 몸이 휘청였다. 귀 속이 왕왕거렸다. 이마가 지끈거렸다. 숨이 가쁘기까지 했다. 아니 눈물이 찔끔찔끔 났다. 그렇지만 나는 그 소라색 원피스를 떠올렸다. 내 갑방 속에서 검정 비닐을 꺼냈다. 원피스는 흐느적거리는 원단으로 만든 거라 둥글게 뭉쳤다. 비닐에 원피스를 넣으며, 나를 다그쳤다. ‘이건 당연한 거야. 당연하다고.’ 빽빽이 들어찬 주황색 바구니에 지수의 하얀 속옷이 남겨졌다. 나는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지수는 여전히 물속에서 유연한 몸놀림으로 유영하고 있었다. 나는 음료를 들고 지수에게 갔다. 우리는 시원하게 마시며 잠시 숨을 돌렸다. 지수는 오늘 정말 재밌다며 좋아했다. 나도 함께 웃었다. 내 마음이 편했다.


  해가 다 떨어지고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변해서야 수영장에서 나왔다. 샤워를 하고 탈의실에 들어가서 지수가 소리를 질렀다. 지수는 아무 곳에서도 소라색을 찾을 수 없었다. 주황색 바구니는 이미 다들 텅텅 비어있었다. 나한테 물어볼 여유도 없는 지수였다. 내게 이렇게만 얘기했다. "원피스가 없어졌어." 지수는 쪼그려 앉아서 한참을 있었다. 지수의 뒷모습이 수영장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랐다. 지쳐있는 등을 내비치고 바닥에 쪼그린 둥근 지수의 몸은 딱딱한 석고상 같았다. 나는 살며시 손을 얹고 나직하게 말했다. "내 가디건 빌려줄게." 지수는 전혀 찾아볼 의향이 없었다. 아주 간단했다. 내게 보았냐고 묻지도 않았고, 관리실에 항의를 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며, 우리는 둘 다 서서 왔다. 그녀는 젖은 수영복에 가디건을 걸쳤고 앉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가는 빨갰다. 얼굴은 그러나 확연했다. 그 표정이 나는 싫어졌다. 나는 점점 불편해졌다. 그녀의 침묵과 표정이 나에게 항의를 하는 것 같았다. 나를 의심하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손잡이를 잡은 내 손에서 땀이 배었다. 나는 말도 없이 시내에 다다라서 내렸다. 지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버스가 떠나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지수와 나 사이에 갈 수 없는 거리가 내게 보였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멍하니 서서 버스를 몇 대 보냈다. 가방이 무거웠다. 걷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지수였다. 문자가 왔고, 내리는 걸 못 봤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집으로 가고 있었다. 수영장에서 잠수를 하는 기분이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물속에서 걷는 것 같았다. 지수와 나는 이제 멀리 와 버린 것 같았다. 지나가는 거리에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형편없었다. 나는 지수에게 졌다. 나는 지수에게 이제 잘못을 저질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덮어버릴 것이다. 지수는 연락이 없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름 내내 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흘렸다.


  가을학기가 끝나고 겨울에 이르러서 지수는 조기 유학을 결정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떠나는 것은 모험이었지만, 지수는 그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지수 머리카락은 길어져 있었다. 오늘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이다. 나는 가방 안에 소라색 원피스를 넣었다. 그러고 싶었다. 지수는 내가 카페에 들어서자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내가 다가가자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지수가 저렇게 터프했던가. 지수는 한 껍질 벗고 나온 것 같았다. 허물을 벗은 뱀이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지니는 것처럼.


"미국 남가주대학에 가기로 했어. 그곳 교수님과 연락을 했는데, 좋은 분 같아. 미국은 물가가 비싸서 내게는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장학금을 놓치지 말아야지."


지수는 매우 침착했다. 내가 그녀의 짝꿍이라는 생각을 했을 때처럼 들떠 있거나, 웃고 있지 않았다. 서른은 된 여성 같았다. 나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지수는 잠시 조용히 앉아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시선을 마주치기가 싫었다.


"진희야. 너도 함께 가자. 거기 가서 다시 시험을 쳐서 대학에 들어가는 거야. 내가 너 반주자잖아. 너랑 함께 가고 싶어. 정말로."


지수의 목소리는 깊은 악기 소리처럼 나를 움직이게 했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울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내 속에서 할 수 없었다. 지수는 내가 다 울고 눈물을 거둘 때까지 조용했다. 눈을 들어 지수를 바라봤다. 지수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수는 정말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함께 가자고. 나는 힘을 내서 말했다.


"싫어, 나는 더는... 너랑은 싫어."

지수는 놀라지도 않았다.

손을 모으고, 턱을 위로 쳐든 지수는 떨지도 않고 말했다.

"그래 그게 너 결정이라면."


  아침 9시 오크룸에서 만나자고 한 금발 머리 여성과 백화점 단발머리 직원은 다시 만난다. 그 장면을 보고 있다. 마지막 씬이다. 둘은 말이 없지만, 서로 눈빛을 보며 연결된다. 아름답다. 둘은 정말로 사랑하는구나. 나는 그 금발 여성을 보며, 지수가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말을 떠올린다.


  "너한테 그 남자를 소개해주고 싶었어. 내가 보낸 쪽지를 네가 이해했다면, 너와 그 사람,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만날 생각이었어. 그 소라색 원피스는 그 사람이 내게 준 선물이었고, 그 원피스를 입고 나가야 그 사람이 나를 사귀겠다고 했거든. 그런데 그 원피스를 잃어버렸고, 나는 그때 결정했어. 내 결정을 두려움에 두지 않겠다고. 내게 분명한 것은 피아노였어. 그 피아노에서 너는 항상 내 곁에 있어줬지. 너랑 함께 나가고 싶었어. 우리는 콤비잖아. 우리가 셋이었으면 어땠을까? 아마 내 인생에 마지막까지 의문일 것 같다."


  검은색 옷을 입은 지수를 남겨두고, 나는 카페 밖으로 먼저 나왔다. 겨울이 다가오는 잿빛 하늘에서 가느다랗게 눈이 내려온다. 옷깃을 여미고, 나는 소라색 원피스를 만졌다. 나는 지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수는 알 것이다. 우리는 친구였고, 콤비였고, 그래서 그 사람이 우리 사이에 금이 가게 했다는 것을. 소라색 원피스는 우리에게 영원히 수수께끼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서랍을 닫는다. 서랍 속에 있던 사진과 소라색 원피스를 들고서는 마당으로 나왔다. 나는 성냥을 그어서 그것들을 불 속에 넣는다. 지수도 나도 너무 오랫동안 그 남자에게 신경을 써왔다. 며칠 후면 지수는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을 한다. 그녀는 홀로이고, 나도 아직 홀로이다. 우리가 얼마나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지 솔직히 실감이 안 난다. 그녀를 만나면 이제는 똑바로 눈을 쳐다보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돌아오길 기다렸다고." 우리는 아마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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