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태어나서 50년을 넘게 살았더니 의미가 없었다. 결혼을 했지만 남편은 밥만 축 냈고, 아이들은 머리가 자라나자 다들 밖으로 나가버렸다. 여자는 55번째 생일이 지나고 급성 백혈병으로 죽었다. 여자는 참 좋다고 생각했다. 다시 태어나면 여자로 태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남편 손을 꼭 잡고 밥 잘 챙겨 먹으라는 말만 하고는 눈을 감았다.
어떤 방 안에 여자는 14살인 모습으로 있다. 방 안은 옅은 물색빛이 어디선가 비치고 있었고 여자는 방 안에 둥둥 떠다녔다. 얼마나 오랫동안 마치 양수 속 태아처럼 있었는지 모른다. 물빛이 여자의 모습을 비추어서 벽에 그림자가 그려졌다. 여자는 여전히 기억을 갖고 있었다. 딱 두 가지 기억이었는데, 14살에 학교를 빼먹고 들판에 가서 보았던 마가렛꽃이 그것이고, 마지막은 남편의 손을 잡고 중얼거리던 55살의 자신이었다.
여자는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는 아니길 바랐다. 자신이 여자로 살아보니, 남자보다 밑졌다. 여자는 막연히 남자로 태어나길 바랐다. 다른 동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여자는 어느 순간 방문이 열리며 세찬 물결에 휩쓸리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어떤 몸을 지녔는지 확인도 하기 전에 물빛이 바뀌더니 환한 불빛 아래 다시 태어났다.
여자는 이제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자의 몸 안에 기억이 남아있었다. 꽃과 손이 그 기억이었다. 남자가 된 여자는 꽃을 좋아했고, 사람을 만나면 꼭 악수를 하는 남성이 되었다. 남성은 대학생이 되어서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여자친구는 남자가 된 여자를 좋아했다. 남자가 된 여자는 수다를 잘 떨어서 여자친구는 자신보다 나이가 좀 더 있는 그 남자에게 “근데, 언니!”하고 말문을 여는 버릇이 생겼다. 남자는 그래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여자친구가 자신의 동생 같았다.
남자가 된 여자는 꽃을 좋아해서 여자친구에게 종종 꽃을 그림으로 그려서 주고는 했다. 남자가 된 여자는 꽃을 세밀하게 그리기보다는 심플하게 그려서 꽃형상과 색깔이 눈에 바로 들어오게 했다. 남자가 된 여자는 물론 자신이 남자이고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친구를 보호해줘야 해라고 마음속에 외치고는 했는데, 이상하게 여자친구는 남자가 된 여자에게 남자로서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정말 동생 같은 여자친구는 남자가 된 여자를 언니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기를 3개월이 지날 무렵 여자친구에게 다른 남자 친구가 생겼다. 남자가 된 여자는 여자친구가 조심스럽게 그 남자를 소개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내지 않고 그 남자와 조용히 악수를 했다. 두 사람은 악수를 하는 순간...
남자가 된 여자는 다른 친구들이 그의 여자친구가 너를 두고 다른 사람을 사귄다고 욕 할 때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악수를 했던 그 남자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친구가 자신을 떠나도 그 남자와 알고 지내고 싶었다. 남자가 된 여자는 여전히 수다를 잘 떨었고, 여자친구는 여전히 “근데 언니." 라고 종종 말을 꺼냈고 두 사람 옆에 새로 온 남자가 앉아서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고는 했다.
“야, 경현 너는 내가 더 좋아? 기현이가 더 좋아?” 여자친구는 '야'라고 크게 부르고는 진지하게 물었다. 남자가 된 여자 이름이 경현이었다. 경현은 손을 들더니 여자친구와 악수를 하자고 내밀었다. 여자친구는 이마에 힘을 주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자친구는 그러더니 '씨팔'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친구가 떠난 후, 곧 기현이가 왔다. 기현이는 경현이를 보고 씩 웃었다. 경현은 그 모습을 헤어지고 나서 계속 되감기 해서 보았다. 여자친구의 빈자리는 애초에 없었다. 많은 여자들이 캠퍼스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들이 모두 자신에게 남매 같았다.
기현이가 경현의 뒤에서 어깨를 탁 쳤다. 둘은 잠시 고릴라처럼 엉겨 붙었고 지나가던 다른 청춘남녀가 ”쟤네 왜 저런다냐? “하고는 지나쳐갔다.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금 거리를 두고 걷기 시작했다. 캠퍼스에 있는 몇 그루의 키 크고 오래된 나무 그늘을 지나쳤다. 두 사람의 걸음, 나무 그늘, 햇살과 구름, 많은 청년들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고, 그 밑에 차분하지만 추억을 일으키는 멜로디가 트럼펫으로 연주된다면 썩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영화 포스터와 비슷했다. 물론 둘은 형제도 아니고, 서양인도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다.
기현과 경현은 그때부터 항상 함께 있었다. 동기들이 기현이 어디 있나 물어볼 때 경현에게 물었고, 동기들이 기현에게 부탁할 일을 경현을 통해 했다. 경현이가 꽃과 손을 좋아할 때, 기현이는 노래를 좋아했다. 두 사람은 이어폰을 끼고 캠퍼스 정원에 앉았다. 두 사람이 말이 없을 때는 항상 그 트럼펫 연주가 들리는 것 같았다. 경현은 S사에서 나온 블랙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베이스 소리가 잘 들리는 이어폰으로 귀에 꽂는 부위가 사운드가 탄력 있게 전송될 수 있게 공간이 있는 디자인이었다. 기현은 화이트 블루투스 이어폰이었는데, 사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기현은 큰 소리를 좋아하지 않아서, 특히 피부에 바로 닿는 지점에서 소리가 나는 것은 불쾌감을 주었기에 그저 형식적으로 꽂고 있을 뿐이었다. 기현이는 집에 있는 좋은 오디오를 통해 공간을 확보한 곳에서 음악 듣는 것을 더 좋아했다. 둘은 이야기를 그다지 나누는 것도 아니지만 서로가 옆에 있는 것이 어떤 기운을 형성해서 체온을 나누는 것처럼 가까이 있는 것을 좋아했다. 기현인지, 경현인지 알 수 없지만 둘은 체취를 느꼈다. 게다가 요즘 같은 초여름에는 그늘진 벤치에 앉아있으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줘서 서로는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동기는 두 사람이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왠지 둘은 형제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외모를 깔끔하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두 사람을 한 사람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 동기는 다른 친구에게 말했다. "걔네 현자 돌림인 거 보면 정말 형제가 아닐까?"
대학 캠퍼스에서 영어회화를 담당한 외국인 교수는 두 사람을 부를 때, '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외국인은 정말로 둘이 쌍둥이라고 생각했다. 피부톤이 차이가 나도 검정 머리카락과 동양인 특유의 무심한 표정은 외국인 교수에게 좀처럼 구분하게 하지 못했다. 강의 시간에 '현'이라고 부르면 함께 수업을 듣던 경현과 기현은 동시에 외국인 교수를 쳐다보았고, 교수는 두 사람 중 누구든지 먼저 대답하면 거리낌 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둘은 함께 있으면 그림이 썩 괜찮았다. 경현이는 피부가 까무잡잡했고, 기현이는 피부가 뽀얬다. 경현이는 눈이 옆으로 길었고, 기현이는 눈동자가 크고 뚜렷한 눈매로 생겼다. 둘 다 어려서 아직 손이 섬섬옥수였다. 둘은 아직 군대에 다녀오지 않았다. 남자의 손도 20대에는 여자 손 못지않게 곱다. 뼈마디에 굴곡이 없고, 푸른 핏줄도 숨겨져 있다. 게다가 고된 일도 하지 않아서 피부결이 부드럽고 손톱도 여리다.
적절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과거에 태어났다면 경현은 무과에 들어가면 좋을 타입이고 기현은 문과에 들어가면 좋을 타입이다. 경현은 날렵해 보였고, 기현은 점잖아 보였다. 경현이 수다를 떨면 날렵한 이미지와 기운이 깨지는 것 같았고, 기현이 씩 웃으면 혹시 비웃는 건 아닐까 싶게 긴장을 시켰다. 그래서 둘이 함께하면 묘하게 균형이 잡혔다. 누군가가 둘 사이에 들어오면 날렵한 경현은 수다를 떨었고, 점잖은 기현은 경청했다. 누군가는 언제나 바뀌었지만, 두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
기현이 경현을 벤치에 앉히고 철봉을 했다. 오래 매달리기를 하다가 턱걸이를 시작했고 열 번쯤 한 다음에 철봉 매달리기를 하며 몸을 앞뒤로 그네 뛰듯이 움직였다. 철봉을 맨손바닥으로 하기에는 피부가 버티지 못했다. 기현은 손마디 안쪽이 벗겨지며 위로 높이 뛰다가 몸을 일자로 편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긴 몸이 운동장 바닥에 떨어졌고 순간 경현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뛰어갔다. 기현은 눈을 감고 있었고 벗겨진 손가락에서 피가 맺혔다. 사위는 조용했고, 두 사람도 조용했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햇살이 강렬했지만 둘은 그 뜨거움에 굴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침착한 호흡으로 지금 이 순간을 지키고 있었다. 눈을 뜨지 않은 기현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죽은 척했다. 경현은 기현을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숨소리마저 죽어 있었다.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고 한낮 햇살은 뜨겁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피가 흐르다가 멈추는 시간까지 꽤 오랫동안 죽은 척을 하던 기현은 경현을 불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일어났다. 수돗가로 가서 굳어서 검게 변한 핏물을 씻었다. 바람이 야외 수돗가로 불어왔다 시원한 물줄기가 수도꼭지에서 흘러내리고 둘은 수돗물을 받아 마시고 목을 축였다. 그날 오후의 일은 나중에 서로가 한 번도 이야기 나누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날의 햇살이 뜨거웠던 것은 똑같이 기억하고 있다.
"오빠 뭐 해?"
경현에게는 아직 초등학생인 여동생이 있다. 여동생은 대학생인 오빠를 잘 골려먹는다. 오늘도 오빠는 저녁을 먹고 멍청한 표정으로 창가에 있는 1인 소파에 기대어 있다. 여동생 은지는 오빠 경현이 나이만 먹었지 자기보다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잘 안다. 설마 초등학생이 더 잘 알까. 하지만 정말 그렇다. 경현은 실질적인 것을 알지만, 은지는 형이상학적인 것을 느낌으로 간파한다. 은지는 오빠가 여자친구와 은지를 데리고 아이스크림 카페에 가서 얘기를 할 때 여자친구가 오빠를 그냥 거쳐가는 한 사람으로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여자친구는 수줍음이나 짜증이나 거리감도 없이 오빠 경현이를 대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저런 멍청이'하고 생각했다. 은지는 이미 유치원 때부터 오빠 경현을 간파했다. 경현은 그런 은지의 속내를 전혀 알턱이 없다. 오늘도 졸린 표정으로 은지를 쳐다본다. "오빠, 내 친구 지은이가 아이스크림 먹고 싶대, 언제 좀 사주라." 은지는 지은이가 자기 오빠를 아이돌만큼 좋아한다는 걸 안다. 세 사람이 아이스크림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다 보면 오빠도 좀 정신을 차릴지도 모른다. 은지도 역시 어린이이기는 하다. 도대체 어린이 둘이 성인이 된 대학생 기분을 어떻게 알까.
셋은 아이스크림이 서른한 가지 있는 카페에 갔다. 지은은 마치 처음 이 카페에 왔다는 듯이 우와를 연발한다. "은지야 나 정말 오랜만에 왔다. 내가 나중에 너 도넛 사줄게." 은지와 지은은 엄마는 외계인과 체리쥬빌레를 골랐고, 경현은 초코 바나나 숲을 골랐다. 지은이가 재미없는 얘기를 할 동안 은지는 오빠의 얼굴을 자꾸 살폈다. 오빠는 여전히 풀린 눈에 다 먹은 아이스크림 통 바닥을 스푼으로 긁고 있었다. 은지는 "오빠, 난이 언니는 왜 요새 안 만나?" 다 알면서 은지는 물었다. 지은이가 눈을 크게 뜨고 친구 은지와 경현 오빠를 번갈아 봤다. 경현은 예전 여자친구 이름을 듣고는 깜짝 놀랐지만 다시 굼벵이처럼 몸을 움츠러 들였다. 은지는 난이 언니가 자기 피자 사주기로 했다고 말하며 오빠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이상하다. 오빠는 대체 왜 저렇게 권태에 찌들었지. 난이 언니가 그 정도 인간은 아니었는데...' 동생 은지는 도대체 누가 오빠를 저렇게 만들었나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지은이를 이용해야겠다. 대학교에 놀러 가자고 꼬셔야겠다. 은지는 지은이가 경현 오빠라면 얼마든지 갈 거라는 것을 알았지만, 조금 힘든 결정이긴 했다. 대학생들이 활보하는 캠퍼스에서 초등학생 두 명이라니.
은지는 일을 저질렀다. 5교시를 한 어느 날, 영어 학원을 빼먹고 오빠가 있는 대학교로 갔다. 지하철을 타며 긴장을 해서 손에 땀이 차올랐다. 함께 가자고 한 지은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은지는 오늘 생리가 터졌다. '이런 날 오빠가 다니는 대학을 가는 것은 좀 모험이긴 하지만, 거기도 여자 화장실이 있고 지금은 21세기니까 괜찮을 거야'라고 하며 마음을 놓았다. 작은 빽에 패드를 넉넉히 넣어갔다. 하지만 막상 20대 젊은 오빠, 언니들이 붐비는 대학가에 도착하자 주눅이 들었다. 자신이 덜 자랐다는 것이 점점 확연해졌고, 그러자 자신감이 줄어들었다. 언니들은 자신보다 키가 크고, 그다지 그 부위를 부각한 것 같지도 않은데 가슴과 엉덩이가 매력 있어 보였고, 은지는 자신의 몸에 실망하게 되었다. 돌아갈까 했을 때, 이미 대학 정문을 찾았고, 온 김에 오빠 얼굴을 보고 가야지 했다. 그때, "어머 얘가 누구야!"라고 난이 언니가 친구 두 명과 함께 은지 앞에 섰다. 난이 언니는 그다지 반가운 눈빛은 아니었다. 은지는 그동안 자신이 어린이라는 생각을 그다지 안 하고 살았는데, 난이 언니와 함께 있는 다른 두 명의 언니들, 즉 세 명의 대학생 앞에 있으니 자신은 초등학생이 맞는구나 싶었다.
난이 언니는 친구들과 별로 말도 없이 은지를 지나쳤다. 은지는 난이 언니 품에 와락 안길만한 아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성인 여자 세 명, 젊은 여자 세 명이 뿜어내는 기운은 범접하기 힘들었다. 친구들 다섯 명은 있어야 맞먹을 것 같은 기운이었다. 지은은 대학 정문을 넘어서며 기운이 쭈욱 빠졌다. 많은 대학생이 길을 따라 정문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은은 그들이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데 자꾸 쭈뼛거렸다.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고 무시하고 지나가는 걸까 싶게 너무 무관심했다. 한참 길을 걷는데, 오빠 경현을 어디서 만날 수 있나 싶었다. 은지의 둥근 머릿속이 과부하가 걸려서 계속 번개가 치는 것처럼 정신이 쏙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오빠 경현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얼굴이 우윳빛인 대학생 남성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은지는 마치 그 사람이 자신을 알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빤히 쳐다보았고, 은지는 이상하게 머릿속 과부하가 빵 터지는 기분이었다. “저기요, 아저씨 저는 오빠를 찾는데...”라고 말을 걸자, 그 남학생은 걷다가 멈췄다. 지은은 멈춘 사람이 큰 조각상 같다고 생각했다. 은지 눈 속에 조각상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지가 그 조각상을 위에서 아래까지 감상하고 있을 때 경현이 나타났다. 은지는 누군가 그 조각상 어깨를 붙잡는 것을 보면서도 그 누군가가 자신의 오빠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한참 걸렸다.
경현은 은지가 자신을 왜 찾아왔는지 물어봤다. 은지가 눈길을 자신에게 주면서도 아무 말을 못 하는 것을 보며 잠시 여동생이 어른이 된 건가 싶게 나이가 들어 보였다. '쟤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가 있나?' 세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경현이는 기현이에게 자기 동생 은지라고 하자 너랑 하나도 안 닮았네라고 했고, 은지는 맞아요, 오빠랑 저는 붕어빵이에요라고 했는데, 어이가 없는 건 경현이었다. 은지는 밍기적거리며 경현에게 별 말을 못 하고는 얼른 지은이 핑계를 댔다. 지은이가 대학 구경하고 싶다고 했는데, 지은은 약속을 못 지켰고, 자기는 지금 지은이 기다리다가 캠퍼스를 걷게 되었다고 했다. 은지는 순간 자신도 이 두 사람처럼 키가 크고 남성이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다면 하나도 안 부끄럽고, 아주 당당하게 발길질을 해볼 수 있겠다고 상상했다. 갑자기 은지는 그 상상에 웃음을 터뜨렸다. 은지는 웃음소리가 크다 못해서 껄껄거렸다. 이런 이상한 애가 자기 동생이라니 경현은 깜짝 놀랐다. 그렇지만 곧 웃음소리는 전염되어서 기현이를 웃기기 시작했고, 두 사람이 마구 웃자 경현이는 어쩔 줄 몰라했다. 은지는 실컷 웃으며 난이언니와 다른 자유로움이 그 둥근 머릿속에서 번쩍했다. 남이언니랑 있으면 여동생으로서 예의도 지키고 애교도 피워야 하는데, 뭐지 이건, 이 두 남자 대학생 앞에서라면 왠지 씩씩해지고 거침없어질 것도 같았다. 그게 대학생이라는 걸까. 짧은 순간이지만 은지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 젊은 청년이라는 점에 동경하는 마음까지 솟아올랐다. 대체 무엇이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는 걸까. 은지는 생리를 하는 자신의 몸과 앞에 서 있는 두 젊은 남성의 몸을 보며 '게임에 졌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뭐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태어날 때부터 게임 끝이잖아.’ 은지는 순간 눈물이 쏙 빠질 것처럼 이번에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나이가 뭐람. 복잡하게 생각하는 은지는 좀 전까지 부끄러웠던 마음이 열렬한 동경으로 바뀌는 것을 생각하며 울고 싶어졌다. 정말 얼굴이 붉어지면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완전히 혼자 이곳에 떨어진 것 같았다. 아마 그러고는 은지는 휙 뒤돌아서서 뛰었던 것 같다. 오빠가 뒤에서 불렀지만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은지는 그날 저녁에 자기 방 안에서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잘랐다. 싹둑싹둑 자르며 머리카락 길이가 서로 맞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통보이가 된다면 바로 원하던 바였다. 아마 내일 학교를 간다면 친구들이 모두 물어보고 구경을 할 것이다. 은지는 내일 입고 갈 옷을 가장 보이쉬하게 고르기로 했다. 갖고 있는 옷 중에 네이비 색깔의 남방과 통이 큰 청바지가 있다. 그걸 침대 위에 올려놓고 어울리는지 가늠해 보았다. 가방도 낡은 검은색 백팩을 메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현관문에서 소리가 들렸다. 오빠가 들어왔고, 엄마가 저녁 먹어라고 소리쳤다. 은지는 문을 열고 나갔다. 손잡이를 잡을 때 좀 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많이 먹어.”
아빠가 은지에게 말했다. 오빠는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는 둥 마는 둥 하며 은지를 자꾸 곁눈질했다. 엄마는 끙 소리를 내며 은지에게 국을 너무 많이 떠줬다. 경현은 은지를 곁눈질했지만 동생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정말 소년이 다 되어있었다. 얘가 아까 그렇게 웃어젖히던 내 동생이라니 솔직히 좀 자랑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내일 학교에 가면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자 좀 걱정이 되었다.
“저 태권도 배울까 봐요.”
엄마가 끙 소리를 한 번 더 냈고, 아빠는 그래 그래하며 은지가 무슨 말을 해도 손뼉 치며 동의할 사람처럼 말했다.
경현은 무엇이 동생을 바꾼 건가 생각하며 숟가락으로 국을 뜨다가 흘렸다.
방 안에 들어온 경현은 기현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경현과 은지, 엄마와 아빠는 모두 잠들기 힘들었다. 무언가가 집 안을 휘저어서 여름밤의 설렘과 열기가 더해졌다. 다들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고, 아침 해가 떠올랐을 때 벌떡 일어난 사람은 은지였다. 은지는 어제 골라놓은 옷을 입고 식탁에 앉았다. 경현은 늦잠을 잤고, 엄마와 아빠가 일어나서 토스트, 잼, 우유, 그리고 방울토마토로 간단하게 식사를 준비하며 은지가 훌쩍 커버린 것 같다고 둘은 소곤거렸다. 은지는 토스트를 씹고, 우유를 마시며 자신이 오빠만큼 키가 큰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은지는 낡은 검정 백팩을 메고는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크게 소리치고 나갔다. 엄마와 아빠는 은지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오든지 이 날을 축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은지가 생각보다 행동으로 먼저 했다는 게 마음에 들었고, 아빠는 은지가 원래 오빠 경현보다 생각이 많은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기까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생각과 질문은 오히려 그 사람을 누구인지 알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경현이 일어났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경현은 1인 소파에 앉아서 기현을 떠올렸고, 또 멍하니 생각에 잠겼고, 은지를 떠올리며 무엇이 변화를 주었는지 차근히 생각해 보았다. 역시 이건 혼자만의 생각으로 결론 내릴 게 못된다는 걸 알고 기현에게 어딨냐고 문자를 보냈다. 기현은 집이며 곧 나갈 생각이라고 답을 보냈다. 둘은 미술관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기현은 동생 방에 들어가 보았다. 동생은 머리카락을 모아서 종이 위에 모아 놓았고, 침대는 정돈해 놓았다. 오늘 어떤 옷을 입고 갔을지 보지 못했기에 동생의 짧은 머리카락이 봐줄 만할지 확신이 안 섰다. 하지만 동생 책상 위에 스파이더맨 스티커가 붙어있는 걸 보고 고개를 기울이며 내가 모르는 동생의 모습이 무얼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면 동생은 SF영화나 액션 영화가 개봉하면 자신을 조르거나 부모님을 졸라서 영화관에서 보고 싶어 했다. 스파이더맨이 그중 하나이다. 동생이 보고 싶다고 해서 두 번을 상영관에서 본 터였다.
경현은 기현이 멀리서 걸어오는 걸 보았다. 미술관은 어슬렁거리기에 좋았다. 미술관 내부인 든 지 외부이든지 둘은 별 말을 안 하고 작품을 보거나 벤치에 앉아서 하품을 하거나 음료를 마시며 바람을 쐬기도 했다. 오늘은 그런데 둘 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동생 일도 그렇고, 기현이 곧 군에 입대를 하게 되어서도 그렇다. 경현은 기현이 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러니까 기현은 재수생으로 같은 학번이었다. 경현이 기현에게 오늘 동생이 어떤 모습으로 학교에 가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머리카락. 그 중요한 긴 머리카락을 스스로 컷으로 만들어서 갔다고 하자 기현은 흥미를 보였다. 경현은 동생이 원래 자기보다 똑똑하고 자신감이 있기는 했지만 충동적으로 행동한 적은 없었고 어제 너와 동생이 캠퍼스에서 만난 것이 어떤 작용을 한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는 투였다. 기현은 그 말을 듣자 경현을 주시했다. 경현은 느슨한 말투로 했지만 어째 중요한 감정은 쏙 빼고 말하는 걸로 기현은 보았다.
“그 말이 정말이라면 너 동생은 지금 변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1] 변태 중이라고.”
기현의 말에 경현은 가만히 있었다. 기현은 그 말을 내뱉고 경현을 째려보았다. 경현은 그럴 때 느슨한 얼굴이라서 기현은 더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너도 뭔가를 알 텐데. 그렇게 변하는 건 너 동생만이 아니라는 걸.” 기현은 손가락 마디를 눌러서 딱 소리 내며 경현이 합당하게 말하기를 기대했다. “그럼 내 안에 여자 있다 뭐 그런 걸 말하는 거니?” “그래 맞아. “ 경현은 느슨한 표정에서 풀려서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름다움이란 그런 거 아니겠어?” 경현은 그 말을 듣자 은지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 애는 이런 말을 종종 했다. ‘오빠 멋진 여자랑 근사한 남자랑 둘이 만나면 아름답겠지? 아니면 근사한 여자랑 아름다운 남자가 만나면 더 멋질까?’ 동생의 표현은 가끔 엉뚱하면서도 독창적이기도 했지만, 경현은 동생이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서 일거라고 여길 뿐이었다. 기현은 그런 동생의 말처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경현은 기현이 곧 군대에 간다면 자신은 어떻게 지내야 하나 막막했다. 두 사람은 나신의 그림 앞에 섰다. 그 시대 미술가가 그린 아름답고 풍만한 몸매를 그려놓은 회화였다. 둘은 그 앞에 서서 똑같은 생각을 했다. 은지는 저런 여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또한 둘은 저런 여성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은지와 경현과 기현은 셋 다 [2] 변이 중인 걸까. 아니면 세상의 절반은 누구나 그런 과정을 거쳐가는 것일 뿐일까. 왜 어떤 가수의 목소리는 남성인데 아름답고, 여성인데 힘과 매력이 있을까. 그림을 보며 이미지로 표현된 그 여성의 몸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완벽한 몸의 비례와 모델의 포즈, 만지면 부드럽게 손 끝에 닿을 것 같이 색칠한 피부. 두 사람은 말은 없었지만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같은 생각에 잠겼다. 그건 서로의 성향에 대한 것이었다. 둘은 서로를 알았다.
경현은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강변을 걸었다. 다리에 차례대로 서 있는 가로등을 보며 걸었다. 기현은 자신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기대하는 것 같았지만, 경현은 일상 수다는 잘 떨어도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못했다. 기현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처럼 물어봤다. 그 책은 경현이 중학교 때에 서점에 가서 산 책이다. 경현은 수줍어하기도 했고, 과묵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같은 반 아이들은 경현이 책상 앞에 조용히 앉아있으면 엉겨 붙어서 장난을 걸었지만 경현은 그럴 때마다 몸이 움츠러들었다. 잔뜩 긴장해서 정신이 나가 보이기도 했다. 경현이 좋아한 수업은 한문 수업이었다. 한문을 한문 공책에 쓰는 시간이 좋았다. 그리고 한문 선생님의 목소리가 좋았다. 그 시간이 되면 경현은 자신이 어른이 되었을 때 모습이 기대되었다. 어른이 되면 꼭 멋진 목소리의 친구를 두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생각한 어느 날 서점에 가서 고른 책이 ‘데미안’이다.
경현은 데미안이 영화 오멘에 나온 그 어린 악마의 이름과 같다는 걸 알았다. 이름이 낯설지 않아서 책을 골랐는데 아무 페이지나 펼쳤을 때,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속삭이는 장면이 나와있었다. 속삭이는 건 경현이 상상한 것이지만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건물의 외벽에 있는 새의 형상을 닮은 듯한 돌에 대해 물어보고 있었다. 두 소년은 세상에 돋아있는 것들을 감지하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경현은 자신에게도 그런 것이 있으리라고 믿었다. 데미안을 읽으며 에바 부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에바 부인은 마치 성이 존재하지 않는 대천사쯤 되는 것 같았다. 남성도 여성도 모두 갖춘, 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성에도 국한되지 않는 존재. 그리고 다음 날 경현은 학교를 오며 남녀 공학인 이 학교에서 많은 여학생들이 하는 거침없는 말과 행동에서 에바부인을 보았고, 자신처럼 조용하게 걸으며 깔끔하게 교복과 가방을 갖춘 남학생들에게도 에바부인을 보았다.
하지만 은지는 에바 부인과는 다르다. 아마 에바는 모성을 갖춘 존재이지만, 은지는 그보다 더 훨훨 날아다닐 듯한 소년, 소녀이다. 그러자 그는 헤르메스가 떠오랐고, 큐피드가 떠올랐다. 헤르메스 상도 큐피드 상도 남성성으로 묘사하지만 사실 이 두 신은 변화해 가는 존재로서의 신이다. 은지가 헤르메스처럼 날개 달린 모자와 샌들을 신고 지팡이를 들으면 전혀 모자람이 없었고, 큐피드의 화살을 갖고 포즈를 취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경계에 있는 존재들. 은지는 그 경계에서 더 확실하게 자신의 의지를 불어넣고 있었고, 경현은 조용히 지나온 지금에서야 그 경계에서 다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기현이가 말한 아름다움에서도, 또 오늘 본 회화에서도 아름다움이란 ‘The beauty is the eyes of the beholder’였다. 각자의 입맛에 맞는 아름다움, 그것의 매력은 다 달라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는 비교가 없어지고, 순위도 세우지 않게 될 것이다. 기현은 은지와 같은 순간이 있었던 걸까. 경현은 기현이 씩 웃는 모습을 떠올렸다.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그 표정은 보기 드문 아름다움이라고 경현은 처음부터 생각했다.
학교에 갔을 때, 은지는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지냈다. 쉬는 시간에도 거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 친구들이 돌아다니는 걸 그냥 지켜보았다. 친구들은 은지를 없는 애처럼 대했다. 마치 전학 온 학생이 아직 담임 선생님의 소개를 안 받은 것처럼 무시했다. 머뭇거리며 다가온 친구들도 잠깐 망설이더니 누구인지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지나쳤다. 아이다운 기운이 사라진 은지였다. 일부러 다듬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같은 반인데 키가 조금 작은 남자아이들은 은지를 잘생긴 소년으로 보았다. 담임 선생님은 눈을 뜨고 은지 자리에는 은지가 앉은 것이 맞나 하고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은지와 눈이 마주치자 담임은 은지가 원래 저런 애였지하고 과거의 은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점심시간에는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려고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였다. 은지는 식판에 음식을 담고 구석으로 갔다. 은지는 마음이 놓였다. 친구들 한 명 한 명이 물어보고 알아보는 것보다 조금 무시당하는 지금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은지가 적응하기에 더 적당한 온도였다. 은지는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서 떠들고 장난을 쳤던 자신을 되돌아보았고 순간 홀로 된 지금 높은 곳에서 시야를 확보하고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은지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책 속에는 메모지가 있었다. 누가 은지에게 말을 걸려고 했을까. 은지는 접힌 메모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읽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고 은지는 넓은 운동장을 걸어서 나가며 어제 대학교에 들어섰던 것처럼 이곳에 불시착한 기분이 들었고, 동시에 이번 불시착은 스스로 선택했고 또 스스로 알아갈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무슨 말을 했더라. 오늘 무슨 얘기를 들었더라. 아무것도 없었다. 완전히 새롭게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학교에 자신을 맞추지 않을 것이다. 고요한 [3] 변신이다.
은지는 학교에서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메모지를 꺼냈다. 집으로 돌아오면 보기로 했던 메모지였다. 메모지는 연보랏빛이고 코 가까이에서 향기도 났다. 메모지를 펼치자 거기에는 별이 그려져 있고,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오썸! Awesome!
From. 지은
은지는 오늘 한 번도 지은을 보지 못했는데, 얜 대체 무슨 생각으로 메모지를 남긴 거지. 하지만 은지는 지은이가 여전히 베스트 프렌드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은지의 [4] 변화를 싫어하지 않았다니 은지는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