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거대한 해킹>
유도와 조종
"우리의 온라인 활동에서 나오는 데이터가 그냥 사라지진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제가 깊이 파면 팔수록 깨닫게 된 것은 이런 우리의 디지털 흔적들을 파헤치고 모으면 매년 1조 달러 규모의 사업이 됩니다."
- 데이비드 캐럴 교수, <거대한 해킹> 중에서
마케팅, 그중에서도 광고나 캠페인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사람의 행동(혹은 생각)을 유도하는 데 있다. 제품을 사게끔, 서비스에 가입하게끔, 어떤 주장이나 생각에 동의해서 행동하게끔 '유도하는' 콘텐츠가 바로 광고나 캠페인, 광고성 캠페인, 캠페인성 광고다. 훌륭한 광고라 함은 결국 사람들의 행동을 잘 유도한 광고다.
조종은 다르다.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어 부림'이라는 사전적 정의에서 알 수 있듯 조종은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생각을 원하는 대로 부리는 것을 뜻한다.
유도와 조종은 이렇게나 다르지만 사실 한 끗 차이다. 하게끔 하면 유도, 하게 만들면 조종이라고 해야 하나. 말장난 같은 사소한 차이지만 우리가 받아들일 때는 하늘과 땅 차이다. "내가 고객들을 잘 유도하는 광고를 만들어서 매출을 올렸어!"는 유능한 마케터의 말이지만 "내가 고객들을 조종해서 매출을 올렸어!"에서는 뭔가 범법의 냄새가 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거대한 해킹>은 SNS상의 광고와 캠페인이 어떻게 유도가 아닌 조종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를 실화를 통해 보여준다. 그 실화가 무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같은 해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Cambridge Analytica)
"수 천만 명의 미국인이 이 설문 조사를 하도록 해서 저희는 4,5천 개의 데이터 포인트를 갖춘 모형을 만들 수 있었고 미국의 모든 성인의 성격을 예측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죠. 성격은 행동 양식을 이끌어내고 행동 양식은 분명히 투표를 어떻게 할지에 영향을 미치죠."
- 알렉산더 닉스(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CEO)의 프레젠테이션
<거대한 해킹>에는 2016년 미 대선과 브렉시트 투표 이후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라는 기업을 추적하는 저널리스트와 같은 기업을 상대로 '나의 개인정보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벌이는 대학교수, 그리고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출신의 내부고발자가 등장한다.
선거는 가장 대표적인 승자 독식(Winner takes it all)의 승부다. 1표 차든 10000표 차든 승자는 선거에 걸린 모든 걸 갖고 패자는 단 한 톨도 가져갈 수 없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쌓이고 선거가 거듭될수록 '선거에 이기는 기술' 또한 고도화되었다. 선거에 이기는 기술이라는 게 유권자들이 특정 후보에 투표하도록 유도하거나 최소한 우리 후보 안 찍을 사람들은 투표하지 않도록 만드는 기술이므로 결국 광고와 캠페인이 핵심이다. 그래서 요즘 선거는 이 바닥의 날고 기는 기술자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기술을 펼치는 대결의 장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는 선거판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여느 기업들처럼 데이터 연구를 기반으로 정치 컨설턴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물론 표면상 그렇다는 말이다.
<거대한 해킹(THE GREAT HACK)>
"정말인가요 페이스북? 5천만 명의 개인 정보가 침해된 사실을 알려주는 걸 잊었다는 거예요? 제 삼촌 친구의 여동생네 개가 생일이란 것도 알려주면서요?"
- <거대한 해킹>에 소개된 당시 미국 뉴스 프로그램 앵커의 말
그런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가 대체 뭔 짓을 했길래 '의혹 제기 - 내부 고발자 폭로 - 미국과 영국 의회 조사 - 미국 특검 조사- 조사 과정에서 파산(사실상 자진 폐업)'의 코스를 밟게 된 걸까. 의혹의 내용을 최대한 간단하게 요약하면 곧 다큐멘터리의 제목 <거대한 해킹(THE GREAT HACK)>이 된다.
좋은 비유일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한 번 들어보자. 과거 대한민국 PC방과 e스포츠 판을 휩쓸었던 스타크래프트 얘기다. 각기 다른 시작점에서 시작한 유저나 컴퓨터는 각자의 위치에서 자원을 캐고 건물을 지어서 병력을 생성한다. 그리고 생성한 병력으로 상대를 파괴하면 게임의 승자가 된다. 여기서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인은 상대의 행동을 수시로 관찰하고 그에 대응하는 전략을 세우고 수정해서 유리한 국면을 만드는 데 있다. 정찰이 승패를 결정짓는 전부는 아니지만 핵심 요소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런데 스타크래프트 온라인 대결 모드에는 '맵핵(map hack)'이라는 불법 프로그램이 존재했다. 정찰 유닛을 상대 진영에 보내지 않아도 게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장(map)의 모든 영역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는 꼼수였다. 맵핵을 사용하면 대등한 실력의 상대는 거의 100% 이길 수 있고, 눈에 띄는 실력 차이가 아니라면 자신보다 실력이 좋은 상대까지도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다. 승부의 핵심 요소였던 정찰을 승부의 절대 요소로 바꾸는 'hack'이 맵핵이었던 것이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의 거대한 해킹 의혹이 이와 같았다. 그들은 데이터 기반의 유권자 성향 분석을 통한 행동 유도를 '행동 조종'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무엇이 거대한 해킹의 대상이 되었는가. 페이스북 사용자의 개인정보다. 선거 광고와 캠페인을 위한 유권자 성향 분석을 페이스북 사용자의 개인정보 데이터로 했으니 해킹과 다름없었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가 페이스북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불법적으로 이용하여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 그리고 페이스북이 이를 최소한 방조하거나(다큐멘터리를 보면 마크 저커버그는 이 부분에서 페이스북의 잘못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나아가 여기에 협조했다는 의혹을 쫓는 과정이 본 다큐의 주요 내용이다.
서비스, 개인정보, 광고 그리고 조종
"앤디(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CEO)가 저한테 모든 걸 다 얘기했죠.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방법이나 페이스북에서 신상정보를 수집하는 방법 그리고 이렇게 말했죠. ‘진짜 이상한 거예요, 캐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요, 사람들이 그냥 우리한테 주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어요, ‘참 이상하죠!’
-캐럴 캐드월러드 '가디언'지 탐사 전문 기자, <거대한 해킹> 중에서
요즘은 이용자의 패턴을 분석하여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IT기술은 워낙 폭넓게 활용되고 있어서 딱히 뭐라 할 건덕지도 없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용자의 동의 하에, 사용자가 인식하고 있는 선에서 서비스가 이루어지는 경우에 한해서다. 당장 이 글에서 소개하고 있는 다큐멘터리를 서비스하는 넷플릭스는 이용자의 시청 이력을 분석하는 IT 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콘텐츠를 추천하고 있다. 당연히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만약 넷플릭스가 내가 CGV나 메가박스에서 본 영화 이력을 '나도 모르게' 가져다가 분석해서 콘텐츠를 추천하다면? 그걸 넘어 넷플릭스가 내 영화 취향을 다른 업체에 팔아넘기거나 광고주들에게 넘겨서 내가 넷플릭스 영화에서 본 특정 제품이 내가 보는 인터넷 브라우저 한 구석에 배너 광고로 등장한다면?
하나의 가정일 뿐이지만 실상 이런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매우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거대한 해킹>을 통해 보이는 현실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누군가는 '우리가 조종당하지 않으면 그만 아니오?' 할지 모른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또 다른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에 나오는 전문가의 의견은 다르다. 고도로 발달된 AI 기술로 이용자의 풍부한 개인 정보를 분석한 뒤 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개인의 주의를 끌고 행동을 유도하는 프로그램에 휘둘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한 마디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
싸움에서 이기기에는 상대가 우리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무엇에 좋아요를 눌렀는지, 내가 지난주에 온라인 쇼핑몰에서 무엇을 주문했는지, 내가 어떤 사이트의 페이지에서 오래 머물렀는지, 내가 무엇에 흥미를 느끼고 어떤 것에 분노하는지 말이다.
Data rights are human rights(데이터권은 인권이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존엄성은 위태로운 지경입니다. 하지만 제일 힘든 부분은 이런 끔찍한 잔해나 심각한 분열이 어느 한 개인을 한 명씩 조종하면서부터 시작된다는 거죠. 한 명, 다음에 또 한 명. 그다음에 또 한 명. 그래서 전 자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조종당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요?"
- 데이비드 캐럴 교수, <거대한 해킹> 중에서
<거대한 해킹>은 여느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처럼 세련된 연출과 멋들어진 그래픽 효과로 거의 2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시선을 붙든다. 방대한 개인정보를 손에 쥔 데이터 회사가 어떤 기술과 전략으로 세계의 운명을 가를 수 있을 정도의 큰 선거에 영향을 끼쳤는지 보고 있노라면 기업 범죄를 다룬 잘 만든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문제는 '이게 실화를 바탕으로 한'도 아니고 그냥 현실이라는 것.
내부 고발자가 된 핵심 관계자의 삶의 행적과 심리 변화를 보는 재미도 있다. 폭로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가담한 짓에 대한 쉴드(?)를 치고 싶어 하는 듯한 소극적인 모습에서 마음을 크게 먹고 거침없이 진실을 꺼내 놓는 용감한 내부 고발자로 변모하는 브리트니 카이저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짓에 본인과 회사가 연루되었다는 걸 알게 되자 멘붕에 빠지는데 그의 몸짓과 표정, 태도의 변화가 다큐멘터리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남 일 보듯 할 수 없다는 점이 <거대한 해킹>의 가장 씁쓸한 감상 포인트다. 다큐가 다루고 있는 세부 주제, 이를 테면 sns와 민주주의, 연결을 표방하는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가 어떻게 양극화와 분열을 조장하는지를 보면 이 모든 것들이 실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페이스북과 유튜브는 그들만의 놀이가 아니다.
앞서 잠시 소개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가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가진 SNS가 어떻게 개인의 행동을 유도하고 조종하는지를 잘 보여준다면 <거대한 해킹>은 개인을 넘어 국가적 차원의 스케일로 그 위험성을 경고한다.
우리는 조종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그동안 무심코 지나쳐온 수많은 개인정보 관련 이용약관들이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얼마나 많은 개인정보가 동의해준 약관의 범위를 넘어 누군가의 손에 사고 팔리고 이용당해 왔는지 알 수 없다. 다큐멘터리에서 데이비드 캐럴 교수가 말했듯 개인이 데이터를 흘리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데이터를 통제할 능력도 개인에게는 없다. 그런 우리가 이제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거대한 해킹>은 우리에게 질문과 함께 답을 내놓는다.
의문을 가질 것, 그리고 권리를 주장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