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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래 Sep 05. 2021

피구 시간과 결혼의 상관관계를 논하시오(2)

오늘부로 없는 걸로 했습니다. 땅땅땅.

매주, 매 달 같은 결과가 나를 기다렸다. 고작 나를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실을 또다시 증명받는 시간이 싫었다. 안드레아스에게 "그냥 나랑 짝 하자!"라고 말해 자존심이라도 챙겨볼까 했지만 중학생의 숫기로는 무리였다. 그렇게 피구 시간은 작지만 확실한 상처를 남겼다.


캐나다 전후로도 내 학창 시절엔 짝이 '있어야만'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흔한 한국의 학생이 겪을만한 평범한 것들이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가는 길, 관광버스 옆자리에 앉을 '짝', 초등학교 도덕 시간 수행평가를 할 '짝', 등등. 너무 사소해 기억나지도 않지만 짝지어야 했던 상황은 분명 수 없이 많았다. 짝을 찾으라는 압력은 동일했다. 무던히 짝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내 사회적 위치가 달랐기 때문이겠다. 나는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한 동네에서 나서 초중고 시절을 보낸 주류 중 주류였다.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짝을 찾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


대학생이 되자 '짝'이 되라는 외부의 요구는 줄었다. 엠티를 가면 무더기로 줄지어 앉는 경춘선을 타고 갔다. 과제를 하더라도 단 둘이 아닌 4-5명이서 조를 짰다. 동기라도 시간표가 다 달랐다. 혼자 카페를 가고 혼자 밥을 먹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이때 혼밥 혼카페의 묘미를 알았다지!) 더 이상 '단둘이 해야 하는' 상황은 없었다. 이후 두 번의 동아리 활동 세 번의 아르바이트 두 번의 직장 생활까지 했다. 지금껏 짝지으라는 압박에 마주한 적은 없었다. 잔업하다가 밥때를 놓쳐 혼밥 할 때도 있었다. 역시나 다들 굳이 같이 먹을 사람을 찾아주지는 않았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그냥 아무렇게나 앉으면 되는 경춘선 기차 좌석

내 주위 환경은 변했지만 난 계속 두렵다. 대략 이런 감정이다.


 (습관적 두구두구)


나만 짝이 없어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려워. 캐나다의 체육시간으로 자꾸만 돌아갈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자꾸만 친한 친구의 '베프 동향'에 오감을 집중한다. 남자 친구가 생긴 친구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두렵다. 이렇게 다들 '짝'을 찾아갈 거면, 나도 혼자 남겨질 수는 없는데. 그 건 안될 일인데 싶다. 결국 전혀 하고 싶지도 않던 '결혼'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결혼이 내게 꼭 필요했던 거 같다고 느끼며 바보 같은 선택을 하려 한다.


성향으로 봐도 가치관으로 봐도 난 결혼과 맞지 않는 사람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누군가와 같이 사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어색했다. 결혼의 일부일 뿐이지만, 결혼식도 판에 박힌 듯 똑같은 모습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를 낳고 정착하는 모습 또한 내가 그리는 미래는 아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나는 전혀 결혼을 하고 싶지도 않고 할 계획도 없는 사람인데. 그놈의 두려움이 뭐길래 결혼을 생각하게 하냐는 말이다.


이 두려움은 오늘부로 효력을 잃었다. 앞선 문장들로 실체 없음이 탄로 났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나를 둘러싼 직장은, 친구들은, 각 종 친목 집단은 짝을 지으란 요구를 하지 않는다. 학교가 아닌 사회는 더 이상 나에게 짝 있는 상태가 디폴트임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상, 갑자기 지금 친구들과 연을 끊지 않는 이상, 공 한번 같이 던질 친구를 찾지 못해 창피해할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같이 일을 못해서, 옆자리에 앉을 사람 없어 슬프진 않을 거다. 그런 상황은 코미디다. 자리를 잡고 살아갈수록, 내 주변엔 가족과 친구들이 계속 있을 거다. 앞으로도 나만 짝이 없어 슬프고 무력감을 느껴야 하는 '객관적인' 상황은 없다. 나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상상이 있을 뿐.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상상하며 두려워하기보다 다른 내 현실의 문제를 신경 쓰겠다. 영어 단어를 하나 더 외우고 글을 한 자 더 쓰겠다.

고작 과거의 상황으로 촉발되는 두려움을 끊어내겠다.


그러니 오늘부터 피구 시간과 결혼의 상관관계는, 없는 걸로. 땅땅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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