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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래 Mar 24. 2020

난 사실 입양을 원한적이 없었는데.

그땐 몰랐지.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졌기에 곱씹을수록 낯선 단어.


'입양'.


단어를 엄마 입에서 처음 들은 건 중학생 때였다. 캐나다 유학 중이었다. 어느 날의 등굣길. 매일 나를 차로 등하교시켜주던 엄마가  말했다. '결심했고 아빠와 상의도 마쳤다'라고 했다. 너는 괜찮냐고 물어봤던 것 같기도.


가수가 꿈이라 매일 노래방 가서 2NE1 노래 부르던 중2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동생이 생긴다는 설렘은 아주 잠깐 머물렀다. 내겐 더 중요한 중2의 문제가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나에게 입양은 당연히 하는 거였다.

 



약 1년 반 후,


복지사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식탁에 마주 앉아 아메리카노 한 잔 두고 물었다.


"본인도 원하는 거 맞아요?"


헉. 그런가. 


가정방문 체크리스트에 집중하던 복지사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머리가 멈췄다. 이렇게 뻔하고 기본적인 질문에도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 없다니. '괜찮은 걸까요?'하고 되묻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1초라도 더 지체하면 내 진의를 의심할 것 같았다. 입을 억지로 떼 대답했다.


"엄마 아빠가 원하는 거니까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다만 엄마가 아이를 갖으려 불임 클리닉 다니고 시험관 시술했던 것. 부작용으로 배에 물이 차 수박처럼 부풀었는데도 포기하지 못했던 걸 알았다. 노력과 눈물을 아는데. 내가 뭐라고 감히 엄마의 결정에 방해물이 되겠나.


그리고 입양. 그 거 좋은 거잖아. 못 할게 뭐야.




수년이 지난 지금. 돌아간다면 그때의 나를 한 대 쥐어박을 거다. 고작 그 거 가지고 되겠냐고. 엄마 아빠의 결정에 기대도 괜찮을 것 같냐고 묻고 싶다.



뒤죽박죽,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은 입양에 대한 감정을 마음 깊이 파 묻었다. 들춰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동생을 맞이했다. 십수 년을 쉬었던 육아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엄마 아빠에게도 부담인 시간이다. 



우리집 자매들 같은 이미지 (큰 애는 저 보다 좀 더 크다는 게 유일한 차이다)


나에게 요구되는 책임이 늘었다.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생이 됐으니 놀고 싶은데. 다모토리 가서 원더걸스 노래 떼창 하며 먹는 소주 밤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중간고사 끝났으니 남자 친구랑 롯데월드도 가서 손잡고 눅눅한 추러스도 먹고 싶은데.


밖으로 나돌수록 엄마와의 갈등이 심해졌다. 동생 놀아주고 설거지라도 하란다. 가족에 무관심하단다. 난 나름 노력하는데?


왜 그래야 하는데?라고 받아쳤다. 엄마는


 시간을 보내고 정성을 쏟아야 가족인 거야, 가족에겐 각자의 책임이 있는 거다.
 


라고 응수했다.


나도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나도 바쁜데. 바꿀 수 없는 상황과 엄마에 대한 울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가 왜? 그니까 누가 입양 하래? 누가 하고싶댔냐고.



이런 패륜적인 대사가 떠오르다니. 무슨 아침 드라마도 아니고. 앵앵 우는 동생을 옆에 두고 차마 뱉지 못했지만 갑자기 지워진 책임이 너무 무거웠다. 난 준비지 않았다. 혼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원한다고 재빨리 말했던 과거의 나는 거짓말을 했었다.


나는 애초에 원한 적이 없었다. 

엄마가, 아빠가 원했지.


그냥 가끔 짬 날 때 뽀로로나 보면서 놀아주면 되겠지.


더 지루하고 빈번하고 사소한 태스크들이 기다린다는 걸 몰랐다.


설거지

물걸레질

시험기간에도 끊이지 않는 동생의 놀아달라는 노크

요리

주말은 집에서 보내라는 요구

점심/저녁은 집에서 먹고 놀아주기

키우기 힘들다는 엄마의 푸념과 짜증


아이를 바라온 부모님, 그 아래서 나는 십수 년을 어쨌거나 외동으로 살았고 다 큰 언니에게 요구될 것이 무엇인지 전혀 예상하지도, 합의하지도 않았다.


동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책임을 인식하는 건 다른 얘기다. 가족의 책임이 있는 거라는 엄마의 말이 입양 전에는 왜 들리지 않았을까. 어쩌면 들어본 적 없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고민해 본 적도 없다. 육아는


현실이다. 지금도 엄마의 발톱 때만큼도 희생하지 않고 있는 내가 하기는 우스운 말이지만.


언니로서도. 감당해야 하는 부분들이 버겁다. 지금도 그렇다. 숙고하지 않은 결정은 때때로 시간을 돌리고 싶은 마음을 준다.


결론은 뭐냐. 나 같이 스무 살 넘게 차이나는 언니가 곧 되는 사람이 있다면. 또 이미 결정 내리기 전이라면, 당신도 책임을 져야 하기에 단 한 번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라는 거다.


지금 돌아간다면 단호히 거절하진 못하겠다. 동생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


그래도,


"아니요 모르겠어요.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엄마 아빠와 최소한 아이가 생기면 일어날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지. 그리고 마음으로 먼저 준비하겠다. 당연한 결정으로 여기고 체념하지 않겠다. 


지금 내 귀에 꽂힌 이어 플러그 너머 앵앵대는 동생의 목소리가 방증하듯. 나도 변화와 책임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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