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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래 Mar 24. 2020

살아있으니까. 그냥 인생 예찬까진 아니어도.

구박도 당하고 칭찬도 당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냥 사는 거지 뭐.

지난 11월 어느 날 저녁, 아빠와 거실에 앉아 둘째 동생 예린이를 보고 있었다. 예린의 행동에 우리는 연신 박수를 치고 "너무 잘했어~", "와~" 하며 웃었다. 시간이 지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기 상어 노래 들으며 제자리에서 높이 뛰기 했다든가, "안냐세여"하며 20개월 아기 답지 않게 야무진 배꼽인살 했다든가, 똥을 예쁘게 싸 놨든가 그런 종류였겠지.


뜬금없이 슬퍼졌다. 참고로 난 취준생이고 하반기엔 원서 넣는 곳마다 탈락 배틀이라도 하듯, '먼저 가볼게!' 하며 이별당했다. 안 될 거라고 이미 단념한 마지막 필기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11월은,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했다는 자기 연민이 용암 흐르듯 울컥 대던 시기였다.


예린이가 부러웠다. 순간 나온 감정을 툭 작게 뱉었다.


"좋겠다. 이런 거만 해도 칭찬받을 수 있어서."


아빠가 예린이에게 시선을 두고 미소 지은 채 조곤히 받아쳤다.


"넌 뭘 해야 칭찬받는데?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칭찬받을 일이야."


칭찬받고 싶어 안달 난 나.


예원이 생각이 났다.


예린(18년생) 도원(16년생) 위에 예원이가 있다. 내 첫 번째 동생. 이 이야기를 하려니 너무 감상적이 될까 두렵다. 여하튼. 최대한 담백하게. 후.


예원이는 우리가 처음 입양한 아이다. 그리고 7살이 되던 2016년 1월, 병원에 간지 24시간도 안돼 천국에 갔다. 6년 남짓 우리와 살고 떠났다. 예원이의 죽음은 우리 가족에게 말도 못 할 상처다. 오죽하면 2016년 이후에 사귄 지인들은 예원이의 존재조차 모른다. (모른 척해주라 아직은) 가만히 있어도 '그니까 왜 이렇게 못돼게 굴었어?' 하는 죄책감이 자꾸만 나를 채찍질하며 상처 낸다. 이름과 기억을 뱉는 순간 미련이 나를 억누른다. 참고 참는다. 장례식 이후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에게 예원이란 이름을 꺼낸 적이 없다.


그리고 예린 도원이 왔다.


솔직히 이쯤 돼서 글 흐름상 미담이 나와주고 아름답게 마무리해야 될 것 같긴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예쁘다. 도원이가 어린이집에서 좋아하는 블록 놀이하며 해맑게 웃는 모습을 키즈노트에서 봤을 때. 예린이가 야무진 작은 입으로 꼬물거리며 토마토를 씹을 때.


그 외. 매일이 전쟁이다.


밥 더 달라고 떼쓰고 다 남기고, 파프리카랑 힘들게 한 카레라이스 안 먹겠다고 고집부린다. 안아달라고 울어대서 설거지도 못한다. 악쓰는 쟤네도 힘들겠다 참. 하면서도 스트레스 쌓인다. 그게 사는 건가 보다. 기쁨만 분노만 슬픔만 골라 챙길 순 없다. 어쨌거나 빡침이든 기쁨이든 활력이 있으니까. 살아있으니까. 짬뽕된 감정을 느끼며 살아있다는 거 자체가 존재 의미다. 뭘 또 거창한 칭찬에 기대 의미를 찾아보려 할까, 우리 인생은.


칭찬받기 위해 사는 인생은 허무하다. 삶의 목적이 칭찬과 인정이 될 수 없다. 그냥 사는 거다.


나에게 빡침도 기쁨도 충만히 선사하는 우리 집 애기들처럼.


구박도 당하고 칭찬도 당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냥 사는 거다. 사람을 옆에 두고.


도원, 예린도 마냥 걱정 없는 시기를 넘어 지금 나처럼 고민 많은 시기가 올 것다. 빠르겐 10년 안에 오겠지. 그때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우울해하지 마. 증명하지 마. 칭찬받으려 하지 마. 그냥 살아도 돼. 충분해!


p.s. 말 안 통한다고 딸한테 맨날 구박당하는 아빠. 우리 아빠 꽤 다정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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