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과정의 기억들이 무수히 쌓이면, 그것들을 정화 해 가는 내면의 치유과정이 한해 두해 나이를 쌓아가는 여정에서 꼭 필요 할 것이다.
누구이든 희, 노, 애, 락의 사연들을 겪어가며, 거미줄 같은 인연들 속에서 실타래처럼 엉키어진 삶을 힘겹게 살아 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미처 못 다한 삶의 숙제 같은 중량의 묵직한 책들이 담긴 가방을 어깨에 걸쳐 메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나의 걸음은 마치 며칠을 지치고 굶주려 발길의 중심이 잡히지 않아 비틀거리는 패잔병의 걸음걸이와 흡사했다.
구미시 공단동의 아침 풍경은 활기에 넘쳤다. 출근하는 작업복 차림의 근로자들과 양복에 넥타이를 맨 관리직 회사원들, 그리고 다른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어울려 오고가는 길이 무리를 이루어 분주했다. 달리는 버스들은 만원 이였으며 인도의 행인들은 긴장된 모습으로 넘쳐흘렀다.
그 무리들 속에서 나는 실재하지 않는 그림자인 듯 핏기 없이 꿈을 내려놓은 듯 무기력한 모습으로 표정이 없었다. 그 무표정으로 습관처럼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그저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공부를 시작한지 벌써 7년이란 시간이 흘러갔음에도 합격할 수 있다는 확신이 도무지 들지를 않았다. 단지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책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양심선언을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발길이 닿은 곳은 공단지역 의 남쪽에 위치한 근로복지공단의 잔디밭이었다. 그런대로 조화롭게 갖가지 나무와 화초들, 그리고 커다랗고 작은 원형들로 구성 된 분수대의 조경이 배치를 잘 이루어 꾸며진 아늑하게 아름다운 곳이다.
계절의 여왕 이라고 했던가? 5월의 복지공단 정원을 지나쳐 건물 내에 있는 도서관까지 가는 길이 온통 유혹으로 펼쳐져 있는 듯 했다. 바람에 실려 오는 라일락 짙은 향기하며, 이름 모를 갖가지 꽃들과 붉은 넝쿨장미의 화려함 , 그리고 알록달록 야외 복 차림으로 회사의 단체 소풍을 떠나기 위해 모여든 보기에도 싱그러움이 넘치는 아가씨들...
라일락 꽃향기가 묵직한 두통을 달래어 주는 오월의 편안한 아침이라고 결론을 애써 지으며 마음을 다독이고 오늘이란 하루를 살아 내야 할 도서관의 내 자리가 있는 건물 내로 들어섰다.
나는 거의 도서관 문을 열자마자 입실을 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큰 규모의 도서관은 아니지만 차분한 분위기가 마음을 편안히 해주는 장소였다. 도서관 입실은 늘 서둘러서 빨랐던 나였지만 은주는 나 보다 한 발 앞서 늘 그 자리에 항상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은주는 간호대학을 갓 졸업하고 보건 직 공무원을 공부하던 착하고 귀엽게 생긴 구미 구평 동에서 오는 23살의 아가씨였으며 나는 공단 복지 센터 도서관에서는 나이가 두 번째로 많은 만년 31살의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이었다. 그리고, 아침에 입실해서 나의 지정석으로 가면, 내 책상위에는 늘 커피한잔과 함께 가끔 아기자기한 필체로 마음을 위로해주고 분발케 하는 문구로 메 꾸어진 쪽지도 놓여 있었다. 은주가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도서관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것은 아마 은주의 나에 대한 자기만의 관심의 표현 이였을 것이다.
5월의 중순 어느 하루의 오후, 화창한 날씨에 마음이 심란하여 내 앞에 쌓여진 몇 번이나 읽어서 부담이 없는 법전과 법서들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긴 한숨만이 도서관의 무거운 분위기만큼 묵직한 무게로 쌓여 가고 있을 즈음, 서글픈 마음을 달래려 식은 커피 잔을 입가로 가져가서 한 모금 적시고 있을 때 누군가가 어깨를 톡톡 치는 것이었다. 귀엽고 맑은 은주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아저씨, 우리 금오산 가요.. 이런 날은 책보다 자연이 더 좋아요. 다녀오면 공부가 잘 될 것 같아요.” 다소곳했지만 밝게 웃는 은주의 모습이 내 동공가득 클로즈 업 되었다. 은주는 웃을 때 실눈이 되어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선천적으로 자연스런 눈웃음을 가진 아이였다. 말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항상 필요한 말만 하고는 잔잔한 미소로 대답을 기다리는 조용한 성격이다. 은주의 그러한 다정함과 고요 앞에서 나는 언제나 기분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은주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은주는 왜 날 항상 아저씨라고 부르지? 잠시 생각 하는 동안 벌써 우리는 금오산행 버스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평일 오후여서 승객들도 별로 없는 한적한 버스 안은 시끄러운 유행가 소리만 가득했다. 은주는 작은 미소와 함께 흥얼거리듯 노래를 따라 부르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러한 은주를 복잡한 마음으로 잔잔히 응시하며 차의 흔들림에 무기력하게 몸을 맞기고 있었다.
금오산 입구 채미정 옆의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소나무 숲을 지나치는 바람소리가 묘한 조화를 이루어 우리들을 감싸고 휘감고 가는 듯했으며, 도선 굴의 신비로움은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미의 정경이 마치 우리들이 그 세상에 속하지 않은 듯한 특별한 느낌마저 들게 해주었다. 그렇게 딴 세상을 사는 듯이 오후 몇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은주는 좀 걷자고 응석을 부리듯 말 했다. 나도 걸으며 마음속에 먼지처럼 쌓인 이야기들을 털어 내고 싶었고 또한 묵직하게 침체된 마음을 달래고픈 생각이 컸었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조금 걸었을 때 은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편안하게 팔짱을 꼈다. 은주의 포근한 가슴의 탄력이 따스한 체온과 함께 내 팔에 전해져 왔다. 싫지가 않았다. 그렇게 은주에게 내가 몰입되고 있을 때 침묵을 깨며 은주는 말을 이었다. “아저씨, 만약에 우리에게 이별이 온다면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예쁜 과일 한 접시 시켜놓고 그것을 바라보며 그 향기와 빛깔을 음미하며 아름답게 이별해요...” “음..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그냥요...” 난 당시 결혼해서 아이도 있는 유부남이었다.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 하던 후배들이 나이가 많은 나의 마음을 편히 해준다고 총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이런 혼란을 가져 오게 된 것이다. 은주도, 나도 지금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1년여가 흐르고 은주는 임용시험에 합격을 해서 떠났다. 남겨진 나는 변함없이 나보다 사연이 많은 네 살 위의 한의대 만학도인 선배와 가끔 소주잔을 기울이며 회한을 달래 가며 그저 습관적인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구미시 지방 직 공무원에 임용되어 구미시청에 근무하던 후배가 위문 차원에서 간식을 사들고 도서관으로 찾아와 그날 저녁 공부는 일찍 파하고 도서관 앞 넒은 잔디밭에서 담소와 함께 오랜만에 긴장 풀린 시간을 가졌다. 한참을 이야기꽃이 무르익고 무리무리 지어 저마다의 사연이 깊어 질 즈음 후배는 내 곁에 다가와서 조용하게 “형님, 이 은주 씨가 지금 구미 보건소에 발령받아 함께 근무 하고 있습니다. 출근 때 늘 보는데 형님 안부 물으며 공부 안 되실 때 한번 와주십사 하던데요.”
구미시청과 보건소는 한 울타리 안에 인접해서 위치 해있었다. “아, 은주가 구미 보건소로 왔어? 알았어. 언제 한번 들른다고 전해줘. 고마워.” 그 시간 나는 오로지 은주와의 많은 추억들을 되 뇌이며 어찌할 수 없는 무거운 생각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이에게 뭐라고 하지? 아직도 나를 간직하고 있는 순수하고 진실 된 그 아이의 마음에 잔인한 상처를 남길 수도 있게 되었으니 다시 혼란이 되살아나 무겁게 자리 잡는 듯했다. 몇일 후, 은주를 찾아 갔다. 간호사 캡을 쓰고 가운을 입은 모양이 제법 의젓하게 안정이 되어 보였다. 은주가 이끄는 방으로 가서 그녀가 만들어 주는 커피 향을 맡으며 서로 말없이 마주 보며 그간의 서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창틈으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 속에서 주고받았다. 나는 그녀가 건네주는 의자에 무겁게 앉았고 은주는 마주 보는 의료기구들을 넣어 두는 듯한 진열장에 기대어 다소곳이 두 손으로 커피 잔을 들고 늘 그렇듯이 머리를 살짝 숙인 모양으로 은은한 미소 속에서 무언의 대화 속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나에 대한 대화법이었다. 항상 그랬다. 햇살이 은주의 얼굴을 살짝 비추며 은은히 부서져 내리는 늦가을의 그윽한 정취를 만들었다. 내 어깨에도 햇살은 잠시 머물러 주는 오후의 늦은 시간의 짧은 행복이었다. 그날도 몇 번이나 용기를 내 보려 했지만 차마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은주의 진지하고 순진한 표정 앞에 그 말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며 혼자 결론을 내렸다. “오늘이 은주와의 마지막 날이야. 다시는 은주 앞에 나타나지 말자. 그러면 시간이 모든 것을 정리 해 줄 거야...”
공부에 전념하여 마지막 건곤일척의 승부를 볼 심산으로 구미에서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였다. 아내의 음악 학원마저 처분하고 배수의 진을 치듯 대구 상인동에 전세를 얻어 자리를 잡고 나는 인근 고시원에서 밤낮을 잊고 공부만 하였다. 시력이 평소 1.5이던 것이 0.6으로 내려갈 정도로 건강도 살피지 않았고, 점심 밥 먹는 시간이 아깝고 식곤증이 피곤해서 앉은 채로 공부를 하며 삶은 계란 하나와 우유 한잔으로 점심을 때우며 오로지 마지막 승부를 생각하며 공부를 해냈으며 2차 시험까지 무난히 치루 어 냈다. 몹시 그리웠던 은주도 보고 왔다.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잠시의 여유를 가지며 한가롭게 오랜만의 휴식에 빠져 있을 즈음 지난일 들이 회상처럼 하나둘 나의 기억을 두드리며 지나갔다. 가장 큰 무게로 은주생각까지 떠올렸을 때, 시험 후 은주를 만나고 돌아 올 때 손에 꼭 쥐어 주던 쪽지, 은주의 편지가 한통 있었다는 사실을 늦게 서야 기억을 해내었다. 시험결과에 대한 부담감으로 벅차 까마득히 잊고 주머니에 그냥 잠자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짧고 명료했다. 근사한 식사를 한번 편안히 했으면 좋겠으니 시간을 한번 더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 적혀 있었다. 다음날 은주에게 이제는 사실을 털어 놓아야 할 것 같았고, 보고 싶은 마음도 컸고, 그래서 작정 없이 북부정류장으로 가서 구미 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낙동대교를 지나며 구미에 진입하는 순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은 은주에 대한 그리움 이었을까? 떨쳐내지 못한 용기 없는 나의 죄책감 때문 이었을까? 그것은 아직도 모르겠다.
보건소 현관을 들어서는데 간호사복의 한 아가씨가 보여서 그녀의 근황을 물었다. “여기 이 은주 간호사님 아직 계신가요?” “예, 이 주임님 지금 실험실에 계세요. 잠시 기다리세요.. 근데 누구시라고 전할까요?” 벌써 주임이 될 정도로 세월이 흐른 건가? “예, 아저씨라고 전하시면 알 것입니다.” “예? 아저씨?....” 그 아가씨의 얼굴엔 약간 황당하다는 표정과 함께 웃음이 번졌다.
잠시 후 나타난 그녀.. 약간 수척해진 모습 속에 이제는 완전한 여인의 모습이 느껴졌다. 조금은 허전한 표정, 그러나 너무나 반가운 미소가 나의 불안감을 녹여 주었다. 그녀가 방으로 안내 했고, 커피 두 잔을 만들어 나에게 한잔 그리고 그녀가 한잔, 역시 두 손으로 꼬옥 감싸 쥐고 내게 의자를 건네고 그녀는 맞은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둘은 침묵 속으로 또 빠져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한참 후 은주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2년 전과 지난번 오셨을 때도 이맘때 이 시간쯤 이였어요. 아저씨 어깨위에는 햇살이 내려앉았고. 그걸 바라보는 내 눈이 약간 부실정도로 빛의 각도가 그랬었어요..” 아.. 그녀의 섬세한 사려에 난 말을 잃었고 짙은 감동의 물결에 떠밀려 내려가고 있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은주를 꼭 안고 울었다. 아무 말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은주 역시 나의 겨드랑이를 힘 것 끌어안으며 “왜 이제 오셨어요? 매일을 기다렸어요. 은주는 단 한순간도 아저씨 편안한 미소를 놓쳐 본 적이 없었 단 말이에요.” 한참을 두 사람은 가슴 에이는 포옹 속에서 울고 있었다. 모두가 퇴근을 한 보건소에서 두 사람이 마주하고 있는 공간인 실험실의 공간만이 격렬한 호흡에 젖어 있었다. 두 사람의 간절함 만큼이나 뜨거웠다.
그들을 축복하듯 찬란히 내려 비치던 햇살이 아쉬움을 내려놓고 격자무늬 창문 밖으로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나는 그녀를 고이 안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은주는 정말 꽃이었다. 제비꽃 향이 가득 묻어나는 그녀의 냄새, 나의 두뇌를 마취 시키는 듯 잊을 수 없는 포근함이었다. 잠시 침묵 속에서 정신을 가다듬어 용기를 내어 첫 마디를 꺼내 보았다. “나 할 말이 있어.. ” 은주의 눈빛이 순간 반짝 빛을 뿜는다. 그간 그러한 눈빛의 강렬함은 단한 번도 보지 못했었던 것 같다. 빛을 머금은 그녀의 동공은 너무나 비장 해보였다. “아저씨,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은주의 표정이 너무나 비장해서 그 묘한 위세에 눌려 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랑 함께 있으면 말이 거추장스러워요. 그냥 함께 있다는 이 안정감과 아늑함이 좋아요. 난 이것을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그녀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조금씩 커져갔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점점 불규칙해지면서 그 진동은 나의 생각마저 밑둥치부터 흔들어 왔다. 나는 또 혼란 속으로 빠져 드는 것이었다.
어둑해져서 조금은 쌀쌀한 늦가을의 구미 도심거리를 우린 걷고 있었다. 그녀는 늘 그랬던 것처럼 다정히 팔짱을 끼고 말이 없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을 스스로 달래며 나의 겨드랑이를 파고든 그녀의 손을 살포시, 하지만 꼬옥 잡았다. 나의 무겁고 암울한 마음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거리의 가게들은 불빛이 휘황찬란했으며, 오가는 인파들은 그저 들떠 행복한 표정들이었다. 어느 허름한 복고풍의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Black Sabbath의 She's Gone’이 회색빛 음색과 멜로디로 내 귓전을 파고들었다 갑자기 내 팔에 그녀가 이끄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아마 그녀가 가고 싶었던 곳을 발견 했나보다 라는 생각을 하며 저항 없이 이끄는 대로 나의 발길을 맡겼다. “아저씨, 나 첫 월급 받았을 때 부모님 보다 아저씨 생각이 먼저 났어요. 아저씨 하얀 얼굴에 잘 어울릴 만한 카키색 재킷을 하나 사드리고 싶었는데, 오늘 멋진 저녁 사는 것으로 대신 할게요.” ‘귀천’이라는 레스토랑 앞이었다. 천상병 시인이 떠오르는... 아마 이 레스토랑의 주인은 적어도 천상병 시인의 시 구절 하나쯤은 욀 수 있는 사람이리라 짐작 해보며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그런데 나의 생각과는 달리 그녀는 레스토랑의 제일 중앙에 위치한 아주 넓은 자리로 나를 이끄는 것이었다. 늘 조용하고 소극적이던 그녀가 이런 위치의 자리를? 의아해 하며 말없이 따라 주었다. 우린 늘 그랬다. 한사람이 강하게 원하면 한사람은 조용히 따라주는 습성이 언젠가부터 익숙한 우리들만의 법칙이라면 법칙이었다. 귀에 익은 음악들이 잔잔하게 흐르는 공간에 그녀와 마주 하고 앉았다. 식사가 오고 와인도 곁들여진 오랜만의 그리움이 녹아드는 시간.. 여전히 말없이 포크를 만지작거리며 식사를 하던 그녀가 갑자기 웨이터를 불렀다.
“여기... 멋진 과일 한 접시 가져다주세요..”
난 그 순간, 시간이 정지 하는 듯, 혼미한 의식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가 오래전에 내게 당부한말이었다.
이별의 의식...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그녀를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며 공허함으로 무너지고 있는 스스로를 삼켜야 했었다. 어차피 맞닥 뜨려야할 현실 이였기에 마음으로 안도를 해야 맞는 것 아니였던가 ?
미로와 같은 나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아이보리색의 반코트 어깨위로 흘러 내려와 있는 그녀의 긴 머리 결이 떨리고 있었다. 제비꽃향이 오늘따라 더욱 짙게 주변을 물들이며 그녀가 마음으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저씨, 이 것 하나 드셔 보세요. 오늘은 제가 먹여 드리고 싶어요.” 은주의 피부 빛을 닮은 하얀 배 한 조각을 내 입안에 넣어주었다. 그것은 그녀가 내게 주는 마음 한 조각 이었다. 슬픔 속에서도 또렷이 느껴지는 달콤한 그 맛, 그것은 분명히 그녀의 마음이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마지막으로 고스란히 삼키고 있는 것이었다.
레스토랑 앞의 어둑한 골목길에 우린 마주 보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니, 누구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실 날 같은 긴장이 끊어져 주체할 수 없는 그 슬픔 속으로 빠지는 게 너무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아저씨가 먼저 가세요. 저 모퉁이 돌아 설 때 까지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그냥 가세요. 만일 돌아보시거나. 되돌아오신다면. 은주는 아저씨 오늘 못 보내드려요. 아시겠어요? 그냥 돌아보시지 말고 모퉁이 돌아 댁으로 가시란 말 이여요!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말을 채 끝내지 않고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또 침묵 속으로 빠졌다. “은주.. 그럼 다 알고 있었단 말이야? ...” 은주는 이미 내가 유부남이란 것을 알고 시작한 것이란 말인가? 난 할 말 도 잃고, 지금 이 순간을 어찌해야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의미도 방향감각도 상실한 채 속절없이 먼 하늘에 시선을 던졌다.
칠흑 같은 하늘엔 오리온성좌가 흘러내릴 듯 빛을 발하며 반짝이고 있었다. 시선 가득 메워오는 별자리에서 슬픈 이야기가 떠올랐다.
비극적인 사랑을 나눈 오리온과 아르테미스의 전설...
아폴론의 계략으로 사냥을 하고 있는 오리온을 아르테미스는 표적으로 알고 화살을 쏴 죽이게 되고, 그걸 알게 된 아르테미스는 절망을 하고 제우스는 그런 그녀를 위해 밤하늘에 오리온을 본 따 별자리를 만들어 주어 위로 했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사랑도 그 만큼이나 비극적이려나?
달빛이 너무 투명하다. 달빛이 아프도록 쏟아져 내려 우리를 에워싸고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달빛만큼 시간은 또한 거꾸로 흘러가고 있는 듯 했다. 인파들은 수많은 재잘거림과 북적거림으로 우리들 주변을 에워싸고 스쳐가고 있었지만 은주와 마주하는 우리들의 공간은 마치 황량한 바람이 불어가듯 숨이 멎을 듯한 커다란 빈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은주의 짙은 침묵과 이미 무게 중심을 잃은 나의 당혹감은 함께 어우러질 수없는 추상화 속, 두 가닥의 선처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무거운 시간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아저씨, 이제 가세요.. 제가 당부한 것... 잊지 마시고.. 그냥 가버리세요.” 은주가 조금은 더 차분하고 냉정해진 어조로 말을 꺼내고는 다시 침묵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말없이 돌아섰다. ‘그래, 결국은 은주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이것이 아니었던가.. 오히려 잘 된 것인지도 몰라. 우린 여기 까지라고 운명의 시간에 적혀 있을 거야.’ 그렇게 스스로 달래며 위로하며 은주에게서 멀어 지고 있었다. 아스팔트 보도위로 끌리는 듯 둔탁한 소리를 내며 옮겨지는 나의 발자국 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내 귓전을 어지럽혀 왔다. 2~3미터 앞의 전봇대만 돌아서면 이제 은주와는 영원한 이별, 종말이란 말인가? 발걸음이 시커먼 늦가을의 밤하늘의 무게만큼 무거웠고 의식 또한 너무도 많은 생각에 쌓여 걸음이 고장 난 나침판처럼 어지러웠다. 나의 이성은 이미 전봇대를 돌아 대구행 버스에 오르고 있었지만, 내면의 깊은 의식에서는 그녀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뜨거운 용암처럼 솟구쳐 오르는 그 어떤 힘이 있었다. 혼돈 속이었지만 결국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흐릿한 조명 아래 단정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지만, 바람결에 긴 머리카락은 그녀의 얼굴을 어지럽게 덮고 있었고 머릿결 사이로 보이는 맑은 두 눈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음을 분명히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자석에 이끌리 듯,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작은 두 손을 꼭 쥐었다. “은주, 너를 두고 가지를 못 하겠어 .. 제발 나를 잡아줘..” 은주는 손을 내게 맡긴 채 이마를 내 가슴에 묻고는 “아저씨, 정말 사랑해.. 어느 날 도서관 근처 잔디공원에서 부인인 듯한 언니랑 다정히 앉아서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았을 때 결혼한 것을 알고 마음을 정리 하려고 했지만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그이후로 아저씨 입에서 결혼 했다는 말이 나올까 봐 겁이 났었어.” 은주의 입에서 처음 사랑한다는 말과 깍듯한 경어가 아닌 편안한 말을 들었다.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것이 더욱 익숙한 화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이 주변 상가의 갖가지 조명을 받아 하늘의 별들처럼 반짝였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별이 된듯했다. 아니 늦가을 밤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오리온성좌의 가운데 나란히 펼쳐진 세 개의 별이 그녀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역시 둘은 말이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냥 손으로 전해지는 서로의 체온만을 의지한 채 마음으로 주고받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드는 것이었다. 구미 도심이 끝나고 어둑한 공간이 우리를 에워쌀 즈음 시야에 나타난 것은 ‘밀密 ’이란 모텔이었다. 나의 우유부단함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선뜻 그녀를 이끌지 못하고 망설이는 순간, 은주의 힘이 전해져 왔다. 살짝 미소를 흘리며 나를 이끄는 것이었다. 마치 ‘아저씨, 이럴 때는 바보 같아..’ 하며 놀리는 웃음인 듯 했다.
모텔 방은 생각 보다 어색하거나 화려 하지 않았다. 마치 동굴 속에 들어 온 듯한 분위기와 은은한 조명, 어둡지 않은 밝은 분위기였다. 벽면은 벽지가 아니라 마치 흙으로 만든 벽을 연상케 하는 그런 굴곡을 가진 하얀색의 페인트칠이 입혀진 듯 안정감과 아늑함을 동시에 전해 주는 것이었다.
먼저 샤워를 하고 가운을 입은 채 방안에 마련된 작은 소파에 지친 몸을 맡기고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들이 켰다. 자욱한 연기는 마치 꿈결처럼 허공에 퍼져갔다. 그리고는 선명한 주변의 모습을 되돌려 주며 사라지는 것이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꿈결 같은 현실은 내게 있어서 어느 것일까?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 사이 은주가 샤워를 마치고 와서 내 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는다. 담배를 껐다. 그녀에게 연기가 가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좀 전의 눈물 속 그녀의 모습은 지금 이 순간에는 완전히 사라진 듯 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행복에 젖어 있는 은주, 멜로디가 귀에 익었다. 안나 게르만의 ‘쇼팽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녀의 흥얼거림을 방해 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그 멜로디의 여운을 따라가며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운이 흐트러져 살짝 보이는 그녀의 적당히 풍만한 가슴, 예쁘게 탄력적으로 뻗은 뽀얀 다리, 은주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 이였던가? 젖은 머릿결을 하얀 타월로 감싼 모습으로 자연스레 올림머리가 된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은 너무나 선정적 이였다. “아저씨, 이 시간이 영원히 멈추었으면 좋겠어. 이제 아저씨를 기다리며 속만 태우며 사랑하지는 않을 거야. 지난 5년간 고요히 지켜보며 바라보는 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야..” “ ...... ”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입가에서 맴돌았지만 부질없을 것 같아 침묵했다. “아저씨도 분명히 은주를 사랑하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아. 지난 시간은 아저씨 마음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 늘 불안 했거든.. 그래서 난 늘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는 또 침묵 속으로 빠져 드는 그녀였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무엇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진정 은주를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늘 안정감이 충만했다. 무엇을 하든, 침묵으로 있든 그저 편안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확히 마음에 각인 되는 것이었다.
마치 신혼여행을 온 부부처럼 둘은 침대에 편안히 누워서 마주 보았다. 그녀의 하얀 얼굴은, 고요한 눈매속의 눈동자는, 정말 별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의 볼을 정성가득 담긴 손길로 어루만졌다.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면 싱그러운 우유 냄새가 났다. 그녀의 머릿결에서는 제비 꽃 향이 번져 흘렀다. 나는 정성을 다하여 그녀의 머릿결을 손가락 가득 담아 어루만졌다. 그녀의 이마, 두 눈, 그리고 콧등을 타고 입술까지 사랑이 가득담긴 부드러움의 키스를 했다.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을 그녀의 가슴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흐느낌 같은 탄성을 무의식적으로 쏟아 내었다. 그녀는 작게 떨며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 또한 벅차오르는 호흡을 따라 움직임이 커지고 있었다.
은주의 흥분이 고조 되어 감을 느낄수록 나의 심장은 더욱 뛰었으며 몸짓은 어떤 본능의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 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마치 입술과 혀로 그림을 그리 듯 애무를 하며 나는 그녀에게로 향하는 또 다른 별이 되는 것이었다.
불덩이 같은 나와 그녀의 육신이 하나로 포개어 졌을 때는 우주로 통하는 문이 열리는 듯, 극치의 환희로움으로 두 사람은 알지 못할 눈물 속에서 떨었다.
은주가 더 적극적 이였다.
나의 위로 은주가 올랐고 그녀의 움직임은 스스럼없이 격렬 해져갔다. 그것은 천상의 흔들림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신음소리는 차라리 천사의 노래 소리였다.
두 사람은 하나의 별이 되어 밤하늘 빛으로 흘러내리는 듯 한없이 흐르고 또 흘렀다.
‘은은한 축복 달빛에 묻어 내린다.
사랑 가득 머금은 그대 시선엔 영원이 보인다.
은빛 고요가 물들어 가는 밤의 들판,
그대와의 입맞춤은 잔잔한 제비꽃 향이 된다.
칠흑 밤하늘 헤아릴 수 없는 별 빛,
그대와 나 찬란히 하나가 된다.
반짝이며 쏟아져 내리는 별이 된다.
제비꽃 향 가득한 현기증,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리움이 어둠에 묻혀간다.’ 파도가 잔잔히 또 격렬히 지나가고 가라앉은 듯한 우리들의 사랑 법은, 이제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 선명히 각인 되었으리라.
은주와는 몇 번째의 무겁고도 벅찬 사랑을 나눈 것일까? 그 생각이 떠오르며 은주의 표정을 다시 보고 싶어 그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첫 번째와는 다른 익숙함이 표정에서 묻어 나왔다. 한층 성숙되고 우아하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았다.
“그 뒤쪽에 아저씨 안 내려요! 도착지에 왔는데 계속 주무실 건가요?” 그렇게 밉지 않은 투박한 시외 버스기사 아저씨의 외침이었다. 그 순간 "아 으 어!" 나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혼수상태의 잠에서 깨어났다. 대구의 북부 정류장 마당에는 승객들도 모두 제 갈 길을 서둘러 떠났고 을씨년스런 바람만이 맴돌고 있었다.
아! 지금의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온갖 것이 뒤죽박죽이다.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나는 은주를 결국은 혼자 남겨 두고 돌아서 와 버린 것이다. 돌이켜 보니 모퉁이 전봇대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가슴을 두들기며 매정히 돌아서 온 것이다. 은주의 당부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온 것이었다. 그게 은주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멍한 나의 가슴으로 늦가을의 바람이지만 겨울 같은 쌀쌀함이 파고들었다. 휑한 거리에는 폐지 들이 유령의 도시처럼 뒹굴고 있었다. 은주도 지금쯤 무너지는 가슴으로 힘들어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다시 되돌리고 싶은 마음 뿐 이었다. 하지만 아픔은 잠시이리라 믿으며 그녀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길이 주체 할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시간 속에 그려진 듯한 추상화 같은 혼돈이었다. 이렇듯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꾸지만, 눈을 뜨고도 깊은 꿈에 빠지는 것이다. 몸은 대구행 버스에 실려 공간을 달리고 있었지만, 마음은 은주 곁에 머물러 시간을 함께 한 것이었다. 분리된 몸과 마음이 다시 모아지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 영원히 몸과 마음이 분리 되어 살아 가야할지도 모르겠다. 은주를 떠나오며 나는 분명히 은주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지독한 나의 아이러니는 운명이란 것인가? 그녀에게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왔지만 왠지 불안감이 파고들었다. 왜일까?
행인들도 끊긴 거리, 옷깃을 여며야 할 정도의 싸늘함이 묻어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스팔트 위를 무심히 쓸고 지나간다. 수레에, 음악시디와 카세트테이프를 담고 행상을 하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머리를 길러 한 가닥으로 묶은 수염이 덥수룩한, 한 사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늘고 고운 미성의 구성진 음색이었다. Black Sabbath 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나의 동공은 극심한 번민으로 풀릴 대로 풀려 있었다. 허전한 동공을 가득 메워 오는 이색적인 광경, 허름한 차림새의 그였지만, 들려오는 음색은 감미롭기 그지없었다. 마치 예정된 초대에 이끌리듯이 그에게로 다가서서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그와 어우러졌다. 그의 노래가 끝이 났다. 갑자기 주변의 정적은 진공상태와 같은, 질식할 것만 같은 외로움과 절망을 고스란히 안겨 주었다. 숨이 막혀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카세트테이프를 몇 개 손에 쥐고 급히 계산을 치루고 나는 그곳을 도망이나 치듯 황급히 빠져 나왔다.
집 현관 까지 걸어서 도착한 시간이 50분정도의 시간, 그 시간 동안 나는 줄곧 은주를 생각했다. 마음의 뿌리까지 점령해버린 은주의 영상... 초인종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문이 열리며 윤희가 나왔다. 한참을 현관 앞에서 생각 속에 그렇게 젖어 있었던가 보다. “구미 후배들은 잘 만나고 온 거야? ... 근데 안색이 왜 그렇게 창백해?” 아무런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고 말도 되어 나오지 않았다.
별 잔소리가 없는 성격의 낙천주의자인 아내는 명랑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 .... ” “기분 안 좋은 일 있었어? 저녁 차려 뒀으니 시장 하면 먹어..” 윤희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장난스럽게 내 가슴을 툭툭 치고는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조금 살 것 같다. 비록 같은 공간에 있어도 시야에서 보이지 않으니 한결 틈이 생긴 것 같아 숨통이 트인다. 틈, 그 틈이란 간격이 얼마나 될까? 물리적인 간격의 틈과 심리적인 간격의 틈은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실감 하였다. 윤희와 나사이의 틈 속마저도 은주의 영상과 여운이 완벽하게 차지 해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후, 구미 행 버스에 다시 혼돈에 쌓인 몸과 영혼을 의탁하고 길을 떠났다. ‘아저씨, 난 아저씨를 바라보면 마치 새벽의 샛별을 보는 기분이야. 아저씨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나도 빛이 나는 것 같아.. 그런데 아저씨가 내 곁을 떠나고 나면 난 늘 어둠에 둘러 쌓이는 것 같거든..그것이 힘들어.. ’ 은주가 이별을 결심 하던 날, 레스토랑 ‘귀천’에서 고개를 숙이고 식사를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은주의 말 이었다. 나는 지난 번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의 꿈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마치 별을 보는 것 같다고 느꼈었는데, 우린 서로에게서 별을 본 것이다. 별, 별은 스스로 빛을 발한다. 세상과 우리는 그 빛으로 생존 해 가는 것이다.
터미널 마당에 내려서 첫 번째로 바라보이는 것이 은주가 있을 구미 보건소의 배경이 되어 주는 금오산이었다. 오늘 따라 금오산의 드러누운 귀인의 상이 무척 무겁고 암울 해보이기 까지 했다. 마음이 바빠 택시를 타고 보건소 앞까지 갔다. 급한 마음으로 서둘렀지만 걸음은 마음을 따라 주지 않았다. 반쯤은 혼이 빠져 나간 나의 모습, 혼돈에 비틀거리는 나의 걸음은 깊은 절망이 묻어나는 듯했다. 로비에서 신입인 듯한 간호사에게 이 은주 씨를 찾아 왔노라 설명을 했다. “저.. 이 주임님 5일전에 사표를 내고 지금은 서울 어느 선교 단체에 합류 하셨어요. 아프리카 어느 지역 의료 봉사단에 지원 하셨는데 급히 일이 진행 되고 있는 듯해요.. 아마 출국 하셨을 지도 모르겠어요.” “어느 선교단체인가요? 어느 나라로 간다고 하던가요? ...”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체면 불구하고 질문을 토해냈다. “그렇게 구체적인 것 까지는 말을 아끼셨어요.. 그래서 저희 직원들도 아쉬웠지만 이 주임님께서 도착해서 안정 되면 다시 연락을 주신다고만 하셔서... 더 이상은..” 갑자기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 나가는 듯.. 절망을 담고 예견을 하고 왔지만 막상 맞닥뜨리니 곤혹스러웠다. 너무 슬퍼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쏟아지는 후회와 아쉬움, 그리움의 눈물이 주체 되지를 않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넋을 놓은 채 벽에 기대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저..혹시 이 인성 씨 인가요?” 당황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시선을 돌렸다. 나이가 약간 있어 보이는 이곳의 중간 책임자 정도 되어 보이는 간호사였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이 인성입니다.” “다름 아니라 이 주임이 떠나며 남긴 편지가 있습니다. 이 인성 씨 가 꼭 올 것이라며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아! 감사합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순간 마음속에 희망을 느꼈다. 편지를 받아 들고 보건소 앞 작은 공원 벤치로 무거웠지만 실날 같은 희망을 안고 걸어 나왔다. 줄곧 뒤에서 간호사들의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편지에는 익숙한 은주의 에쁘고 반듯한 필체가 내게 소곤 거리 듯 씌어져 있었다.
‘달과 별은 달라 넌 별을 닮았어. 별은 스스로 빛날 수 있지만 달은 그렇지 않아 어찌 보면 달은 내 모습 같아 네가 있어야만 밝아 질수 있거든 스스로 빛나는 이는 꿈이 있어 꿈꾸지 못하는 이는 달의 모습이야 난 네가 있어야 그 빛을 받아 꿈을 가질 수 있어 넌 그러니까 나의 빛이고 꿈이야 넌 별이고 난 달이야... 인성 씨 당신을 무척 그리워 할 것 같아요. 하지만 난 이 길을 택했어요. 난 떠나지만 당신을 고스란히 품고 가요. 당신의 그 별빛을 고이 간직하며 열심히 살 거니까. 당신도 안정을 하고 잘살아 줘요. 먼 후일 우리들의 추상 속에 분명히 빛바래지 않은 사랑과 그리움이 또렷이 떠오르리라 믿어요. 그럼..안녕..’
짧은 글이었지만 은주의 그동안의 모든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아저씨라고 하지 않았다. 당신이라고 불렀다. 은주와 나는 일정한 거리의 간격을 유지한 채 숨이 차오르는 그리움을 삭이며 5년이란 시간을 함께 지냈었다. 이제 또 그 거리를 그녀가 새롭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최선의 사랑법이였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녀의 오롯이 한길의 사랑... 우리는 서로에게 별이고 달이였다. 그 이후, 늦가을 오리온성좌가 나타날 때쯤이면 아르테미스와 오리온의 비극적인 사랑의 무게만큼이나 나는 심한 몸살을 앓았다. 오랜 세월 동안 그녀를 추상하며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20년 남짓한 세월이 흘렀다. 일상의 평온이 흐르는 저녁시간 자연스레 거실에 앉아 티비를 켰다. 티비에서 해외 봉사자들의 생활이 다큐멘터리로 방영이 되고 있었는데 아프리카의 한 나라인 '가나 의료 봉사자들의 일상'이 소개 되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의 우아했던 여인, 그리고 아들이라고 함께 소개된 유난히 눈길이 가는 인상의 젊은이가 순간 시야를 고정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