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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푸의 여행 Nov 15. 2018

일상 이야기1

커피

쌉싸한 탄맛이 혓바닥 깊숙히 파고들어 꼭꼭숨은 신경을 건드린다.

두꺼운 혀 근육 속 여린 신경이 놀라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느슨한 감정이 전해진다.

에트오피아라고 하자. 베트남이 됬던, 남미 어디가 됬던, 어디서 왔던 내 입장에선 거기가 거기 아닌가?

멀기도 멀지만, 쪼그라든 늙은 노인의 손일지, 꼬장꼬장한 농부의 손일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가난한 농부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그들을 시작으로 많은 손을 거쳐 도착한 목적지가 내 혓바닥이다.

한반도 내륙 깊은 곳에서 태생한 내 유전자에는 커피를 경험한 적이 없을 것이다. 경험한지 이십수년이라하더라도 고등생물이 유전자에 정보를 담기는 쉽지않다.

그래서 정보없는 이 쓴 물질이 들어오면 온 몸이 바쁘다. 몸이 받아들이는 첫 정보망 오각중에 미각은 가장 예민하고 방어에 취약하며 제일 많은 신경망을 가지고 있으니 전신이 반응하는 것이다. 이 맛에 대한 대응 메뉴얼이 없으니 위는 일단 위산을 과분비하여 적일지도 모를 이놈을 녹여죽일 공격을 펼친다.

커피라고 가만 있으랴.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있을진데!

그렇다. 커피를 왜 악마에 비유했을까?

그는 뇌를 정복한다. 이는 무식한 내 위처럼 단순 공격을 하지 않는다. 그저 뇌를 살살 감싸 안는다. 종교적인 사랑으로 말이다.

패배의 쓰라림, 그것이 바로 위(胃)의 쓰라림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자학, 마조히즘과 비슷한 고통의 희열로 서서히 착각해간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커피나무는 이렇게 살아 남았다. 비록 종자는 뜨거운 불에 타 생명을 잃지만, 그 대단하다는 인간의 숭배를 받으며 지구 곳곳에서 대접받으며 종을 확장하고 있다. 드릴촉의 씨앗을 만드는 국화쥐손이, 불타야 싹을 틔우는 자이언트세콰이어, 심지어 스스로 불을 붙여 숲을 태워버리는 시스투스도 커피의 생존전략엔 한수 아래지 않은가?


아직도 이는 거부감이 들면서도 어느듯 손에 들려져 있다. 얼마나 많은 곳에 터를 잡고 있는지 오늘은 햄버거집에서 모셔왔다. 근데 의외로 몸의 거부감이 덜하다. 내 유전자가 드디어 받아들인걸까? 아님 포기를 한걸까? 그것도 아님, 내 몸에 싼(싸구려) 맛의 유전자가  있는 걸까?

뭐가 됬던, 위(胃)야! 이제 바보짓좀 그만해주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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