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수다쟁이였던것 같다. 얼마나 말을 많이 했냐면, 어렸을적 말이 너무 많아 짜증이 난 엄마한테 혼나기까지 했단다. 그냥 재밌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엉뚱하면서도 페이스를 잃지 않는 개그를 치는 일이 즐거웠다. 어느날 갑자기 우울이 찾아왔다. 더 이상 사람들과 이야기하는것이 행복하지 않았다. 개그를 치면 결국 내가 바보가 될 뿐이었다. 그래도 행복하지 않음을 들키지 않으려면 바보가 되는게 편했다. 우울은 더 커지고 나는 더 우스운 바보가 됐다. 예민하면서도 바보 같은 나였다. 점점 말이 줄었다. 속내를 이야기 하면 후회가 커져 말수는 줄어갔고 어느샌가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친구들의 사소하거나 중대한 비밀 같은것들, 정말로 비밀로 해야하는 얘기들이 내게 들어왔고 자연스레 나는 입을 닫게 되었다.
어느날 꿈을 꿨다. 입이 없어졌다. 눈 코 귀는 전부 다 멀쩡한데 입만 없어진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답답하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이제 네 얘기를 해봐" 라고 해도 말할 수 있는 입이 없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내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좋은 꿈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실컷 하다가도 상대방이 얘기 없이 듣기만 하면 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듣기만 하고 내 얘기는 꺼내지 않는게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을때쯤 아주 오래된 친구로부터 "나는 니가 무슨 사람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라는 얘기를 들었다. 적잖이 아픈 상처가 됐다. 그 뒤로 나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상대방의 말 사이사이 꺼내도 좋을 법한 이야기들을 채워 넣는다. 아무래도 좋을 말들, 혹은 너라서 하는 말인데-로 시작하는, 사실은 모두에게 했던 이야깃거리로 쓰기 좋을 법한 어린 시절의 크고 작은 불행들. 사람은 불행을 교환하며 친밀감을 상승시키는 것 같다. 그동안 난 나의 불행이 너무 크고 버거워서 얘기를 꺼내지 못했는데 거대한 불행의 잔가지쯤은 얘기해도 나쁘지 않았다. 나누어도 좋을 불행은 내게도 있었다.
입이 점점 줄어드는 일은 그렇게 중단됐다. 그렇지만 언젠가 내 입은 없어질거라고 생각한다. 굳게 믿고 있다. 말할 수 있는 잔가지들이 전부 다 떨어지면 그때에는 정말 할 말이 없어질테고 쓸 일 없는 입은 점점 작아져 결국 사라질것이다. 입은 있는데 속에 있는 말을 하지 못 하는것보다는 애초에 입이 없어서 아무말도 안하는 사람이 훨씬 행복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