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병 관련된 얘기만 쓰는것 같아 다른 주제를 말하고 싶지만 어째 이거만큼 손이 가는 이야깃거리가 없다. 약. 우울. 불안. 장애. 약 먹는 일이 일상생활에서 이제 뺄래야 뺄 수 없는 일과가 되어버렸기에, 그리고 자연적으로 동병을 앓는 사람에게 관심이 가기도 한다. 심지어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은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덕분에 병증이 최악이었던 2019년을 이따금 떠올리게 된다. 다행히 살아남았구나. 그때에 비하면 정말 엄청 많이 좋아졌구나. 실감이 난다.
언젠가 우연히 본 짧은 영화 한 장면이 있다. 제목은 여전히 모르고, 내용은 대략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 떨어져 살다가 오랜만에 모여 식사를 한다. 가족들은 불화가 깊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존경해 마지않는 메릴 스트립이 주인공인듯 했는데 각자 돌아가며 상대방을 힐난하는 자리에서 딸은 엄마 역할인 메릴 스트립에게 “그러는 엄마는 신경 안정제 중독이잖아!!!!”라고 소리친다. 메릴은 거기에 반박하려다가 한숨을 쉬며 인정한다. 그래, 나 신경안정제에 중독됐다고. 사뭇 놀랐다. 미국에선 신경 안정제 중독을 마약이나 알콜 중독처럼 생각 하는가? 그렇다면 나도 다를게 없었다. 당장 상비약이 없으면 괜찮던 정신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어딜가든 최소 세 봉지 이상 갖고 다녀야하고 왠지 먹어야 될거 같은 이상한 순간이 생기면 몇봉지든 털어먹어야 기분이 나아진다. 공황이 올 거 같은 기분이 있는데 그 전에 얼른 약을 털어 넣어야 안정을 취할 수 있다. 어느날은 집을 떠나 며칠을 밖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순간 왼쪽 손목에 늘 차고 다니던 시계가 없음을 깨닫고 미칠듯한 불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손목 시계가 없다고 생명에 지장이 있는가? 아니다. 일상 생활이 불편한가? 아니다. 뭔가 일에 차질이 생기는가? 전혀 아니다. 그러나 외출할때쯤이면 느껴야 할 왼쪽 손목의 무게감에 대한 부재가 커다란 불안으로 찾아왔다. 모두에게 민폐를 끼치고 다시 돌아가서 시계를 갖고 올것인가? 민폐를 끼치는것과 불안함. 둘 다 내게 제일 큰 타격을 주는 감정들이어서 이것이야말로 누구도 뚫을수 없는 방패와 모든것을 베어버릴수 있는 칼의 싸움이었다. 차 안에서 5분정도 패닉이 찾아왔다. 울고 싶었다. 다행히 가방 앞주머니를 미친듯이 뒤졌더니 약봉지가 꾸겨진채로 그곳에 잘, 있었다. 신경 안정제를 제한된 용량 이상으로 털어넣었다.시계 대신 약을 먹음으로서 불안과 공황을 막아냈다.
내가 먹는 약들은 수면제와 우울증약, 불안을 잠재우는 약, 나의 예민함을 진정시켜 주는약 등등이다. 아침엔 두 알을 먹지만 자기전엔 적게는 다섯개 많으면 아홉개에서 열 한 개 사이의 약을 적당히, 알아서 복용한다. (그만큼 내가 약의 용량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으며 이것은 그나마 상태가 나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치의의 신뢰를 바탕으로 뱓은 처방전이기 때문이다.) 그 중 수면제 중에서는 나를 빨리 잠 재우는 약과 내가 중간에 깨지 않게 도와주는 약 그리고 수면을 오랜 시간 유지 시켜주는 약도 있다. 불안장애 약들은 이러저러한 작용과 부작용을 동반하는데, 오랜 기간 주치의와 약을 맞춰간 끝에 내게 잘 듣는 약들을 여러번 수정한 결과 큰 불편 없이 정해진 약과 정해진 용량의 약을 복용하고 있다.
문제는 비상약이다. 90일치를 한꺼번에 처방 받기 때문에 내게 하루 세 번 먹을 수 있는 인데놀과 자나팜이 넘쳐나게 주어진다. 자나팜 같은 경우는 매우 적은 용량에 속해서 몇 알이고 먹어도 괜찮을거 같다. 물론 내 간은 괜찮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하루 세 번, 인데놀까지 합쳐서 90일치면 540알이다. 하얀 플라스틱병에 작은 알약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것만 봐도 마음이 편해진다. 습관적으로 비상약을 먹곤 한다. 이렇게 되면 비상약은 비상약이 아니다. 그렇다. 이건 중독이다. 약이 가까이 있어야 하고 약이 없으면 불안하고 불안하면 약을 먹는다. 넘치는 약들 덕에 오남용이 일상이 되었다. 하루에 열 알씩, 스무알씩 먹고 구토를 하거나 비정상적인 상태에 들어서기도 한다. 이제서야 영화 속 메릴 스트립의 상태를 이해한다. 신경안정제? 그게 뭐라고! 에서 신경 안정제 중독은 충분히 인간에게 위협적인 상황을 유발한다, 나는 아직 나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을만큼 나아지지 않았다, 주치의는 틀렸다 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10개 혹은 20개씩 비상약을 털어넣는건 사실상 자해에 가깝다. 당연지사 간이나 위에 좋지도 않을뿐더러 정신상태를 온전히 유지하기도 힘들다. 막말로 헤롱대거나 혹은 약에 취해 의도치 않은 사고를 치고 기억을 잃은 채 잠이 든다. 무엇에도 휘둘리고 싶지 않아 하는 내가 제일 끔찍해하는 상황에 처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안정제는 아직까지는 내게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이것이 마약 중독자 혹은 알콜 중독자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약이 없으면 불안하고 미칠것 같은 기분이 들며 난처한 상황이 곧 내게 들이 닥칠것만 같다. 나는 그게 무섭다. 내가 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저 내 기분에 빠져 사회를 등지는 것이. 모두가 약속한 룰을 어기는 것이. 그리고 결국 정신을 놓아버린채 소리를 지르며 길거리를 배회하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서 뱅뱅 맴도는것. 어쩌면 예견된 공포를 억누르며 차라리 다 내려 놓고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을 선택한다. 그게 신경 안정제가 내게 주는 위안이다.
잘못된건가? 메릴 스트립이 후, 맞아 나 신경안정제 중독이야. 라고 인정하며 마치 패잔병처럼 잘못을 시인하는 상황 그리고 내가 의지하는 자나팜과 인데놀. 이것들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존재인가? 나는 어쩌면 간경화로 죽게 되는건가? 그런데 간경화를 걱정할 새도 없이 오늘을 안전하게 또한 무리 없이 보내는게 내겐 더 위급한 현실이다. 그래도 신경안정제가 그렇게 위험한가? 정병러끼리 말하는건데 보라색 자나팜을 먹지 않은 자, 아직 정병에 대해 왈가왈부 할 자격이 없다, 라고 한다. 다행히 나는 보라색까지 가지 않았지만 자나팜은 언제쯤 내 삶에서 지울수 있을까. 지워야 하는가? 어쩌면 평생 가까운 이웃처럼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미국 영화에서 나오는 약 중독자처럼 그렇게 보일까 내가?
내 인생에서 나 자신을 온전케 하는 중요한 의지 중 하나는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것이다. 그런데 이미 글러먹은것 같다. 내 뒤에 자리 잡은 신경 안정제가 나를 이렇게나 안심 시키는것, 이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생체 반응이다. 인데놀과 자나팜이 곁에 있지 않으면, 그것들이 내 주변에 없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먹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르겠다. 미국의, 그 영화 속 메릴스트립이 사는 곳의 법이 어떠한지. 최소한 신경 안정제 만큼은 마음껏 먹게 해주라. 잠을 자든 술을 먹든 약을 먹든 태어난 것이 슬픈 사람은 그 중 하나 정도는 필요하니까. 필요하지 않게 되는 날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럴 수 없다는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니까. 봐봐. 자기연민을 그렇게 증오하면서도 여기에 구구절절 쓰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한 변호와 자기 방어. 신경안정제 중독의 전형적인 반응 아닐까.
최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