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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별 Feb 20. 2022

괴로움의 한도 설정은 각자의 자유




카드값과 신용도에 대해 일장연설을 해대던 시절이 있었으나 나 역시 카드값에 허덕이며 이번달의 나의 소비를 다음 달에 존재할 미래의 나에게 전가하는 흔한 양태를 보였으니 나의 일장연설은 하등 보잘것 없이 무용한 말이 되어 허공을 떠돌았다고 할수 있겠다.



카드값엔 분명 한도가 있다. 대출에도, 님이 긁고 다니는 카드에도 우리가 갚을만하리라고 생각되어 은행에서 책정한 그 것. 사실 카드 긁는걸 남발하고 대충 어떻게 다니면 저기요, 한도 좀 늘려주세요, 했을 때 무사히 먹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건 그때 잠시 뿐. 막아야하는것도 나, 쓴 것도 나, 이번달의 사용자도 나, 다음달에 갚아야 할 것도 나. 영혼을 끌어모아 이번 달 카드값을 막아본들 다음달의 미지의 혼을 빌려 끌어다 쓴 카드값을 막아야 하는것 또한 다음달의 나다.



여러분의 카드 한도 혹은 대출 한도는 내가 모르겠으나 괴로움의 한도는 사람마다 비슷하지 싶다. 그와중에도 심장이 무던하여 좀 더 버틸 수 있는 사람, 혹은 여리여리한 개복치 같은 마음으로 하루도 버텨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람이고, 사람은 각자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을 수반하고, 그 고통은 사람마다 각자 알맞게 닥쳐온다. 라는 것이  이때껏 쌓은 경험치에 기반한 이론이다.

그러므로 형제보다 용돈을 50만원 덜 받는 사람의 고통과 내일 먹을 끼니를 걱정해야 할 사람의 고통이 크게 다르지 않을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자율 신경계 검사 결과를 통해 평균에 비해 훨씬 더 고통에 예민하고 신체에 가하는 고통의 정도가 높으며 거기에 따른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도는 현저히 낮으므로, 뭐랄까, 되게 개복치고 아이고 나 죽는다 하면서 진짜 생사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인것이었다. 그야말로 스트레스에 있어 최약체 인간이다.



니가 괴로우면 내가 괴롭고 내가 괴로워도 내가 괴롭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발발할것 같으면 근육통을 앓는, 어딘가 이상한 사람인것이다. 매일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무엇이 선인가 혹은 선에 가까운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란 사람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뭔가 아이고 아무것도 없구나 하며 더 큰 근육통을 앓고 아이고 나는 타이레놀을 먹는것도 사치다, 숨을 못 쉬겠다, 공황이 왔네, 그런데 무슨 약을 먹지 평상시에 하도 비상약을 먹어대서 인데놀이나 자나팜을 도합 열여섯개를 삼켜도 잠 자고 일어나면 그 뿐. 해결되는건 하나도 없는데 약을 먹어서 무얼한담. 이게 나다. 이 막되먹은 글을 읽는 사람들중에 이 부분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이 계신가요? 그러면 당근을 흔들어 주세요. 도대체 어떻게 살고 계신가요. 세상에 내딛는 발걸음 한 자국 한 자국이 다 맨 살을 드러내며 상처를 기다리는 사람 같아요.



표피가 벗겨진 살에 바람이 닿으면 아프겠죠. 바람은 자연스레 불어오는건데도 저는 괴로울거에요.하지만 표피는 제가 벗긴것도, 다른 사람이 벗긴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제가 태어난거에요 혹은 자라다보니 그렇게 된거에요.

이쯤에서 저는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요? 나 자신? 나를 자라게 한 사람? 토끼? 당근? 잘 모르겠어요. 얼만큼 괴로워해도 되는지, 그 괴로움중 얼만큼의 고통을 타인에게 말해도 되는지 저는 배운적이 없어요. 알려준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한도가 없어요.



저를 낳고 순간 순간 케어해준 여자분이 말했어요. 왜 너는 아플때 아프다고 말하지 않느냐고. 그래서 생각해봤어요. 음 근데 저는 아플때 아프다고 말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던 거에요. 아프면 혼자 택시를 타고 응급실을 갔지, 어디에 전화를 하고 내가 아프다 이렇게 말한다 해도 어차피 응급실에 가야하는건 똑같잖아요. 그러니 아무데도 말 안하고 겨우겨우 옷을 챙겨입고 택시를 부르고 익숙한 병원의 응급실에 접수를 하고 기다리는거에요. 거기서 긁는 카드도 내 명의, 긁었다고 문자 오는것도 내 핸드폰.



사실 다 이렇게 살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언제부터 혼잣말에서 존댓말로 바뀌었는진 모르겠지만 님들의 동의를 얻고자 하는걸 보면 꽤나 의식적으로 어떤 프로파간다를 외치고 싶은걸지도 몰라요. 혼자는 외로우니까 다같이 외롭다고 설쳐대면 어떨까, 그런걸지도.

그래서말이죠. 사람들은 어느정도 괴로웠을때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할까요? 카드값처럼 그런것도 한도가 정해지면 좋겠어요. 박별씨, 이만큼은 혼자 감당하시고요, 그 이상 한도가 넘어갈땐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세요. 이런 말을 해주는 카드사가 있을까요? 없겠쥬…

그런다고 고통을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옛말을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설마,  그거 혹시 님이세요? 제가 해봤는데요 고통을 나누면 절반이 아니라 두 배가 되더라구요. 그래서 닥치고 있는게 제일이었어요. 무슨 상황이되든 닥치고 있자. 닥치는게 최고다. 그래서 저는 점점 입이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것 같아요.



부디 이런 쓰레기 똥통같은 상황에서 야 너 개 틀렸어 그거 아니야 완전 잘못됐어 정신차려 뭔 개소리야 그 나이 먹고 그거밖에 생각 못하냐 라고 말해줄 친구들이 있다면 정말 좋을것 같아요. 그런데 각자의 괴로움의 한도 내에서 다들 최대한의 괴로움을 겪고 있는데 누가 저한테 그렇게 말을 해줄수 있겠어요. 만약 그렇게 말해주는 친구가 있다고 한들 저를 위한 긍정의 말을 해주기 위해 그들의 고통의 한도를 늘렸겠지, 라고 생각할것 같아요.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말도 희망에 닿을수가 없어요. 희망이란 것의 파편의 파편조차 우주 저 멀리, 내 것이 아닌것처럼 느껴지니까 저는 지금 당장 고통 말고는 표현 할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네요.



한참을 울었어요. 이제는 우는것에도 인이 베겨서 울다가 물 마시고 코 풀고 그럼 더 울 수 있거든요. 사실 체내 수분 유지의 문제 같아요. 그러니까 눈물 콧물 흘리고 다시 물을 마시고 그럼 더 울수 있고 그러다 지치면 물을 마시고 그러다 다시 울고.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결국 제가 하고 싶은말은 선생님, 저는 지금 몹시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선생님들의 기준에 한도를 꽉 채웠거나 혹은 한도를 벗어난 고통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범위 안에서는 한도의 한참 아래를 웃도는 고통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누가 결정합니까. 아마도 각자의 몫이겠지요. 버틸수 있을만큼의 고통. 자유라는 이름의 책임. 카드값이랑 똑같이요. 이번 달 카드값을 갚는것도 나 자신. 지금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것도 나 자신. 둘이 될 순 없어요. 알고 있죠. 그게 전부 다 나에요.



이런 비참한 얘기 미안해요. 너무 너무 너무 괴로워서 고통이 삐져나왔어요. 나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런것도 나니까. 생각보다 한도가 낮네요. 더 한것도 버틸 줄 알았는데. 여러모로 몹시나 혼란스러운 요즘이에요. 아무래도 속세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로 돌아가야 할것 같은데 그러다간 돌아오지 못할것 같아서 여차저차 망설이고 있는 요즘입니다. 님들은요, 이런, 뭐랄까 계속 되는 무기력함에서 잘들, 지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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