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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r 05. 2024

한 알의 약에 기대어

불안하지 않은 일상을 위해서라면

아들과 병원에 가는 날이다. 퇴직하고부터 진료일에 동행하고 있다. 그동안 못했던 '엄마 노릇'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최근 약을 감량하면서 증상이 나빠졌기 때문이고, 담당교수와의 면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가 온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다. 버스를 타고 세브란스 병원 동쪽문으로 들어선다. 병원은 올 때마다 별로다. 들어서자마자 피곤이 몰려온다. 아들과 5층 진료실 앞에서 만났다. 그는 이미 채혈을 하고 올라왔다. 한 달에 한번 아들은 채혈을 해서 상태를 확인하고 인베가 주사를 맞아야 한다.   

   

지루한 대기 시간이 끝나고 담당교수를 만났다. 오랫동안 아들을 담당하던 교수가 퇴직하면서 병원을 집 가까운 세브란스로 옮겼다. 이젠 아들이 혼자 병원에 다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앞으로도 평생 동안 병원에 다녀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라지고 나서도 병원에 다녀야 하기 때문에, 아이는 하나씩 자립을 해야 한다. 그리고 서울대병원의 약물 중심 치료에서 세브란스의 약물치료와 인지행동치료를 병행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번에 만난 담당의사는 부드럽다. 유머 감각도 있고, 아들의 말에 귀 기울인다. ‘규.칙.생.활’을 이마에 쓰고 지내라며 제스처를 한다. 아들도 웃고, 나도 웃는다.      


이번 진료에서는 주로 불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2주 전에 처방한 비상약, 자낙스가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의사는 그렇다면 비상약으로 먹지 말고, 항상 먹자고 제안한다. 자낙스 보다 효과 있는 리보트릴로 바꾸자고. 아들은 원래 리보트릴을 먹고 있었다. 오래 잠자는 게 힘들다고 했더니 감량을 해보자고 했던 것이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자낙스 보다 리보트릴을 권하는 이유는 환청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란다. 환청 때문에 불안이 오는 거라고.    

  

불안만 조정되면 아이는 잘 지낼 것이다. 우리는 리보트릴에 다시 기대어 본다. 불안하지 않은 일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꼼짝달싹 할 수 없는 불안에서 놓여난다면 살만할 것이다.      


오늘 아침, 아들은 일어나지 못한다. 졸음이 부작용인 리보트릴 때문이다. 적응하려면 또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일주일? 이주일? 오늘은 일본어학원에 가지 않기로 한다. 지금은 잠이 더 소중하기 때문.    

  

인간의 몸은, 인간의 뇌는 이렇게 유약하다. 약 한 알에 불안을 의탁한다. 불안에 사로잡혀서 사는 것은 고통이다. 그 고통에서 리보트릴이 그를 구원해 주길 바란다.           


* 리보트릴 : 운동신경의 과도한 신경전달 반응을 억제하는 약. 발작, 공황장애, 근육경련성 질환, 수면장애 등의 치료, 편두통 예방, 구강작열감 완화 등에 사용함. 졸음, 주의력 결핍, 어지러움, 시야몽롱, 입마름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음. 주성분 Clonazepam 0.5mg



2023.11.17. 일기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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