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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맘 Aug 13. 2021

4.월 300을 버리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도비는 자유예요.

 퇴직 상담의 운을 띄울 그날,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보폭으로 힘차게 출근하고 있었다. 당시 출근길의 매서운 바람과 얼어붙은 빙판길은 평소와 달랐다. 아무리 얌전하게 걸으려 해도 넘치는 에너지가 투스텝으로 방출되는 내 모습 자체가 너무 웃기기도 하고 행복하여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월 300 이상 버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니?

 잠깐이라도 행복했던 출근시간 뒤로, 꼿꼿하던 사직 욕구를 가장 뒤흔든 말이었다. ‘월 삼백’. 현실이 그랬다. 면허는 간호사 면허 하나... 한창 이것저것 찔러보다 결국 다시 돈 벌러 병원으로 가진 않을까 두려웠다.(사실 지금 그렇다.) 그러나 월 300을 버리는 대신 월 300시간이 생긴다. 내 모습을 빼앗고 있는 회사로부터 마음이 떠나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해서든 돈은 벌 수 있을 것 같았고 더 많아진 내 시간을 행복하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퇴사 날짜를 받고 도망치듯 나온 세상으로부터 얻은 자유로움이 한동안 나를 황홀하게 했다.


 《나를 바꿀 자유》의 저자 김민기 작가는 ‘꿈은 욕구 이전에 지식’이라고 하더라. 겨우 얻은 추가 월 300시간! 그렇게 인생의 제2막을 준비하는 기간에는 무엇보다도 나를 잘 살펴봐야 했다. 나를 잘 몰랐던 탓에 아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처럼 엉뚱하게 보내는 시간을 또 흘려보내서는 안 되었다. 세상의 다양한 지식을 위해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고 그 경험을 통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에 대하여 다시 알고 싶었다. 생소한 과일 두리안을 먹어봐야 과연 그것이 내 취향 일지 아닐지 알고, 하루 종일 음식 냄새를 맡아봐야 내가 진짜 음식 만드는 일이 좋은지 어떤지를 안다.


 그래서 모아두었던 돈과 더 들어온 퇴직금으로 오로지 나에게 투자하기 시작했다. 프리랜서가 하나씩 가지고 다니는 가벼운 노트북부터 장만했다. 그동안 함께하지 못했던 엄마와 여행도 다니고, 배우고 싶던 것도 배웠다. 춤, 서핑, 스피킹, 베이킹.... 내가 서비스업을 했던 덕분에 혹시나 다른 서비스 교육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cs 교육 자격증도 땄다. 닥치는 대로 하고 싶던 것은 다 해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점점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즐겁든 괴롭든 내 눈앞엔 누군가 세워놓은 깃발이 있었고, 그곳에 도달하면 잠깐이라도 꿀 같은 휴식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깃발을 세울 누군가도 없었고 그러니 어디로 걸어야 할지 막막한 느낌이었다. 당연히 두서없이 시간을 보내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결국 드라마틱한 반전도 없었다. 마치 끓는점으로 도달할 때까지 미동 없는 물주전자 같았다.     


 하지만 이 같은 불안감이 들 때마다 조금씩 잠재워 주던 위로의 약은 책이었다. 아빠는 내가 퇴사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스물아홉, 직장으로부터 행군하다>라는 책을 거실 테이블에 올려 둬 주셨다. 별생각 없이 소파에 누워 스륵 책장을 넘기다 그 자리에서 한 권을 다 읽은 나는 그 이후 무작정 책을 가지고 다녔다.


 사실 3교대를 했던 나에게 책 읽는 시간은 사치였다. 역량에 맞지 않은 곳에서 억눌릴 수밖에 없었던 나는 차라리 나다운 에너지를 방출할 자극적인 활동이 필요했다. 격한 운동이나 감성 주점에서 신나게 춤추며 보내는 시간만 해도 빠듯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시간 대비 높은 강도로 주어진 휴무를 해치울 필요가 없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휴무일을 뒤로한 채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다시 돌아오는 것은 날마다 느긋한 휴일이었으니 말이다. 월 300을 벌지 못해도 그 덕에 생긴 시간을 통해 책을 읽다 보니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케어 하고 싶은 일들이 생각보다 많아지더라. 월급을 위해 밖으로만 보고 달리던 삶에서 다시 삶의 중심인 나를 보게 되고, 그로부터 반경을 넓혀 주변, 그리고 내가 아우를 시간까지 다시 살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이리저리 휘둘려 멍든 ‘몸’이 보인다. 3교대를 하며 점차 불균형해진 내 몸. 남들처럼 살이 급격히 찌거나 빠지고, 소화불량이 생기며, 뚜렷한 병이 생겨 치료를 받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였을까, 엄살을 부리지 못하는 튼튼한 내 몸 덕에 멈추고 쉬어야 할 시기를 놓쳤을 수도 있었겠다. 딱 병들지 않을 만큼만 내 몸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더 생생하고 활기 넘쳤을지도 모를 컨디션을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저히 부족해진 회복탄력성을 살려야 했다. 그래서 앞으로의 굴곡에도 금방 컨디션을 되찾을 역량을 가지고 싶어 진다.     


 몸을 회복하다 보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투’도 선명히 들리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서비스업을 했기 때문에 상냥한 말씨가 배어있었을까? 전혀 아니다. 짧은 시간 속에서 끝없이 요구해오는 많은 일들을 재빨리 쳐내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일터를 벗어난 일상에서도 내 말투는 탁탁 끊겼고 예민함의 극을 달리며 콕콕 찔렀다. “아우 지겨워.”라는 말은 유행어인 듯 내 입을 떠날 날이 없었다. 그동안 이런 부정적인 말들이 내 일상을 지배했으니 얼마나 많은 긍정적 일들이 튕겨져 나갔을까? 갑자기 억울하고 속상해졌다. 긍정적인 생각이 말이 되고, 그 말들이 환경을 만든다 하니 이젠 언어 선택도 신중하려 노력했다. 휴식의 환경 속에 있으니 여유로운 생각과 말하기도 쉽다.     


 말투와 함께 급했던 ‘행동’들도 보인다. 시간에 쫓겨 급하게 끝내려고만 해서, 또는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생활하다 보면 행동은 급해진다. 그냥 빠르게만 지나가는 내 삶도 아까운데 나 자신을 챙길 틈도 없이 남에게 휘둘리기만 하니 당연히 의욕이 나지 않는다.  결국 태도의 개선 욕구가 생긴다. 그냥 아귀가 맞으면 열심히만 굴러가는 톱니바퀴 같은 행동을 거부하고 싶어 진다. 일상이 어지럽게 돌아간다 싶으면 잠시 멈춰 뒤돌아보며 무엇을 위해 이 시간을 보내고 왜 이리 급히 행동하는지 따져보게 되었다.      


 그렇게 나에 대한 사색이 어느 정도 진행되다 보면 내가 마치 눈의 양 옆을 가리고 앞만 보며 달리는 경주마였음을 알게 된다. 얼마나 빨리, 얼마나 눈앞에만 보이는 목표를 바라보며 달렸는지, 눈가리개를 벗고 나니 아찔할 정도다. 생각지도 못한 많은 주변 환경들이 나와 소통하려 했음을 깨달으며 주변을 둘러볼수록 놀랍기도, 아쉽기도, 고맙기도 할 것이다.


 나는 특히 항상 나를 생각하고 더 챙겨주지 못해 미안해하며 걱정하는 가족들을 살피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이 아쉬웠다. 내가 조급하고 불안하던 때는 가족의 그런 모습들이 그저 잔소리 같고 괜한 참견 같아 거부하고 쏘아붙였다. 같은 상황을 겪지 않는 이상 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다른 지인들과 마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그들이 틀리고, 나쁘고, 덜 생각해서 그렇다고 깎아내렸다. 괜한 열등감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틀렸던 것이었다.


 그들은 그저 추구하는 가치가 나와 다를 뿐이고 서로 그 가치를 따라 행동하기에 충돌했을 뿐이었다. 나와 가치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이 틀렸다 말하며 공격하는 것은 세련되지 못한 일이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여유를 찾게 되니 가족을 비롯한 ‘주변’이 보이는 여유까지 생겼던 것이다.      


 그렇게 주변까지 챙기다 보면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 사색할 역량이 생긴다. 충분히 사색하다 보면 마치 뿌연 안개가 걷히고 투명한 유리구슬이 선명히 빛나듯 또렷하게 보인다. 결국 내가 월 300을 버리고 대신 얻은 시간, 즉 내가 직접 다룰 수 있게 된 ‘시간’까지 가시화되었다. 시간을 가시화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덕에 시간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지하며 활용한다. 그들은 꾸준히 앞으로의 자신의 모습을 그릴 것이다. 이 그림은 앞으로도 무한히 다채로워지고 아름다워질 것이며 그런 작품을 만들 시간 또한 항상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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