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리 Sep 29. 2021

우리는 20년 전과 같지 않을 거야.

아프가니스탄 사태 취재기

안녕, 사랑하는 우리 아가.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요. 잠든 모습이 천사같네. 우리 아가 머리맡에서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오밤중에 노트북을 켰.


오늘 엄마는 한 외교관 아저씨를 만났어. 이 분은 9.11 테러가 일어났던 2001년, 미국의 유엔 본부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분이야. 테러의 현장을 직접 지켜본 경험은 잊을 수 없다고 하더라. 110층짜리 무역센터 빌딩에 테러리스트들이 탈취한 여객기 두 대가 잇따라 들이받은 사상 초유의 사태. 상황이 끝난 뒤에도 파편과 분진이 며칠 동안 가라앉지 않았대. 사람 키보다 훨씬 높은 검은 먼지 구름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고, 그걸 볼 때마다 공포가 엄습했다고 하더라.


출처 : wallpaper safari


뉴욕은 몇 달 동안 유령도시가 됐대. 추가 테러의 우려 때문에 집 밖에 나오는 없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대. 적막한 도로를 지나가는데 유독 한 건물에만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는 거야. 병원이었대. 긴 줄은 헌혈을 하러 온 시민들이었고. 부상자가 많아 혈액이 모자라다는 소식을 듣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집을 나섰던 거지.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인류애가 빛을 발한 순간을 코앞에서 접하니 눈물이 나왔다고 하더라.  


2001년 9월 샌디에이고 혈액은행이 홈페이지에 올린 사진. 단 며칠 만에 4000여 명의 주민들이 혈액을 기부했다고 한다. 미국 전역에서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얼마 전 엄마가 인천 국제공항에 취재 가서 퇴근이 늦었던 날, 기억날까 우리 애기는? 아저씨 얘기를 들으니 그 대 생각이 나더라. 8월 15일 탈레반이 아프간 수도 카불을 점령했고, 우리 정부는 현지의 한국 병원 등에서 일해온 아프간인 400여 명을 구출하는 일명 ‘미라클 작전’을 계획했지. 그냥 두면 탈레반의 핍박을 받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어. 다행히 작전은 성공했단다.  


엄마는 구출된 아프간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을 취재하러 공항에 갔어. 약속된 시간, 수십 명의 취재진이 숨죽인 채 입국장 자동문을 주시했어. 문이 열리고 처음 나온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6살 정도의 남자아이와 그의 부모였어. 이어서 곰인형을 꼭 껴안은 삼 남매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카트를 타고 나왔어. 히잡을 쓴 엄마는 갓난쟁이를 안고 있었어. 쉴 새 없이 카메라 셔터가 터졌어. 아프간인들은 전반적으로 지쳐 보였지만 한편으로 안도하는 느낌도 있었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번에 들어온 가족 중 절반 이상이 어린 아이들이었대. 태어난 지 한 살 도 안된 아가도 3명이나 있었다고 하더라.


인천 국제공항에 들어선 아프간 조력자 가족들.


엄마는 솔직히 이들이 한국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어. 이들은 아프간에 있는 한국 병원이나 직업훈련소에서 수년 일해온 유능한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야. ‘난민’이 아닌 ‘특별공로자’ 신분으로 공식 비자를 받고 한국에 머물게 된 이유도 이 때문이지. 하지만 구출 소식이 전해지자 온라인 커뮤니티나 댓글에선 “극단주의자들을 왜 받아주느냐” 따위의 성토가 이어졌지.


다행히 엄마의 생각은 틀렸어. 우리 사는 세상은 생각보다 따뜻하더라. 충북 진천은 이들이 머물 공간을 기꺼이 내어 주었어. 환영한다는 플래카드를 곳곳에 붙이기도 했어. 이 소식에 감명받은 네티즌들이 “돈쭐 내주자”며 진천 온라인 쇼핑몰에 몰려가 농특산물을 완판 시키기도 했지. 선한 영향력은 댓글창까지 이어지더라.

 

"난민이 되고 싶어 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꼭 아프간이 탈레반으로부터 자유로워져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bmil****)
"애기야 잘 왔다~~ 여긴 평화의 나라 대한민국이다. 커서 너의 꿈을 활짝 펴기 바란다." (3443****)


아프간은 다시 암울했던 탈레반의 공포정치 시절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지구촌 곳곳에선 이렇게 편견과 이기심을 인류애로 극복하는 눈물겨운 장면들이 관찰되고 있단다.  


엄마는 확신하게 됐어. 우리는 20년 전과 같지 않을 거야. 수십 년 간 더뎠지만 희망적이으로 이어졌던 아프간 재건은 공교롭게도 9.11 테러 20주년이 되는 해 물거품 되고 말았지.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온정을 베푸는 DNA는 여전하고, 여기에 성숙한 시민의식까지 보태졌으니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거야.  


사랑하는 우리 아가. 누구나 모든 걸 잃는 상황에 닥칠 수 있어. 그게 내가 될 수도, 우리 이웃이 될 수도 있어. 그때마다 우리 용감하자. 희망을 잃지 말자. 피 한 방울을 십시일반 하기 위해 긴 줄을 섰던 20년 전 뉴욕 시민들처럼. 이슬람이라는 미지의 종교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아프간 사람들을 따스하게 맞아준 우리 국민들처럼. 모든 걸 잃고 낯선 땅에 발을 딛는 그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아프간 아이들처럼.


 



P.S

엄마가 취재를 하면서 특히 가슴이 아팠던 대목이 있었어. 아프간 사람들의 옷차림이 이상할 정도로 깔끔했던 거야. 남자들은 정장에 넥타이까지 맨 경우가 많았어. 몇몇 아이들은 목이 긴 양말부터 재킷까지, 교복을 완벽하게 갖춰 입었더라.  


이들은 탈레반이 장악한 도심을 목숨 걸고 탈출한 사람들이야. 긴박했던 상황들을 떠올리면 신발 한 짝 제대로 신을 여유도 없었을 것 같은데. 손가방 몇 개에 평생의 살림살이를 욱여넣고 보금자리를 황급히 떠나야 했을텐데. 그 와중에 옷차림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이들이 대부분 의사, 교사, 개발자 등 엘리트 직업인이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어. 어쩌면 한국인들의 눈에 비칠 첫 모습을 의식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이슬람에 가져온 오랜 편견과 적대감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목이 메었어. 탈출을 앞두고 옷장에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는 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직까지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네. 서현이가 크면 같이 얘기해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