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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리 Oct 20. 2021

동네 놀이터 수난기

내 아이의 '놀 권리'에 대하여

지난 8월 동네 놀이터가 문을 닫았다. 거리두기 4단계에 들어서면서다. 아기가 좋아하던 미끄럼틀과 시소는 붉은 테이프로 칭칭 감겼다. 안 그래도 놀 곳 부족한 아이들은 정말로 갈 곳이 없어졌다.  


놀이터는 도시의 아이들에게 숨구멍 같은 곳이다. 차와 오토바이가 다니지 않고, 담배 연기가 없는 곳은 도심 속에서 흔치 않다. 마음 놓고 뛸 곳, 소리를 질러도 눈총 받지 않는 곳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놀이터는 적막에 휩싸였다. 그 많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린이 박물관이나 공원 등의 시설도 잠정 폐쇄됐다. 부모들은 넘치는 아이들의 에너지를 발산할 곳을 향해 헤맸다. 조부모 댁으로, 비싼 키즈카페로...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그렇게 모두들 지쳐가던 중, 놀이터가 한 달 만에 열렸다. 확진자 숫자가 연일 최고치를 기록하던 중이었기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구청이 놀이터 초입에 달아놓은 플래카드에서 밝힌 연유는 이랬다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어린이 체력 유지와 건강을 위해
놀이시설을 개방합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한 듯한 글귀였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 아이의 ‘놀 권리’가 마땅히 보장받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재개장한 놀이터엔 한 동안 아이들이 북적였다. 모두 마스크를 쓴 채였다. 야외인 데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들의 특성 덕분에(?) 거리두기는 그럭저럭 유지됐다. 우리 아가도 오랜만에 소리를 지르며 미끄럼틀을 탔다. 집에 와서는 모처럼 단잠에 빠졌다.  


호시절은 딱 한 달 갔다. 이례적인 가을 혹한이 들이닥쳤다. 아이들의 바깥놀이는 다시 요원해졌다. 청량한 가을 하늘과 함께 모처럼 활기를 띄었던 놀이터는 다시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운 장소가 되어버렸다.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기어코 미끄럼틀로 뛰어가는 아가의 손을 당기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갑자기 궁금해져 한번 계산해 봤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전국엔 6만 2315개의 놀이터가 있다. 놀이터를 가장 많이 이용할 걸로 추정되는 2~13세 인구수는 515만 2,152명이다. 대충 놀이터 한 곳 당 약 83명의 아이들이 몰린다는 셈이 나온다. 


6만여 개의 놀이터들이 모두 ‘쓸만한’ 곳은 아닐 것이다. 차도나 주차장에 붙어 있거나, 숙박시설과 같은 유해환경에 노출돼 있는 경우도 많다. 담배 피우러 나온 어른들, 아지트를 찾아온 10대들에게 점령되기도 한다. 동네에 ‘카페 거리’가 생기자 밀려드는 나들이객을 수용하기 위해 놀이터를 폐쇄하고 주차장을 만들겠다고 했다가 뭇매를 맞은 지자체도 있다. 


그나마 지상주차장이 없는 아파트는 상황이 낫다. 놀이터가 폐쇄돼도 꾸역꾸역 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아파트 사이를 오가며 킥보드나 자전거를 탈 수 있다. 하다못해 화단에서 솔방울 줍기를 하거나 개미를 구경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가는 배달 오토바이와 택배 차량들을 조심한다면. 


다세대 주택가는 상황이 더 열악하다. 집 밖에 발 딛는 순간 인도와 차도의 분리가 없는 좁은 골목이 펼쳐지는 환경에선, 놀이터라는 안전지대가 아이들을 위한 유일한 공간이다. 실제로 어린이 1인당 놀이 면적은 거주지의 부동산 가격과 비례하는 양상을 보인다. 슬프게도 주거 격차가 ‘놀 권리’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초입에서 발견한 글귀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다. 아이들에게 ‘놀 권리’는 권리를 넘어선 생존이다. 잘 노는 건 신체와 정서 발달을 위한 핵심 요소이기도하다. 그래선지 유엔 아동 권리 협약은 “모든 어린이는 충분히 쉬고 놀 권리가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유엔은 “사회와 공공기관이 놀 권리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규정한다. 한국은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에 수시로 경고를 받는 나라 중 하나다. 2019년에도 “놀이할 수 있는 충분한 시설을 보장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이 땅의 부모들은 내 아이의 ‘놀 권리’를 오롯이 홀로 떠 앉고 책임져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 우리 아이와 어디서 뭘 하고 놀 지 오늘도 고민에 빠진 부모들에게 공감과 경의,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온갖 기발한 방식으로 놀 거리를 찾아내는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시베리아보다 매섭다는 한국의 길고 혹독한 겨울이 다가온다. 추위에 지지 않겠다는, 하루하루 단 30분이라도 신명 나게 놀아보겠다는 각오를 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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