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있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나는 수업장학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기억을 짚어보면 군대를 제대하고 했던 첫 번째 임상장학까지 이어진다. 전역한 그 해, 나는 6학급의 소규모 학교로 복직했고, 교직 전반에 걸쳐 적응에 어려움이 있었다. 경력교사들이 업무를 서로 토스하기 시작하면 결국 힘없는 교사에게 일이 돌아가는데, 그 당시 그 힘없는 교사가 나였다. 일에 치이고 선배교사들의 관계-사실은 가스라이팅-에 치인 내게 좋은 수업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보다 어떻게 내일을 버틸지가 더 걱정스러웠다. 그 당시에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 누구보다도 내가 더 학교 가기를 싫어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첫 임상장학을 했다.
수업 장학을 하는데 정말 교육청에서 장학사가 장학을 했다(그 당시는 교육지원청이 아니라 교육청이었다). 나는 과학 실험 수업을 준비했는데, 지도서의 내용을 토대로 수업을 했다. 백반 결정을 만드는 실험이었는데, 과포화상태의 용액이 식어서 결정이 생기기까지는 여러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라, 결과물이 나올 수 없었다. 사고 없이 실험이 끝나고, 장학사의 피드백이 있었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수업 행동 분석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는데, 장학사는 홀로 열심히 적은 참관록을 주며 몇 가지 조언을 했다. 세심하게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피드백을 주었는데,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내용은 단 한 가지였다.
손님이 왔으면 특별한 음식을 내 와야지요.
일상 수업을 공개하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나의 꼬꼬마 교사 시절에는 경기도에도 수업실기대회가 있었고, 승진이 미덕이었던 풍토에 그 수업실기 입상이 중요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쇼 수업'이 좋은 수업이라는 착시가 만연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지도서의 내용을 틀에 앉힌 수업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받은 것이었다. 사실 그 장학사는 상당히 매너 있었고, 나를 지원하기 위해 따로 자료집도 줄 정도로 정성을 보였지만, 내겐 좋은 기억을 남기지 않았다. 권위주의 시절 그 장학사가 까마득한 후배교사를 위해 보인 상냥함과 진실됨은 '손님 대접을 잘해야 했다'는 단 한 마디의 말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되어 버렸다.
경력이 차고, 학부모 공개 수업이나 동료장학을 꾸준히 했지만, 늘 마음에 드는 생각은 '이걸 굳이 왜 하나?'였다. 누군가가 지켜보는 수업을 위해 인디스쿨에서 그럴싸한 지도안을 다운로드하여 동료들과 같은 수업을 하는 것은 내 일상 수업과 같지 않았다. 누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도 상당히 거슬렸다. 그나마 누가 보는 것이 좀 덜 거슬리게 된 건 박사학위를 받고 학부생을 상대로 강의하면서부터였다. 세상 모든 교육학을 섭렵하여서 강사인 당신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한 교대 3학년 학생들의 눈빛을 견디면서 누가 보는 수업을 하는 것에 조금 익숙해졌다. 그래도 수업 공개에 익숙해지는 것과 수업 공개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동료장학은 교사들을 불필요하게 힘들게 하는 억압의 수단이었다. 수석교사로서 첫 동료장학을 하기까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수석교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한 동료장학에서, 나는 몇 가지 다른 역할을 수행했다. 첫 번째로 사전협의회에 참석하여 지도안을 함께 검토하고 좋은 수업을 위한 아이디어를 덧보태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모든 수업을 40분 동안 참관하여 수업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을 해석하며 메모를 남기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공동지도안을 작성하는 경우 매 수업이 끝날 때마다 같은 수업을 진행하게 될 다른 선생님들에게 참관을 통해 도출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필요하다면 변형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네 번째로, 수업이 끝나고 나서 수업에 대한 해석과 수업자의 시각에서 보지 못한 여러 일들을 알려주고, 전문적인 수업을 위해 고민할 것들을 이야기 나누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주로 입직 10년 이하의 상대적 저경력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수석교사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주관한 사전협의회는 참 냉랭했다. 딱 보아도 학년부장이 일상수업을 토대로 지도안을 짜 왔고, 나머지 참가자들은 별 생각이 없이 참여한 것처럼 느껴졌다. 인디스쿨에서 남이 만든 지도안을 받아오지 않고 일상수업을 보여주기로 한 결정이 너무 좋았지만, 바쁠 시기에 그것도 학년에서 제일 바쁜 학년부장이 주도하는 것이 내심 마음이 불편했다. 다른 선생님들이 수동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는데, 그 와중에 말을 함부로 하는 교사도 있어서 그 불편함은 더 컸다. 첫 번째 수업이 시작되고 차차 개선해 나아가기로 하기로 하였는데,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행될지 조금은 걱정이 들었다.
월요일에 첫 번째 수업이 시작되고 그런 걱정은 많이 줄었다. 바쁜 와중에 전담시간을 활용해 동료의 수업을 참관하는 선생님들이 있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수업 개선을 위한 조언을 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도 조언을 토대로 수업 계획을 자기의 스타일에 맞게 바꾸고 공동 계획과 다르게 수업을 준비해 시연했다. 확실히 주말에 가까워질수록 수업의 질이 향상되었다. 수업을 하는 선생님들과 함께 참관하던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 그리고 나도 느끼는 것이었다.
10년 이하의 선생님들은 방과 후에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필요한 경우, 자료를 만들어 수업과 교육에 대해 생각해 볼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년동안 한 번도 그런 경험을 못해본 후배교사들은 그 시간을 매우 고마워했다. 자기가 수업을 하고도 형식적인 참관록 이외에는 피드백도 받지 못한 시간들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제일 환상적인 경험은 내가 특정 학년의 모든 선생님이 준비한 수업을 40분 내내 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많은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스럽지만, 그건 수석교사로서 내가 할 일이었다. 선생님들마다 가진 강점과 각 학급이 처한 문제들, 그리고 그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간 형식적으로 남의 수업을 보면서 느끼지 못한 것들을 느끼게 되었다. 학생과 소통하는 방식의 강점과 새로운 접근에 감탄하고, 수업 중 발생한 문제에서 내 과거 경험을 떠올리며 어려움에 공감했다. 내가 여러 교실의 문화를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좋은 걸 그동안 몇몇 관리자들만 하고 있었구나. 그분들은 앞으로 수업할 일이 없는 분들인데, 아이러니하게 수업을 안 할 분들이 수업 전문성을 기르고 있었다니- 선생님들이 동료 수업을 많이 보면 참 좋을 텐데...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더니, 그게 내 이야기였다. 동료장학 주간을 전후로, 나는 여전히 선생님 다수의 반발을 느낀다. 특히 사전사후협의회에서 불편함을 드러내는 선생님들이 많다. 내가 뭔가를 적는 걸 가지고도 가볍게 항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의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수석교사가 되고 나서 분명한 생각의 변화가 나타났다. 선생님이 어떻게 반응하든, 동료장학이 중요하다는 믿음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이 좋은 걸 어떻게 느끼게 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