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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충영 Jan 03. 2024

[철없는 아저씨의 배우 도전기 (4)]

배우가 되고 싶은, 은퇴한 정부장의 실시간 르포르타주

관종 본능 때문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연기를 해야 했던 때가 딱 한번 있었다.  대학 3학년 겨울 방학 때 호주로 한 달간 홈스테이 연수를 가기 위해 돈을 모아야 했다. 학교 게시판에 우연히 본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는  흥미롭게도 산타 할아버지 모집이었다. 산타 할아버지로 분장해서 아이들에게 책 선물을 나눠 주는 거였다. 물론 학부모, 이벤트 회사, 출판사가 미리 계약을 하고 돈을 지불한 상태에서 선물을 배송하는 일이었다. 돈도 필요했고 호기심도 동해서 전화를 걸어 이벤트 회사로 참가 신청을 했더니 한날한시에 어디로 오라고 했다. 그곳은 산타 스쿨이었다. 1일 산타 연기 수업을 하는 곳이었다. 산타 할아버지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해 줄 얘기를 연습했다. "내가 누군지 알겠니? 바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예요.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러 왔지요. 우리 어린이가 올 한 해 착한 일을 많이 해서 특별히 선물 주러 왔어요." 하면서 목쉰 할아버지 목소리를 연습했다. 당시 20대였던 내게 노인 연기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일당은 박했다. 크리스마스 당일까지 일주일을 은평구, 성북구, 노원구, 용산구를 돌았는데 승용차가 없었던 나는 산타 옷을 입고 대중교통을 타고 돌아다니기가 너무 힘들었다. 산타 수염을 달고, 산타 모자를 쓰고, 산타 옷을 입고 책 선물이 든 큰 주머니를 매고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아이들이 선물 달라고 난리를 쳤다. '야~ 저리 가!!!'라고 쫒으며 동심을 파괴할 수도 없고, 책 선물 받을 아이들이 이미 정해져 있어 줄 게 없던 나는 난감했다. 대중교통 이동이 너무 힘들어 결국 오토바이를 가진 친한 친구에게 좀 태워 달라고 했다. 그 친구 덕분에 이동이 편했지만 끝나고 삼겹살을 사주니 나한테는 남는 것도 없었다. 그냥 자원봉사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산타 할아버지를 보고 신나서 팔짝팔짝 뛰는 아이들 모습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갖고 온 선물이 책이라는 걸 알고 "산타 할아버지 이거 말고 다른 건 없어요? 장난감은 없어요?" 하고 집요하게 보채는 아이 앞에선 당황스러웠다. 어떤 센스 있는 어머니는 문 앞에서 미리 만나 책 말고 줄 다른 선물을 미리 내게 건네 주기도 했다. 


알바 마지막 날인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자 나는 극도로 지쳐 버렸다. 일당에 비해 교통비와 밥값 지출이 너무 많아서 이 일을 내가 왜 하는지 회의감에 치를 떨었다. 설상가상으로 빙판길에 넘어져 안경알에 금이 갔다. 안경점 갈 시간도 없어 그냥 스카치 테이프로 대충 붙인 다음 배송을 했다. 마지막 날은 이브라 그런지 신청이 몰려서 그만큼 방문할 집이 많았다. 오후 내내 선물을 배송하고 마지막 배송지인 동부 이촌동의 집에는 거의 밤 12시 넘어 도착할 것 같았다. 미리 전화해서 늦을 것 같은데 그래도 방문해도 되냐니깐 아이 어머니가 무척 짜증을 내면서도 어쨌든 꼭 와 달라고 했다. 허기지고 파김치가 된 몸, 금이가고 서리가 껴 잘 보이지도 않는 안경알, 휘몰아치는 찬 바람, 발걸음은 몹시도 무거웠다. 시간은 새벽 1시. 동부이촌동 어느 아파트의 초인종을 눌렀다. 어머니가 애를 안고 나왔는데 애는 자고 있었다. 너무 미안했다. 엄마가 아이에게 "경호야~ 산타 할아버지 왔어! 선물 갖고 오셨네~" 아이가 눈을 비비고 껌뻑이더니, "와아~ 산타 할아버지다... "라고 했다. 나의 산타 멘트가 시작되었다. "우리 경호가 착한 일 많이 해서 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주러 왔지롱." 경호는 나를 뚫어져라 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어?  산타가 왜 이래? 안경이 깨졌어. 엄마! 산타 할아버지가 왜 이래?" 갑자기 머리가 하얘졌다. 아이 엄마의 당황한 눈 빛이 나를 쏘았다. 순간 '아이가 나를 절대 의심하게 해선 안된다.' 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아~ 경호야... 산타 할아버지가 사실 오다가 큰 사고가 났어요. 썰매도 부서지고 루돌프도 다치고.. 하지만 경호 선물 주려고 아픈 몸을 이끌고 할아버지가 이렇게 온 거란다."  맞다. 사고는 안 났지만 아픈건 사실이었다. 돈도 안 되는 알바를 한다는 자괴감에, 지친 몸에 나는 진짜 아팠고 아마 경호는 나의 충혈된 눈을 보았을 터였다. 나를 보던 경호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산타 할아버지 마이 아파? 마이 아파?" 경호가 내 뺨을 어루만졌고 갑자기 뽀뽀를 했다. 순간 모든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아이에게 선물을 전해 주었고,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 엄마에게 살짝 윙크를 하고, 나는 동부 이촌동의 그 아파트를 나섰다. 돈은 못 벌었지만, 안경 깨진 것까지 고려하면 사실 적자였지만,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퇴근할 수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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