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한 번의 죽음과 두 번의 탄생

결핍과 성장

by 뿌리와 날개

내 인생은 나의 것


결혼을 하면 그때부터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 된다. 그런데, 결혼한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결혼 이전에도 자신의 인생을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 누리며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었느냐고.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이는 성인이었지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부모님과 강하게 얽혀있었다. 심지어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간섭은커녕 형편이 되는 한 하고 싶은 일을 최대한 하고 살 수 있도록 지원해주셨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결혼을 해 남편 그늘 밑으로 들어가는 데에도 큰 불만이 없었다. 나의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일부의 인생이었으니까.


혼자 살면서 서서히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나이 서른도 되기 전에 내 인생에서 내 이름 석자로 사는 대신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엄마로 살겠다고 인생의 항로를 결정했었다는 것을. 자식의 인생이 자식 것인 줄은 알았으나 남편의 인생은 결국 남편 것이고, 내 인생만이 오롯이 내 것임을 그때는 몰랐다. 그가 그의 인생에서 승승장구하면 나는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일구지 않아도 그의 밥을 차려주는 것만으로 따라서 승승장구하는 줄 착각했다, 우리는 부부고 가족이니까.


내 인생이 내 것이라는 이 단순하고도 엄청난 진리를 깨닫자 나는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늘 갖고 있을 때에는 그 소중함과 가치를 몰랐다가 한번 빼앗겼다 다시 찾게 되는 경험을 통해 그제야 내 인생의 진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처음 태어난 나는, 이혼으로 치닫는 과정을 통해 한번 죽음을 경험했으며, 이혼을 딛고 일어나는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태어났다.








다시 태어난 삶


한번 죽었다 다시 태어나면서 제일 먼저 달라진 것은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내 인생이 오로지 내 손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인생이 일생에 단 한 번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자 무엇을 이뤄야 한다거나 또는 이뤘다고 해서, 무엇을 가져야 한다거나 또는 가졌다고 해서 내 삶이 아름다운 것이 아님을 알았다. 생이란, 오늘 지금 이 자리에 내가 큰 불편함 없이 숨을 쉬고 있다는 자체로 짜릿한 것이다.




나는 살아있다!

그리고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내 인생이 소중해지자 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소중해졌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지만 시도하지 못했던 것을 시작으로,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피아노, 우쿨렐레, 기타와 같은 관심 있는 악기를 배우기도 하고, 난생처음 줌바, 폴댄스 같은 춤도 배워보고, 수영, 태권도, 하이킹도 즐겼으며 여행도 내키면 언제든지 다녔다. 대학에 다니면 Uni Sport라고 해서 저렴하게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다. 언제나 아이 맡길 곳이 문제였지만, 나는 틈나는 대로 아이를 맡기고 최대한 하고 싶은 것을 했다.


결혼과 이혼으로 내 인생이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했었지만 살면 살수록 그것은 결혼과 이혼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서있었더라면 그런 결혼을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이혼의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처절하게 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다시 돌려받은 내 인생인데, 나라는 사람을 전처럼 내버려 두고 홀대하고 싶지 않았다. 미혼일 때에도 나 자신에게 큰 관심이 없었던 내가 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나를 아끼고 발전시키며, 한 인간으로서 더욱더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설


1943년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가 내세운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크게 다섯 가지의 욕구 단계가 있으며, 이전의 욕구 단계가 충족되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출처 : https://blog.daum.net/goog_news/1815



이 이론으로 나는 왜 내가 결혼하기 이전에 스스로의 성장과 발전에 별 관심이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부모님이 조성해준 환경을 통해 가장 아랫단계인 생리적인 욕구는 충분히 충족했지만, 안전의 욕구와 사랑 및 사회적 욕구는 완벽히 충족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랬기 때문에 그다음 단계인 존경과 자아실현의 욕구로 넘어가지 못한 채로 성인이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통해 그 아랫단계의 욕구를 채우려 했던 것 같다.


놀라운 것은 남편을 만나 함께 한 5년 간의 시간을 통해 나의 부모로부터 완벽히 충족되지 못했던 안전의 욕구와 사랑 및 사회적 욕구가 충족되었고, 출산과 양육을 통해 존경의 욕구로 넘어가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나의 내적인 성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귀여운 동양 인형인 줄 알고 예뻐했는데 자꾸 제멋대로 굴려고 하니 피곤했던 것이다. 결국 남편은 기껏 이룬 이 피라미드의 근간을 뒤흔들어 나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고, 나는 생리적 욕구부터 다시 피라미드를 쌓아야 했다.


그러나 독일법과 제도의 울타리 속에서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었고, 남편을 통해 이미 뛰어넘은 안전의 욕구와 사랑 및 사회적 욕구도 금세 다시 채워졌다. 심지어 이번에는 내 손으로 직접 쌓은 것이라 더욱 단단했다. 독일에서 혼자 아기를 키우며 살아내는 과정을 통해 자율성을 배우고 존경의 욕구를 충족했으며, 마침내 내 인생을 스스로 가꿔가는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자아실현의 욕구에까지 닿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단계에 이르고 보니, 나를 가꾸고 성장시킬 수 있었던 20대, 그렇게 소중했던 시간을 왜 아까운 줄 모르고 허비했나 하는 안타까움도 들지만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되었다고 나를 위로한다. 최근에는 이 이론에 관해 비판도 있고, 매슬로우 본인도 죽기 전에 자신의 가설을 보완 및 수정하는 등 여러 의견이 있으니 관심 있다면 직접 찾아보기 바란다. 어찌 되었건 나는 개인적으로 매슬로우의 피라미드와 유사한 단계를 통해 상위 욕구로 올라가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내면의 결핍이 상당히 채워지고 난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다


의외로 20대는 자존감이 가장 낮은 시기라고 한다. 젊고 아름답지만, 아직 내적으로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로 나와 이미 많은 것을 이룬 기성세대들과 경쟁하며 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난생처음 경쟁을 경험하며 아이들이 치솟던 자존감에 처음으로 타격을 입는 시기인 것과 유사한 듯하다. 그리고 20대는 나를 낳고 길러준 부모로부터 멀어져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 말은, 이제 차츰 어린 시절의 상처와 결핍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할 때라는 것이다.


내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그나마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나 받았을 것으로 예상되는 것들을 최대한 활용해 그 상처와 결핍을 스스로 치유해나가야 한다.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우리 몸과 유전적 기질은 받았을 테니 말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부모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을 자유와 기회도 동시에 얻게 된다. 무엇보다 본인이 원한다면 성인이 되어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충분히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우리는 우리의 결핍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른 채, 때로는 결핍이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인생이라는 여정에 던져진다.


그렇게 대략 10년 정도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다 누군가 나를 건져줄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잠시 안착한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결국 어느 누구에게 훌륭하게 안착을 해도(한다고 착각해도) 삐그덕거리고, 불안정하고, 불편하고, 심지어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그 안착은 결국 나에게로의 회귀여야 하기 때문이다. 허우적거리는 나를 건져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그 상태로 섣불리 다른 사람을 잡았다가는 같이 허우적거리기 십상이다. 다른 인물들은 그저 들러리일 뿐, 내가 딛고 설 단단한 땅은 나 스스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쪽을 누르면 그만큼 다른 쪽이 튀어나오는 것이 결핍이라고 생각한다. 내 아이는 아빠 없이 엄마가 혼자서 키운 아이라 아이다운 철없음은 없지만, 독립적이고 문제 파악과 해결 능력이 뛰어나다. 아이의 환경이 아이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버지가 없는 그는 “여성”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아버지 역할과 가정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며, 상황 대처능력과 자립심이 뛰어난 남자로 자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부모의 불화로 인해 성인이 되어 가정의 절실함과 소중함을 추구한다. 누군가는 통제하는 부모로 인해 어른이 되어 독립과 자유를 추구한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완벽한 부모로 인해 부모를 떠나 대충 사는 삶의 기쁨을 누리고, 누군가는 아픈 부모로 인해 건강한 삶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다.


나만의 결핍과 상처를 깨닫고, 받아들이고, 결핍으로 인해 과잉으로 얻게 된 무엇인가를 찾아내 성장의 원동력으로 사용할 줄 알게 되며, 더 나아가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어루만질 줄 알게 될 때, 비로소 나는 성장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이혼은 그런 성장의 길로 가는 지름길이 되어주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goodtherapy.org/blog/its-for-you-not-them-forgive-to-help-yourself-heal-0710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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