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모든 것을 가진 삶

감사와 만족

by 뿌리와 날개

벽 네 개와 지붕이 주는 기쁨


보호소에서 집을 구해 나온 뒤 신기한 경험을 반복했다. 아침마다 침대에서 눈을 뜰 때면 본능적으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잠깐 멈칫했다가 집을 구해 이사 왔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이상 살 곳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이내 편안함이 찾아왔다. 꽤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밤에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벽 네 개와 꽉 닫힌 지붕이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는 아기와 나, 단 둘만의 공간에서 우리가 안전하다는 사실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이러한 만족감은 집이 크다거나 가구가 화려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유모차를 밀고 거리를 나서면 사방천지 빼곡한 창문들 속에 아기와 나, 둘이 몸 누일 방 한 칸 없는 당장의 현실이 얼마나 서글프고 기가 막혔던가. 둥지가 없어 낮이고 밤이고 허공 속에서 불안한 날갯짓을 멈출 수 없었던 나는, 겨울이 되기 전 집을 구할 수 있기를 매일같이 소망했다. 안전한 보금자리를 잃고 아기와 떠돌며, 그렇게 ‘우리 집’이라는 공간의 소중함을 배웠다.




크지 않아도 된다.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
온기가 감도는 안전한 내 공간,
그것이면 족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울 때면, 또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갑자기 문득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지며 깊은 안도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한 번씩 그런 느낌을 받고 나면 등줄기가 시원해진다. 충격적인 경험은 때때로 몸에 각인되어 남기도 하는데, 나에게는 이 벽 네 개와 비 피할 지붕이 주는 안도감이 그렇다.








너랑 나, 살았으니 되었다


가정이 깨졌을 때의 느낌은 타고 있던 배가 박살 나 물에 빠져서 머리만 내놓고 동동 떠 있는 공포와 비슷했다. 내가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실행한 이혼이 아니다 보니 더욱 그런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일 때 조차도 내 곁에는 아기가 있었다. 아기를 보면, 남편이 가져간 모든 것이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주고도 다시 얻을 수 없는 내 아기가 지금 품에 있으니 다른 것은 차차 다시 이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기가 있어서 다행이었고, 아프지 않고 잘 자라주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내가 아프지 않고 잘 견디고 있는 것이 또 다행이었다. 이혼의 충격으로 시작된 알레르기 때문에 힘들었지만, 생사가 오고 가는 질병도 아니었고, 아기가 아니라 내가 얻은 병이니 다행이었다. 고된 일상에 골골거리기 일수였지만 완벽하게 건강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와중에 잘 버티고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고, 어디 크게 아픈 곳 없으니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정말 말도 못 하게 힘들었던 처음 몇 년 동안 온갖 고통과 번뇌의 끝에서 나를 버티게 해 줬던 그 생각, ‘아기와 나, 우리 둘이 안 죽고 살아있으니 그걸로 되었다’는 그 말을 정리해 쓰고 보니 깔끔하니 보기 좋다. 하지만 그 한 문장에 생각이 미치기까지 현실 속 삶의 과정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만 있었겠는가. 남들은 엊그제 낳은 것 같은 아이가 벌써 유치원을 가네, 초등학교를 가네 하며 시간 가는 것을 아쉬워했지만, 그 시절 내 아기는 아무리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두 돌이 채 되지 않았다. 지독히도 긴 시간이었다.


아기가 곁에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지만 그래도 혼자서 아기를 키우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힘들었다. 남들은 커버린 아이를 보며 꼬꼬마 아기였을 적이 그립다고 들 하지만 나는 추호도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당시를, 가만히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때를, 서로에게 서로 뿐이었던 나와 내 어린 자식은 그렇게 어찌어찌 버텨내었다.








버릴 수 있을 때가 비로소 가졌을 때


처음 이사를 왔을 때, 집안에 놓인 것이 별로 없어 말을 하면 방 안에 소리가 울렸다. 집이 집 같지도 않았거니와 없는 물건 투성이라 생활의 불편함도 컸다. 이웃 간의 나눔이 발달한 독일이다 보니 누가 안 쓰는 물건이라며 준다면, 주는 대로 거절 않고 물건들을 받기 시작했다. 쇼핑과 거리가 멀었던 내가, 벼룩시장에 가면 쓸만한 아기 옷과 신발 같은 것들을 정신없이 쓸어 담고 있었다. 그렇게 모은 물건이 차고 넘치면 자리가 모자란다며 서랍장을 구해 다시 꽉꽉 채워 넣었다.


집에 어울리지 않는 전등, 마시지도 않는 탄산수 제조기, 망가지면 여분으로 쓰려고 한두 개씩 더 챙겨둔 커피포트와 토스터기들, 아기가 입을 수 있으려면 앞으로 2-3년은 더 크기를 기다려야 하는 옷과 신발들…. 집 안 곳곳은 언젠가부터 쓰지도 않는 물건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필요 없는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공간을 만들다 만들다 결국 더 이상 쌓아둘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조금씩 느낌이 왔다. 나는 그동안 빈 집이 아니라 한 순간에 텅 비워진 내 마음속을 채우고 있었다는 것을….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중고시장에 되팔기도 하고, 기부도 하고, 정 쓸 수 없는 것은 부지런히 버렸다. 지금은 집안에 물건이 쌓일 때마다 수시로 상자에 담아 다른 독일 사람들이 그렇듯 가져가라고 길거리에 내놓지만, 처음에는 정말 쉽지 않았다. 그게 왜 그렇게 어려웠던 것일까? 필요한 것은 다 가졌다는 만족감, 그러니 굳이 다 이고 지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내 안에서 차오르기 시작했을 때에서야 나는 비로소 하나, 둘 버릴 수 있었다.


우리 인생도 그와 같은 것일까? 돈에 대한 만족감,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 자식이 잘 자라기를 바라는 염원, 내가 꿈꾸는 삶의 모습대로 살고 싶은 욕망…. 이 모든 것에 만족하고자 우리는 열심히 산다지만, 어쩌면 만족이라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떠나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모으던 물건을 비우는 과정을 통해, 가진 것이 없으니 모아야 한다는 내면의 불안함 대신 필요한 것은 모두 가졌으니 이제 되었다는 편안함을 얻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다 가진 삶


헤어지기 직전 남편은 나와 아기를 한국에 보내 놓고 말없이 우리의 물건들을 모조리 처분해버렸다. 별거 시작 후 몇 달이 지나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의 행동에 화가 나 분을 참을 수 없을 때마다, 나는 그 값을 치르고 대신 사랑하는 아기를 무사히 데려온 것임을 스스로 상기시키며 마음을 다스렸다. 아기는 실제로 내가 그와의 결혼생활로 얻은 것들 중에서 그에게 뺏기지 않은 단 하나이자 나의 모든 것이었다. 아기만 있다면, 그가 내게서 거둬간 모든 것은 다시 마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지금, 그를 떠나기 전까지 내가 갖고 있던 것들 중에서 내가 다시 갖지 못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 당시 내가 믿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다시 일궈낸 것이다, 그것도 모두 내 취향으로. 물질적인 생활수준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그와 함께 살 때보다 훨씬 풍요롭다. 무엇보다 내 곁에는 이제 초등학생으로 훌쩍 자란 사랑하는 아들과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살아가는 것은 녹록지 않으며 앞으로도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갈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가진 지금의 모든 것에 만족한다. 가끔 살다가 마음이 급해질 때면 진정 내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무엇인지 되새겨보고는 한다. 그럼 이내 마음속에 일었던 불안이 잠잠해진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정말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중에 내가 아직도 갖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와 아이, 나의 연인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친구들,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사랑할 수 있는 삶. 이 모든 소중한 것들이 나에게 이미 진작부터 허락되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축복,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한다.





<이미지 출처>

https://www.goodtherapy.org/blog/its-for-you-not-them-forgive-to-help-yourself-heal-0710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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