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시절인연

용서

by 뿌리와 날개

저 혼자 쓰이는 글


“움켜쥔 결혼, 그 끈을 놓았을 때”라는 제목의 매거진을 구상했을 당시 열다섯 개의 챕터 별 주제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쓰다 보니 글의 순서도 달라지고, 주제의 성격에 따라 합치고 다시 나누는 등 변화가 있었다. 결국 15화 분량의 브런치 북이 14화로 정리가 되었고, 14라는 어설픈 숫자가 내심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15화를 맞추고자 억지로 군더더기를 붙일 수는 없었다. 본래 기획했던 주제가 다 들어갔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기획을 끝내고 연재를 시작한 만큼 쓰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마지막을 향해 글을 쓸수록 손끝은 더뎌졌다. 작년 8월에 시작한 연재를, 그것도 시작부터 끝까지 구상이 끝난 매거진을 해가 바뀌고도 끝내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반년 간 별다른 이유 없이 마무리를 미루고 미뤘던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14화로 끝날 뻔했던 이 매거진에 더 채워 넣을 챕터가 있었으며, 그것을 채울 수 있으려면 딱 반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었다는 것을….


글의 구상도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고 시작도 내가 했으되, 마무리는 글이 저 스스로 하고 있다. 내가 생명을 불어넣어 준 글인데, 그 글로 하여금 내가 다시 한번 발을 내딛게 되다니 오묘한 일이다. 과연, 글이 나에게 열네 번째 챕터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시절인연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던 3월의 어느 날, 다양한 국적의 어학당 친구들이 어울려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이제는 전남편이 되어버린 그를 처음 만났다. 햇살을 등지고 서 있던 그가 눈이 부셔서 나는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한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어색하게 인사하는 나에게 성큼 다가와 유럽식 인사를 하려던 그는 이내 내가 키가 작다는 것을 깨닫고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졌고, 나에게 키를 맞춘 그는 상냥하게 나를 끌어안으며 인사했다.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2대 2로 저녁에 맥주 한 잔 더 하자고 하더니, 친구와 함께 나온 나와 달리 그는 자기 친구를 두고 혼자 나왔다. 노상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고 집에 가는 길, 그는 괜찮다는 나를 굳이 데려다준다며 따라왔다. 밤바람이 차가워 몸을 움츠리는 나와 친구를 보고는 그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바로 입고 있던 후드티를 벗어 나에게만 입혀주려 했다. 친하지도 않은 남자가 벗어주는 티를, 나는 끝내 거절했고 그는 못내 아쉬워하며 다시 입었다.


그 뒤로 그는 틈만 나면 나에게 연락을 했고, 만나고 나면 언제나 나를 내가 사는 아파트 공동 현관문까지 데려다주었다. 언젠가 그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마주 섰는데, 그가 얼빠진 머저리 같은 표정으로 헤벌쭉 웃으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너 정말 예쁘다….
예뻐….



그렇게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2년 간 장거리 연애를 하며 작은 연못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눈물과 적지 않은 비행기표값을 하늘에 뿌렸다. 만나면 기쁘고 좋아서 울었고, 헤어질 땐 아쉽고 서러워서 울었고, 떨어져 있는 동안은 그립고 또 그리워서 울었다. 그는 언제나 눈물범벅이 된 못난 내 얼굴에 아랑곳하지 않고 뽀뽀를 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했고, 예쁜 아기도 낳았다.


그리고 헤어졌다.


아니, 이혼했다.








나를 위한 용서


그를 용서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처음엔 그냥 분통이 터지고 화가 났다. 가슴에서 시뻘건 마그마가 들끓었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폭발해 쏟아져내리는 용암으로 가슴이 데고 아팠다 굳어지기를 반복했다.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자 그다음에는 미움이 찾아왔다. 그가 밉고, 또 미웠다. 그리고 그 미움의 끝은 원망이었다. 나와 아기를 이렇게 만든 그가 원망스러웠다.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남편과 그렇게 헤어지고 석 달이 채 안된 시점에 누군가 댓글을 남겼다. 너무 분노하는 것은 아이에게도 좋은 모습이 아니니 남편을 용서하라고…. 참으로 건방지고도 잔인한 댓글이 아닐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가정이 박살 나 아직 실감조차 못하고 있는 나에게 바람이 나 젖먹이 자식까지 버리고 간 남편을 용서하라니…. 아마도 그 댓글을 단 사람은 진정으로 증오하는 누군가를 용서해 본 적이 없으리라.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더니 3년, 4년, 5년 지나 내 인생에 조금씩 봄이 오자 어느새 원망도 눈 녹듯이 사라지고 새싹이 파릇파릇 돋았다. 이따금 마음속에 피는 꽃을 보며, 슬그머니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때도 종종 생겼다. 그래도 용서를 상상해 본 적은 없다. 미워하지 않으니 그걸로 충분하며, 그를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이 굳이 있나 싶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지금의 남자 친구를 만나 함께 위기를 겪고, 나를 실망시킨 그를 용서하는 과정을 겪으며 나는 깨달았다. 지금껏 살면서 나는, 나를 아프게 한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오랜 생각 끝에, 나에게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꼭 용서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리스트의 끝에는 나 자신이 있다는 것도…. 나의 전남편은 그 리스트의 시작이었다.


용서는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라, 용서를 할 수 있는 때가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를 증오하는 마음에서 그를 용서하고 싶어 지기까지, 딱 7년이 걸렸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나는 이제 당신을 용서하려고 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을 용서합니다.

당신은 또한 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나를 한없이 빛나게 사랑해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수많은 밤, 나를 고통 속에 잠 못 들게 하고 두려움에 울부짖게 만들었던 것을 용서합니다.

함께 하는 내내 당신은 언제나 차가운 침대에 나보다 먼저 들어가 따뜻하게 데워주고, 그 누구보다 내 눈물을 많이 닦아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영원히 나만을 사랑한다던 맹세를 저버리고 다른 여자를 사랑한 것을 용서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했던 그 시간들만큼은 늘 나에게 진실되었으며, 나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행복한 가정을 갖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다고 했던 나에게 이혼을 안겨 준 것을 용서합니다.

당신은 내가 가장 아프고 외로웠던 시간 속에서 안정된 가정을 갈급했을 때 나와 가정을 이뤄주고, 잠시나마 가정의 안정과 행복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내 소중한 자식이 아버지 없이 자라는 것을 평생 지켜봐야 하는 고통을 안겨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나의 어여쁜 자식을 나와 만나게 해 준 고마운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내 아이의 절반의 뿌리가 당신인 이상, 당신이 티끌만 한 주저함 조차도 없이 가슴속 깊이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날이 결국 내 아이 가슴에 맺힌 멍울 역시 풀어지는 날이 될 것임을 알기에….


어리고 부족했던 나를 많이 이해하고 사랑해준 것에 고맙고, 힘든 시기에 든든하게 내 곁에 있어주었던 것에 감사합니다.

나에게 소중한 아이를 선물해줘서 고맙고, 나를 비로소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에 감사합니다.


당신 앞에 펼쳐진 날들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goodtherapy.org/blog/its-for-you-not-them-forgive-to-help-yourself-heal-0710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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