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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리와날개 Sep 07. 2023

혹독한 유럽의 첫겨울, 믿을 건 따뜻한 남편 품뿐

뿌리와 날개의 국제커플 연대기/ 국제결혼 상편

여느 보통의 커플들이 그렇듯 연애 초반에는 힘의 균형이 거의 여자인 제 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애를 시작했을 때에도 전남편은 저와 연애하기 위해서 기본 회화만 빠르게 습득한 상태였기 때문에 같이 중국여행을 할 때에도 비행기표며, 기차표, 숙박, 현지 식사, 관광까지 전부 다 제가 케어를 했습니다. 돈도 각자 냈고요.


그래서 더더욱 연애 초반 6개월은 제가 주도적으로 이 관계를 이끌어갑니다. 롱디를 할 때에도 방학 때 한국과 독일을 번갈아가면서 지냈기 때문에 한국에 오면 제가 그 사람의 모든 걸 책임졌고, 제가 독일에 가면 그 사람이 저의 모든 걸 책임졌습니다. 그래서 연애하는 동안은 힘의 균형이 잘 맞았어요.


국제결혼이나 독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 제가 큰 부담이 없었던 것도, 우리가 유럽이 아니라 한국이나 중국, 적어도 동남아시아 정도에는 살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몇 년 지나 이 가슴 뛰는 사랑의 호르몬이 걷히고 나면 결혼생활이 남편에게 기울어진 운동장 위의 게임이 될 거라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전남편은 그 당시에도 그랬고, 결혼을 해서도 그랬고 독일 땅에 미련이 전혀 없었어요. 그 사람이 야자수가 즐비한 중국의 해안도시로 유학을 왔던 이유도 우중충한 독일 날씨에 질렸기 때문이었고, 저를 만나 한국의 여름바다와 잠들지 않는 도시, 서울을 경험해 보고서는 더더욱 아시아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죠. 최대한 빨리 롱디를 마치고 결혼을 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살림을 차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생판 낯선 제3 국보다 둘 중 한 명이라도 기반이 있는 곳에서 시작을 해야 덜 고생하지 않겠습니까?


당시에는 누가 봐도 영어도 잘 못하는 한국여자인 저보다 IBM에서 인턴쉽 중인 독일남자인 그 친구가 훨씬 유능했고, 미래에 대한 비전도 있었죠. 가장 중요했던 건 그 사람은 성공하고 싶은 야망이 컸지만 저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련 없이 저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그의 커리어를 서포트하기로 합니다.


그가 잘되는 것이 결국 우리가 잘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가족이니까요. 그래서 독일에서 일단 자리 잡으면서 남편이 몇 년 커리어를 쌓는 동안 저도 남편의 나라와 독일어를 배우면서 신혼을 즐기기로 합니다.


그리고 남편 직장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홍콩이나 말레이시아, 상하이 같이 다국적 기업이 많은 멋진 도시로 발령을 받아 가서 아기도 낳고 정착해 살기로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저도 전공을 살려서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살림을 한다고 심적으로 꿀릴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계획은 완벽했죠, 그 남자가 자기 직장 상사와 바람이 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때는 제가 오로지 빨리 대학 졸업하고 남편과 결혼할 생각으로 캐나다 워홀도 포기했기 때문에 여러 나라를 구경해보고 싶은 아쉬움이 좀 남아있었거든요. 남편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결혼만 하면 네가 원하는 나라 어디든지 가서 살게 해 줄 테니까 아쉬워하지 말라고 했었어요.








그 당시에 무비자 3개월로 유럽체류가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12월에 졸업시험을 마치고 종강을 하자마자 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짐을 싸서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 독일로 들어옵니다.


연애하면서 항상 왔다 갔다 했던 길이니까 그날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옷 몇 벌, 책 몇 권 넣어서 비행기를 탔는데 여행가방 하나 들고 여행하듯 출국했던 이 날의 결정이 알고 보니 결혼이민이었다는 사실을, 저는 이혼하고도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비로소 문득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독일로 넘어와서 바로 결혼하고 첫 반년 동안 남편 회사 로테이션 도는데 따라다니느라 도시를 바꾼 이사만 4번을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저와 남편은 결혼생활 내내 중국어로 대화를 하죠.


그런데 대학 4년, 유학생활 1년 동안 배운 제 전공중국어 실력을 연애하려고 세 달 속성으로 배운 유럽남자가 따라오겠습니까? 그러니 제 중국어가 계속해서 한없이 쉬운 레벨로 내려오는 거죠. 대화가 안 되니까.


남편은 독일어가 유창한데, 제 답답한 독일어 실력에 맞춰서 모국어를 하려니 성에 차겠습니까? 일상생활을 유지하려면 빨리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데 언제까지 제가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독일어로 설명을 하고 앉아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독일어를 안 쓰려고 하죠.


연애 2년은 그리움에 눈이 멀어서 몰랐는데 결혼하고 반년이 지나고 보니 우리끼리 외계어가 되어버린 말도 안 되는 중국어로 대화를 하고 산 지 어느새 2년 반 정도가 되어버린 겁니다.


제가 한국어 하는 걸 보면서 짐작은 하셨겠지만, 저는 대학 때 학보사 기자도 했었고, 한국어가 타고난 재주이다 보니 보통 사람보다 특히 언어를 다루는 일에 예민합니다. 그런 제가 남편이라는 사람과 속 시원하게 대화를 할 수가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런데 계속 로테이션을 도니까 독일에 와서도 어학원 등록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사 온 도시에서 얼마나 머물지도 모르고, 다음에는 어디로 이사를 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덜컥 등록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계속 기다리라는 남편 말만 듣고 기다리다가 결국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독일에 온 지 4개월이 넘어가던 차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기차 타고 타 도시로 두 달간 독일어를 배우러 다닙니다.








보셨다시피 연애 2년, 심지어 결혼하고도 아기 생길 때까지 1년 반 정도는 저도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상당히 독립적으로 살았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남편 만나기 전에 캐나다 워홀도 준비해 놨고, 남편 만났을 때에도 중국에서 혼자 유학하며 잘 살고 있었고.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에도, 주중이든 주말이든 항상 아르바이트해서 제 용돈 제가 벌어서 썼고, 중국 유학도 제가 직전학기 성적장학금 받고 제 돈으로 간 겁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그동안 안 했더니 제가 뭐 아주 그냥 등신, 바보천지, 대가리가 꽃밭이라 독일에 넘어온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물론 제가 20대 초반까지 방황도 많이 했고, 그래서 얼떨결에 애들 소꿉장난하듯이 결혼해서 대차게 인생풍파를 겪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애 데리고 열심히 살아온 것에서 아실 수 있듯이 결혼 전까지는 나름 K-장녀로서 착실하게 잘 살았습니다.


결혼할 때에도 제가 돈 벌 욕심은 없었어도 공부에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남편도 아시아 쪽으로 발령받게 되면 전공을 살려서 중문학 석사공부를 계속하라고 지원해 주겠다고도 했었어요.


연애 2년, 3년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던 그날까지 도합 5년 간 남편의 입장은 한결같았습니다. ‘취직을 하든, 공부를 하든 너 원하는 대로 해라! 나는 다 좋다. 살림만 하고 살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살림만 해도 상관없다. 돈은 내가 잘 벌기 때문이다. 제일 중요한 건 너의 행복이다.’


그렇게 결혼 첫 반년 동안 짐 싸고, 짐 풀고를 4번을 하면서 정신없이 살다가 드디어 반년 만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정착을 합니다. 여름휴가 직전 6월에 이사를 갔기 때문에 어학원은 대학 새 학기 시작에 맞춰서 10월에 개강을 했고요.


첫 한 달 회사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살다가 7월에 집 구해서 또 이사를 하는데, 벌써 다섯 번째 이사죠. 그래도 그때부터는 가구며, 살림살이 하나씩 장만하며 본격적으로 살림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전까지는 살림살이가 별로 없어가지고 된장찌개를 끓였는데 글쎄 국자가 없는 거예요. 숟가락으로 찌개를 옮겨 담으니까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그것도 재밌다고 남편이랑 둘이 까르르까르르 웃었습니다. 신혼이 그렇게 좋았어요.


10월 어학원 개강까지 세 달 남는 시간 동안 남편이 출근하면 저는 집 정리하고, 밑반찬 만들고, 라디오도 듣고, 드라마도 보고, 집에서 혼자 그렇게 놀다가 남편 퇴근 시간되면 마중 가서 같이 팔짱 끼고 시내도 구경하고, 장도 보고 그랬습니다. 독일 들어와서 7개월 만에 드디어 이사 갈 걱정 없이 처음 맞는 안정적인 생활이었죠.


제가 먹는 거 좋아하니까 남편이 비엔나에 있는 호텔 식당들 저렴한 쿠폰 나오면 사놨다가 코스 요리도 먹으러 가고, 주말 되면 비엔나 경치가 내려다보이는 야외 수영장 가서 하루 종일 먹고 마시고 놀고, 남편 회사에서 뭐 파티나 행사 초대받으면 같이 가고, 비엔나니까 오페라, 극장도 많잖아요? 발레나 음악회도 보러 가고.


그 왜, 외국사는 여자들 인스타 하고 유튜브 하면서 브이로그 하는 거 그거 저도 10년 전에 다 해봤어요. 그때는 카카오스토리.








남편은 독일을 싫어했듯이 독일의 식문화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서 항상 한식을 먹었고, 요리는 당연히 늘 제가 했죠. 남편이 나가서 힘들게 돈도 벌어오는데 쉬는 날 밥까지 시켜야겠습니까?


캠핑 영상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희 엄마는 그 음식솜씨 좋다는 전라도 여자에 저희 아빠는 직업이 요리삽니다. 그래서 저도 시집오기 전까지 입만 고급이었지 제 손으로 요리해 먹고살던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그런데 저 만나기 전까지 맛없는 빵쪼가리 먹고 사느라 힘들었다면서 제가 만든 말도 안 되는 된장찌개를 변변한 밑반찬도 없이 조미김에 계란 프라이만 해줘도 쌀 한 톨을 안 남기고 밥그릇을 싹싹 비우는데, 이 사람이 예쁘겠습니까, 안 이쁘겠습니까?


그동안 얼마나 음식다운 음식을 못 먹고살았으면 저러나 싶어서 있는 솜씨, 없는 솜씨 끌어다가 삼시세끼 열심히 해서 먹였죠. 이젠 내 남편이고 우리 집 가장이잖아요. 가끔 제가 점심도시락이라도 싸서 회사 앞으로 가면 꼭 불러서 사무실 데려다가 다 인사시키고, 자랑하고, 도시락 보여주고 그랬어요.


제가 너무 창피해서 그러지 말리는데도 너무 예쁘고 자랑스럽다는데 어떡합니까? 나를 그렇게 좋아라 하는데. 저는 그런 그 사람이 신기하기도 하고, 너무 고마웠습니다.


내가 봐도 별 볼일 없는 나 같은 게 뭐라고 저렇게 잘난 남자가 나를 이렇게 이뻐해주나 싶어서 정말 모든 게 다 고마웠고, 이런 좋은 사람을 배필로 맞은 것에 너무 감사했어요. 저에게 과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10월에 개강해서는 독일어 공부하고,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여기저기 파티 다니고, 크리스마스 휴가 때 프라하로 여행도 가고 재미있었습니다. 비엔나는 또 그동안 우리가 유럽에서 살았던 도시 중에 가장 크고 화려한 도시였기 때문에 매일매일이 즐거웠고요.


삐까뻔쩍한 서울에서 살다가 독일 도시들을 다니면요, 어지간한 도시들은 다 심심합니다.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뮌헨, 쾰른 뭐 다 휑 해요. 그나마 비엔나는 그래도 규모적으로 가장 서울에 가까운 도시였기 때문에 제가 심적으로 향수를 덜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또 거기서부터는 우리가 정착을 했기 때문에 제가 한국 사람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좋은 언니들도 알게 됐고, 설날에 같이 만두도 빚고, 매실청 담그는 것도 배우고, 신혼살림도 배우고 하면서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또 다른 쪽으로는 슬슬 향수병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남편이랑 알콩달콩 지내면서 달달한 신혼을 보내느라 몰랐는데 어느 가을날 문득, 자고 일어나니까 카톡으로 부재중 전화가 떠 있는데 순간 심장이 덜컹하는 거예요. 그때는 이유를 몰랐죠.


그런데 몇 번 반복이 되고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이게 혹시라도 부모님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 급하게 연락이 온 게 아닌가 싶어서 본능적으로 겁이 났던 겁니다. 그때 생각을 하게 되죠.


부모님 연세가 지금 50대.

내가 지금부터 매년 한국을 간다고 해도
앞으로 30번이나 볼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미치겠는 거예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국제결혼? 그때까지는 생각 없이 행복하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국제결혼에 대한 저의 선택에 현타가 세게 옵니다. 그때부터 한동안 제가 부재중 전화만 보면 심장이랑 손이 떨려가지고 좀 힘들었습니다.


외국 사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평탄하게 잘 살다가도 언제든 하루아침에 부모님 부고을 소식받고 서둘러 비행기 타게 될 거라는 각오를 마음에 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리고 독일어는 참 아무리 공부해도 늘지를 않대요. 한국에서 독일어 기본기를 탄탄하게 배워놓고 왔어도 막상 현지에 오니까 이 사람들이 하는 독일어가 안들리더라고요. 오스트리아 독일어는 표준독일어랑 많이 다르기도 했고요.


또 독일어는 제가 좋아서, 원해서 배우는 언어가 아니잖습니까? 남편 때문에 갑자기 생뚱맞게 배우게 된 거 다 보니까 동기부여도 안되고, 유럽에 오니까 어학원을 가도 애들이 정나미가 없는 거예요. 이제는 제가 기혼이고 나이도 많아서 어린애들이랑 왁자지껄 어울리기도 쉽지 않았고, 그래서 마음을 나눌 친구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 따뜻한 중국에서 자유롭고 생기발랄하게 공부하면서 언제든 떠나고 싶으면 친구들이랑 훌쩍 여행도 떠나고, 매일같이 저렴하고 맛있는 중국음식을 즐기면서, 젊은 친구들끼리 가슴 설레는 플러팅도 하며 제가 좋아하는 언어를 배우던 유학생활이랑은 전혀 다른 겁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처음 맞는 온전한 겨울 아닙니까? 독일로 돌아오고 보니 비엔나의 날씨는 축복받은 거였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지만, 그 당시 거기 살 때는 한국에서 살다가 막 넘어간 거였기 때문에 그 갑자기 확 줄어든 일조량과 축축한 겨울이 우울해서 너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한국은 살이 에이는 겨울이라도 해가 쨍하게 뜨고 뜨고, 눈이 한 3일 왔어도 다시 날씨가 개지 않습니까? 유럽은 그냥 서너 달 내내 해다운 해가 안 뜹니다. 그니까 해만 떴다 하면 전부 밖에 나가서 미친 듯이 일광욕을 하는 거예요.


게다가 키는 다 저보다 머리통 두 개만큼씩 큰 코쟁이들이 억세고 싸늘하기는 또 얼마나 싸늘한 지. 처음 맞는 유럽의 길고 긴 겨울은 정말 가혹했습니다. 따뜻한 우리 남편 품 말고는 어디 의지할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남편이 참 좋았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고 이듬해 봄에 쉬면서 전 학기에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데 도저히 다 소화를 못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한 학기 쉬면서 천천히 공부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시머어니와 올 2월에 돌아가신 시할머님, 그리고 우리 시이모님께서 저희도 보러 오실 겸 비엔나에 오셔서 함께 여행을 했습니다. 그렇게 따뜻한 봄을 지나 여름이 시작되고 저는 빈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결혼하고 1년 7개월 만의 일이죠.


나머지 이야기들은 국제결혼 하편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영상이 즐거우셨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구독과 좋아요는 세상 모든 한부모 가정을 향한 자유입니다. 그럼 다음 영상에서 또 만나요! 안녕!




https://youtube.com/watch?v=zg5RmMnx-LM&si=Eg5OINeoIOfpkr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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