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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리와날개 Oct 03. 2023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구나!

뿌날의 국제커플 연대기/ 국제싱글맘 하편

그때까지는 변호사가 하는 말도 거의 못 알아들을 때라 그날도 독일 친구랑 같이 변호사사무실에 갔어요. 그랬더니 변호사가 저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걸 받아오냐면서 서류뭉치를 들이밉니다.


친구가 받아서 읽기 시작하는데, 저는 올 게 왔구나 싶은 거죠. 슬쩍 보니까 굵은 글씨로 중간에 HAUSVERBOT이라고 쓰여있는 거예요. 하우스는 집, 페아봇은 뭐 금지구역마다 붙어있으니까 아무리 독어가 짧아도 딱 보니 알겠더라고요. 접근금지명령이구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거예요.


변호사는 도대체 왜 그런 짓거리를 했냐면서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 줄 아녜요. 그래서 모른다고 했죠. 진짜 모르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되냐고 했더니, 남편이 애랑 저에 대해서 더 이상 부양의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돈은 어차피 세 달째 안 주고 있잖아요?” 그랬어요. 저는 남편 이름으로 돈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그랬더니 막 이 변호사가 흥분하기 시작하면서 남편이 돈 안 준다는 소리 좀 제발 집어치우라고, 네가 지금 정부에서 받는 돈이 전부 남편 돈이라면서, 남편의 부양 의무가 사라지면 지금 나오는 돈도 끊긴다는 거예요.


돈이 끊겨???



그 말을 딱 듣는데 순간적으로 이 심장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딱딱하게 오그라붙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거예요. 이 돈마저 끊기면, 나랑 아기는 당장 어떻게 삽니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직도 전혀 이해가 안 되지만 변호사가 그렇다잖아요.


그래서 제가 막 숨을 고르고 있으니까 친구가 제대신 질문리스트를 물어봐 줍니다. 도대체 그 전남편과 부양비 문제는 어떻게 된 것이며, 남편이 갖고 있는 아기 사진들이랑 세간은 어떻게 나누고, 보증금은 또 어떻게 되는 건지. 근데 이 변호사가 그 부양비 얘기를 듣더니 다시 흥분을 하기 시작하면서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그때는 독일 복지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전혀 모를 때였잖아요. 사방팔방 만나는 사람마다 전부 남편이 돈 줘야 된다, 이렇게 처자식을 길바닥에 내버리는 건 말도 안 된다, 독일 법이 그럴 리가 없다면서 입방아를 찧어대는데, 정작 물어보면 뭘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들 갸우뚱해요.


당연하죠, 자기들도 이혼을 해봤어야 알지! 그리고 이혼을 해도, 저처럼 돈 한 푼 없이 길바닥으로 쫓겨난 경우가 어디 흔합니까? 그러니까 제가 가는 길을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복지국가라고 가만히 앉아서 입 벌리고 있으면 감이 입으로 쏙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저번 영상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부서 별로 책임분담도 확실하고, 사람마다 처한 상황도 다르기 때문에 하나하나 자기가 확인해서 해당되는 수당들을 스스로 챙겨야지, 방구석에 가만히 있어도 통장으로 돈이 꽂히는 시스템이 아니란 말이에요.


근데 독어는 못 알아듣지, 이 나라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지, 어디다 물어보고 싶어도 뭘 알아야 물어보죠! 내가 지금 뭘 모르고 그래서 뭘 놓치고 있는 건지 당최 파악이 안 되는데. 진짜 갑갑해 죽겠는 거예요.


누가 이렇게 큰 그림만이라도 대충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정작 변호사는 정부에서 돈 따박따박 나오는데 뭐가 문제냐 그러죠. 남편이 돈을 내는지 안 내는지는 자기도 확인해 줄 수 없는 부분이래요.


아니 보호소 들어온 뒤로 매달 돈이 들어오기는 들어오는데 왜 전남편이 주는 게 아니고 정부가 주는지, 일한 적도 없는 내가 대체 왜 실업급여라는 명목으로 돈을 받는지 파악이 안 되니까 받아 쓰면서도 마음이 불안한 거예요.


다른 이혼한 한국 사람들은 전부 전남편 계좌에서 돈이 들어온다고 하는데, 저는 아니었거든요. 일단 이렇게 받았다가 나중에 다 뱉어내야 할 돈인지, 안심하고 써도 되는 건지, 그럼 내 전남편은 도대체 왜 돈을 안 내는 건지, 이 돈은 도대체 언제까지 나오는 건지 너무 답답한 거예요


그래서 관공서 갈 때마다 전남편이 돈을 안 낸다고, 재산 분할받는 것도 변호사는 모른다고 한다고, 제발 이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좀 알려달라고 물어보고 다녔어요. 난 절박하니까. 그랬더니 이제 이 관공서 직원들이 깜짝 놀라죠. 그래서 막 제 변호사한테 전화를 넣어서 자초지종을 물었나 봐요.


그러니까 이 변호사 입장에서는 짜증이 났겠죠. 변호사 비용도 지가 못 내서 국선으로 온 여자가 말도 못 알아듣는 주제에 자기 딴에는 그래도 생계 위협 없게 신청할 거 다 해줬는데 이 여자는 관공서마다 돌아다니면서 허튼짓하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접근금지명령까지 받아온 거 아닙니까?


유책주의가 없는 나라에서 감정절제가 뼛속까지 박힌 이 독일 변호사 눈에 시도 때도 없이 울고 다니는 제가 또 또라이 같기는 얼마나 또라이 같았겠어요? 그런 데다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남편은 돈도 안 주잖아요!” 이딴 소리나 하고 앉았으니까 어이가 없는 거죠.


공적으로 만나는 독일 사람들, 특히 변호사들은요, 말하는 게 모노톤입니다. 시리만도 못해요. 근데 그렇게 세 달을 모노톤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여자가 뚜껑이 열리니까 나중에는 막 서류뭉치를 들고 책상에 탕탕 쳐대면서 소리를, 소리를 지르는데….


어? 내가 도대체 몇 번씩이나 설명을 해줬는데도 못 알아듣고 엄한 데 싸돌아다니면서 나한테 관공서 쪽에서 일 똑바로 안 하냐는 전화를 두 통이나 받게 하냐고! 나는 할 만큼 해서 더 할 게 없는데 그냥 가만히 앉아서 주는 돈 받기만 하면 되는 걸 왜 들쑤시고 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이런 것까지 받아오냐는 거예요.


물론 그 사람도 변호사고, 제 독일친구도 같이 갔으니까 뭐 씨발저팔까지는 아니었겠죠. 그래도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 욕을 처먹잖아요? 세상 그 어떤 낯선 언어를 갖다 놔도 다 알아들어집니다. 저 같은 거랑은 상종도 하기 싫었는지 제 쪽은 쳐다도 안 보고 제 친구한테만 그렇게 제 욕을, 욕을 해대는데…


와… 진짜 이건 뭐 부끄럽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되고, 쪽팔린다는 표현도 그때 당시 제가 느꼈던 감정에 비하면 그냥 귀여운 수준입니다. 발가벗고 광화문 네거리를 미친년같이 뛰어다녀도 그 순간보다 더 수치스러웠을까요?


난생처음 느껴보는 그런 어마어마한 수치심을, 더군다나 그런 처지에서 진짜 면전에다 대고 그런 수치심을 느끼잖아요. 그냥 콱 혀 깨물고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고 싶습니다.








그 수치심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 무는데 그 순간 깨닫게 되죠.


아…
나구나!

내가 지금까지 그 개새끼 짓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이 모든
엿같은 일들의 원흉이
바로 다름 아닌,

“나”였구나!



그걸 깨닫는 순간 탁 맥이 풀리면서, 뱃속 저 밑바닥 깊은 곳에서부터 그 어떤 뜨거운 감정이 여기 목울대까지 치솟아서 꽉 끼어가지고 아프기 시작하는데, 변호사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입술이 다 터지도록 꾹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팍 터지면서 꺼이꺼이 웁니다.


집에 오는 내내 친구 차 안에서 주체할 수 없이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어요. 제 자신이 그렇게 밉고 부끄러울 수가 없더라고요. ‘세상에, 이게 나 내 탓이었구나!’


그랬습니다. 남편과 살면서 무슨 일이 있었건, 어떤 식으로 파경을 맞았건 아기와 그 사람 집을 나온 뒤로 벌어진 이 모든 엉망진창의 일들은 전부 제가 다 벌인 일이었던 거예요. 제가 지난 3년 동안 한 성인으로서 제 삶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도 지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남편 그늘을 벗어나자마자 그렇게 쓰나미가 덮쳤던 겁니다.


이게 그 사람이 잘했다는 말은 아니에요. 의를 저버리고 비열하게 끝을 맺은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도덕과 윤리, 그것도 한국인의 관점에서나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마땅한 의무를 저버린 것이지 독일법에 따르면 그 사람은 아무 잘못도 한 게 없었습니다.


저랑 아기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고, 감금이나 탈취를 한 것도 아니죠. 제 물건을 팔고 버린 것도 법적으로 유효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증명할 수 없습니다. 아시다피시 법정에서는 증거가 없으면 없던 일이에요.


외도는 당연히 불법이 아닙니다. 성인 남녀의 아랫도리 사정은 기혼이든, 미혼이든 독일 정부가 관여할 바가 아니니까요. 한국도 제 발로 갔고, 남편 집도 제 발로 나왔죠. 그 사람이 착실하게 낸 세금으로 제가 정부에서 최저생계비를 받고 사니 그 사람은 독일 시민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법을 어긴 사람이 있다면 그 순간 개인적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공적인 장소에서 한 남자와 그 사람의 직장상사 두 사람의 커리어에 흠집을 내려고 한 저인 거죠. 독일에서는 어지간해서 비양육자가 양육비 지급의무를 피하는 게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의무가 사라지는 드문 케이스 중에 하나가 바로 제가 한 짓거리인 겁니다. 비양육자의 생계수단에 해를 끼치는 거. 상대방의 돈벌이를 망가뜨려놓고 어떻게 그 사람한테 돈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날 접근금지명령을 받고서야 비로소, 이 모든 일은 내 책임이며 지금부터라도 나에게 닥친 일들은 오롯이 나 스스로 묵묵히 견뎌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지금 여기서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앞으로 더 큰 화가 닥치겠구나!



저는 그때까지 제가 있는 곳이 바닥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루아침에 해외에서 아기랑 길바닥에 나앉았는데 이보다 더 최악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있더라고요. 남편이 양육비를 안 줘도 되는 가능성을 봤죠? 그럼 제가 이 젖먹이 데리고 말도 못 하는데 어디 가서 돈을 법니까?


독일인들 시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미친 짓거리 계속하고 다니면 양육권 박탈당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기 뺏기는 거죠? 보호소 살면서 제가 정신줄 놓을 뻔한 적도 있지 않습니까?


또 그때는 정말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머릿속으로 그놈을 죽이는 상상도 여러 번 했습니다. 칼로 수십 번씩… 그럼 막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와요. 몇 번을 시뮬레이션해 봅니다. 내가 진짜 그 사람 회사 앞에 기다렸다가 이런 일을 벌이면, 그럼 어떻게 될까?


피칠갑을 하고 얼이 빠져있는 제 모습이 막 보이죠. 바람나서 처자식을 버린 독일인 아버지는 엄마 손에 죽고, 남편을 죽인 한국인 엄마는 감옥에 갔다는 뉴스가 온 독일 사회에 떠들썩하고.


그런 비극적 가족사를 뒤로 하고 혼혈아로 혼자 자랄 이 아이가 어디 제정신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반정신병자로 우울증에, 마약에 그렇게 평생을 부모정에 목말라서 어쩌다 자기 인생이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고 불쌍하게 떠돌다 죽겠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까, 내 부모, 내 자식이 어떻게 된 것도 아닌데 이혼 그 까짓게, 그게 도대체 뭐라고 그런 미련한 짓을 벌입니까…. 내가 지금 정신만 차리면 될걸. 그래서 저는 그 날부로 남편을 제 마음속에서 죽입니다.


그때까지는 싱글맘이라는 말이 입에 안 붙어서 버벅거리고, 그 말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거든요. 준비도 없이 갑자기 너무 빠르게 벌어진 일이니까. 그런데 그날부터 “나는 이제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싱글맘이다”라는 이 타이틀을 딱 마음에 새기고 언제 어디서든 “Ich bin Alleinerziehendemutter.”(나는 싱글맘입니다.)라는 문장을 버벅거리지 않고 할 수 있도록 외웁니다.


불평불만? 더 이상 없죠. 오로지 제가 해야 할 일들에만 집중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어느 날 법륜스님을 통해 알게 돼요. 그 당시 저의 깨달음이 제1의 화살은 맞았을지언정 제2, 제3의 화살은 피할 수 있게 해 준 감사한 일이었다는 것을요.


사람은 더 큰 화가 닥쳐야 그 이전에 닥친 일이 화가 아니라 복이었다는 걸 안답니다. 그래서 작은 화를 당했을 때 그게 복인 줄 알고 감사해야지, 그걸 모르고 원망을 하면 자꾸 더 큰 화를 부르게 된다는 거예요. 저도 딱 그 꼴이었던 거죠. 그런데 다행히도 그 접근금지명령 덕에 이 악순환을 끊게 되는 겁니다.








자, 첫 3개월은 너무 힘들어서 그냥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고 했죠. 저 일이 있고부터는 그냥 묵묵히 견뎌내기 시작하니까 그다음 3개월은 그냥 미치겠는 수준 정도 되더라고요. 그리고 그다음 6개월은 그냥 미치고 팔짝 뛰겠던 첫 초반 3개월 생각하면 그럭저럭 할 수 있을 만큼 어느 정도 적응이 돼요.


그렇게 딱 1년을 지내니까요, 이제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베이스가 갖춰집니다. 이게, 사람이 이혼을 하더라도 그냥 살던 집에 살면서, 하던 일 계속하고, 들어오던 돈 그대로 쓰고, 원래 있던 핸드폰, 원래 있던 와이파이 그냥 쓰고 했으면 괜찮았을 일이에요.


그런데 저는 정말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 갑자기 길바닥에 내몰려가지고 모든 걸 다, 거기다 아기까지 데리고 이 모든 걸 다 혼자 해야 됐다 보니까 초반이 그렇게 쓰나미같이 힘들었던 겁니다.


이혼하고 힘들었던 거 80퍼센트가 집, 월세, 생활비, 교통편, 보험, 통신같이 진짜 이 독일에서의 일상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본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었어요. 아무리 거지 같았던 전남편이었어도 그놈이 그동안 쳐줬던 울타리가 그렇게 컸던 겁니다.


그래서 가끔 막 제가 힘들었을 때 이야기를 하면 딱 그 영상만 본 사람들은 그러잖아요. 그렇게 힘든데 왜 한국 안 오고 독일 사냐고. 제가 그 첫 일 년이 그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바로 한국으로 갔겠죠.


근데 싱글맘 9년 차인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힘들었던 일을 다 합쳐도 혼인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억지로 버텼던 그 1년의 고생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다시 하라면 못해요. 그런데 첫 1년 동안 사는데 필요한 기본 인프라를 다 마련해 놓으니까 2년 차부터는 그냥 똑같은 게 돌고 돌아요. 3년 차쯤 되니까 내버려 둬도 잘 굴러갑니다.


그 사이에 아기도 커서 유치원도 가고, 학교도 가고, 저는 독일어도 배우고, 친구들도 사귀고, 일도 하면서 자리를 잡았잖아요. 그렇다 보니 9년 차인 지금은 설렁설렁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는 겁니다.


그니까 국제이혼 앞두신 분들도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야 뭐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대책 없이 맞닥뜨린 일이다 보니 정말 온몸으로 그 풍파를 겪어야 됐지만, 여러분은 안 그러셔도 되잖아요. 적어도 제가 겪어낸 일들에 대해서는 노하우를 다 알려드리니까 괜찮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분노에 이글거리다가 제정신이 돌아오니까요. 슬슬 다행스러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말도 안 통하는 남의 나라에서 여기저기 내 사정을 눈물 섞어가며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다니던 거? 때로는 서글플 때도 있었죠. 근데, 적어도 돈 나올 구멍은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법과 제도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주고 있고요. 도와주던 주변 독일 사람들도, 일처리 하는 공무원들도 누구 하나 저희한테 혀를 끌끌 찬다거나, 남의 나라 와서 남의 세금 등쳐먹는다거나 하는 식의 멸시를 주지 않았어요. 아기가 어렸기 때문에 아무도 저희의 생존권을 두고 감히 왈가왈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게 정말 고맙더라고요. 위기에 처한 사람한테 일단 재정적으로 생존권을 보장해 주는 거. 그래서 내가 어떤 처지에 놓였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은 지킬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래서 서글프기는 했으되 비참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게 정말 고마웠어요.


또 그 해 여름이 유난히 덥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사달이 난 게 추운 겨울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남편이 아기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제가 데리고 나갈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국제이혼에 관한 영상들을 본격적으로 찍을 때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지만, 저처럼 아기 아빠가 아이에게 관심이 없고 양육권까지 포기해 준다는 건 국제이혼을 하는 입장에서는 여러분, 정말 축복이나 마찬가집니다. 저도 처음에는 남들이 그런 얘기하면 잘 와닿지 않았는데 살면 살수록 더 그래요.


그리고 아기랑 제가 어디 딱히 아픈 데가 없는 것도 감사했습니다. 제가 만약에 어디 몸이라도 불편했던가, 지금 당장 우리 아기가 어디 중환자실에라도 누웠어봐요. 그런 생각을 하면 막 고마워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특히 제가 이 모든 과정을 어린 아기랑 함께 하지 않았습니까? 하루는 녹초가 된 몸으로 유모차를 밀고 길을 걷는데, 아니 나는 이 평화로운 시국에 공짜돈 받으러 다니면서도 고생이라고 이 지랄을 떠는데, 6.25 때 전쟁 통에 피난 가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막 역사책 보면 나오잖아요. 유모차는 고사하고 등에 이 무거운 애기를 업고, 짐은 한가득 양손에, 머리 위에 이고 지고, 신발이나 뭐 온전합니까? 짚신, 고무신 신고 생사가 오고 가는 길을 몇 백 킬로씩 겨울에 걸으면서 그 시절에 종이 기저귀나 또 있었습니까? 먹을 게 없는데 젖은 나왔겠어요? 그럼 애기가 얼마나 울어재꼈겠습니까?


근데 적군한테 들키면 총살이잖아요. 아우, 막 그런 생각을 하니까 지금 제 처지가 너무너무 감사한 겁니다. 암만 외국 땅에서 고생스럽다고 한들, 전쟁 통 피난길만 할까 싶으니까 참 고맙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때 깨달았어요. 왜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 좋아진 세상에 살면서도 그렇게 옛날에 못 먹고, 못 살던 때 얘기 하면서 서러워하시는지. 격세지감이라 그런 겁니다. 이해해 주셔야 돼요.


저는 그렇게 남편이 떠나고 빈자리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 그리고 새로 얻어가는 것들에 감사하면서 조금씩 싱글맘의 삶에 적응해 나갑니다. 싱글맘으로 단단히 성장해 가는 모든 제 모습은 브런치북 <움켜쥔 결혼, 그 끈을 놓았을 때>에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영상 하단에 설명란이랑 댓글창에 링크 첨부해 놓을게요.


오늘도 영상이 즐거우셨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구독과 좋아요는 자유, 세상 모든 한부모가정을 향한 자유입니다! 그럼 다음 영상에서 봬요, 안녕!



https://youtu.be/UYKic0x4CxI?si=ecDh0JRSh6XjT1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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