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을 곁에 두고
다가오는 11월 18일.
내가 속한 프렌들리 남성 합창단의 3차 정기 공연을 앞두고 있다. 일 년 중 합창단의 가장 큰 행사다. 한 해 동안 연습한 노래를 청중 앞에서 공개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공연일이 다가올수록 단원들은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그저께 화요일 저녁 연습 날에는 리허설을 위해 단원들 대부분이 늦게까지 노래를 불렀다. 무대에 서서 예정된 다섯 곡을 모두 소화하고 나니 목이 아프고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그럼에도 노래를 부르는 단원들의 표정은 밝았다. 모두 음악에 진심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좋아하는 걸 하니까.
3년 전 합창단에 가입했다. 듣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노래를 직접 부르고 싶어서. 합창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나에게 딱 맞는 음악놀이다. 집에서 혼자 노래를 부를 일도 없고 노래방에 갈 일도 거의 없으니까. 사람들 앞에서 독창을 할땐 음치란 사실이 탄로 날까봐 조마조마하지만 합창할 때는 음치란 사실을 잊고 입을 쩍쩍 벌린다. 내 목소리는 사라지고 감미로운 화음만 들려온다.
음정이 틀려서 합창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가급적 소리는 크게 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입만 벙긋거린다는 말은 아니다. 수년간 합창을 하며 터득한 학습효과이다. 합창에 힘을 불어 넣어주는 목소리라면 굳이 금기 사항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연습 날인 화요일 저녁을 기다리고 연습실에 가면 홍일점인 반주자의 매혹적인
피아노 반주에 맞춰 단원들과 함께 부지런히 입을 벌리며 시간가는 줄 모른다. 좋아하는 걸 하니까.
음악을 좋아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 없다. 그냥 좋아한다는 이유밖에.
칙칙한 일상에서 음악이 소소한 행복감을 주는 건 분명하다. 교회에 다니지는 않지만 성가 "변명" 이나 "기대"를 부를땐 날개를 달고 허공에 붕떠오르는 기분이다.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일상의 고민이 잠시 사라지고 내 안에 갇혀있던 또 다른 내가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순간이다.
공감과 치유란 점에서 시는 음악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리듬이란 공통 함수를
매개로 “ 시는 글로 쓴 음악이고 음악은
노래로 만들어진 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란 진은영
시인의 시집에서 시 한 편(제목: 카살스)을
찾아 읽다보면 음악이 색다르게 다가온다.
시인은 음악을 "밤의 망가진 다리" "영혼의 갈비뼈" "호박에 갇힌 푸른 깃털" "무의미"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했다. 음악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니. 시를 잘 쓰는 시인이니까 얼마나 음악도 좋아할지 상상이 된다. 시에서 음악의 여러 가지 얼굴을 본다.
이 시를 읽고 유튜브로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인 첼리스트 “카살스”의 클래식 연주곡을 찾아 들으니 신기하게도 시 속에 묘사된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나님이 다리를 절며 걷는 모습이나 영혼의 갈비뼈 같은...
음악은 – 밤의 망가진 다리/
하나님이 다리를 절며/ 걸어 나오신다//
음악은 – 영혼의 가느다란 / 빛나는 갈비뼈/ 물질의 얇은 살갗을 뚫고 나온//
음악은 – 호박에 갇힌 푸른 깃털/ 한 사람이 나무로 만든 심장 속에서/ 시간의 보석을 부수고 있다//
음악은 - 무의미/ 우주 끝까지 닿아 있는 부드러운 달의 날개 아래서/ 길들은 펼쳐졌다 잠이 들었지// (카살스 전문)ㆍ
깊어 가는 가을날, 불가사리 같은 단풍잎을
잔뜩 달고 있는 단풍나무 아래에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시를 읽어보는 건 어떨까.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마음을 흔드는
음악에 빠져보는 건 어떨까. 클래식 연주
음악이든 성악이든. 좋아하는 걸 하는 순간
만큼은 행복이 문을 열고 들어와 잠시 머물다
간다.
합창 연습을 하고 집에 가는 날에는 몸은
피곤해도 그날 불렀던 노래가 귓가에서 출렁거린다. 가사는 가물가물해도 리듬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요즘 같은 가을 밤에는 더더욱. 잠자리에 들면서도 흥얼흥얼 허밍을 한다. 가을 타는 추남(秋男)이라도 된 걸까. 그나저나 공연은 실수 없이 잘 마쳐야 할 텐데. 까무룩 눈이 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