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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co Oct 25. 2022

일 년에 한 번은 풀코스

여덟 번째 춘마 체험기

천고마비의 계절,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시간에 사람은 달린다.


책을 읽든 산책을 하든 등산을 하든

그 무엇을 하든 좋은 계절에 적어도 오늘만큼은

달리려는 의지 하나만으로 호반의 도시 춘천에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왜 달리려고 하는 걸까?

건강을 위해서? 성취감으로? 기록을 위해서?


각자 달리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동기의 근본을 파고 들어가면

새가 되어 하늘을 날고 싶은 비상의 본능이

있는 것처럼 질주본능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경쾌하게 질주하는 마라토너들을 보면

전생에 초원을 달리던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달리기 좋은 마라톤의 계절, 의암호를 끼고 사람들이 도로 위를 준마처럼 달린다.


구름은 몽실몽실 축하공연 중이다.

쿵쿵쿵, 땅을 박차고 내딛는 소리에

도로변 은행나무가 잠에서 깨어

살랑살랑  샛노란 손을 흔들며 응원한다.

 

제주에서 바다 건너 원정온 사람들,


한복을 맞춰 입고 치맛바람 날리며 질주하는 젊은 아마조네스 여단,


시각 장애우와 함께 뛰는 봉사 도우미들,


유튜브로 현장 중계방송을 하며

종횡무진하는 60 대 어르신,


나란히 옆에서 보조를 맞춰 뛰는 부부와 연인들.

어찌보면,  뛰면서 축제를 즐기러온 사람들 같다.


그들 뒤로 낯익은 사내 하나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뛰다 걷다를 반복하고 있다.


하필, 여기서 종아리에 쥐가 날게 뭐람?

무릎을 맘대로 구부리지 못하니 속도는 

둘째치고 걷기조차 힘들다.


조금이나마 발을 편하게 해 주겠다고

큰맘 먹고  새로 구입한 러닝화도 제구실을 못한다.


길이 안 들여져 양말과의 마찰로 발등에 통증만

점점 심해진다. 아침식사를 걸렀더니 밥심도 없다.   


20 킬로를 가까스로 통과한 지점,

10 킬로마다 설치된 급수대에서 생수 한통을

받아 순식간에 비웠더니 갈증은 사라져도

다시 갈등이 시작된다.


아직도 반이상 남았는데 이런 상태로 계속 갈 수

있을까?  시간내 들어가지 못하면

아예 기록도 없는데 어쩌나?  


아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지.

여기서 포기하면 영영 다시는 마라톤을 뛰기 힘들 거야. 갈 때까지 가보자.


춘천댐을 지나 30 킬로를 향해

는 불안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기다렸던 D-day, 10월의 일요일.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춘천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중 , 육체적으로 가장 길고 힘든 하루였다.


대회 당일 아침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8 시 45분, 춘천역에 도착하니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중에 마라톤 참가자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직전에 도착한 차를 타야 했는데 그걸 놓쳐버린 결과다.


역에서 대회장까지는  약 1.5 킬로미터.

15 분후인 9 시에 대회는 시작된다. 대회에 참가하려면  무조건 뛰어야 했다.


일찌감치 도착해서 여유 있게 워밍업을 하겠다는 생각은 환상이 되고 이젠 참가마저 불투명한 상황이 돼버렸다.


가까스로 물품 보관소를 찾아

소지품을 맡기고 출발하려는 대열에 합류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예고하는

불안한 전조같았다. 한바탕 홍역을 치룬뒤라

기운이 빠져 버린 탓일까?


작은 보폭과 일정한 호흡으로

끝까지 페이스를 유지하고 완주만 하자는

다짐이  무색하게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다리가 말을 들으니 전략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쥐가 풀리지 않는 발로 30분 정도 걷다 보니 주변에 대부분 걷는 사람만 보였다. 걷는 사람들로 후미그룹이 형성된 것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였다.


이런 식으로 걷다 보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결국

중간에 포기할 것이다.  반이상 이나 남은

거리를 걸어서 한시간 내 도착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힘겹게 양팔을 교차하며

뛰어가는 머리 희끗한 어르신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도 80 이상은 되신 것 같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저 어르신도 힘을 내시는 데 이건 아니지.

시계를 보니 다시 달리기 시작하면 제한시간

6 시간내 완주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의 도움으로 다리 상태가 좀 나아져 슬슬 속도를 냈다.


마의 30 로 구간에서 조금씩 힘이 살아났다.


어찌 되었건 반이상을 지나왔으니 앞으로

반도 남은 셈이다. 결승점인 시내와 가까워질수록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더..

마음을 다독거리며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번 걷거나 쉬게 되면 맥이 끊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소양강 아가씨 동상 근처를 지나

마지막 2 킬로는 어찌 뛰었는지 모른다.


얼마 남았으니 힘내자는 생각이

어느 순간 결승점이 보일 때가 되었는데..

대체 왜 안 나타나는 거야 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제한시간 5 분을 남겨두고 결승지점을 통과했다.

말 그대로 죽었다 살아났다.

단단히 각오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단조로운 일상에 악센트를 또 한 번 주다가는

일상이 멈춰버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중간에 포기했다면 나이 탓, 체력 탓이나 하며

마라톤과의 영원한 작별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홉 번째 도전의 기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쥐가 나서 길에 퍼졌을 때

달리기를 멈추고 도움을 주신 분,


계속 뛸 수 있겠냐며 자기 일처럼 걱정해준

진행요원,  불편하게 뛰는 모습을 보고

발등에 붙여보라고 반창고를 건네준 분,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 분들의 따뜻한 마음 덕에 가장 힘들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을 레이스가 되었다.


몸을 흔들어 놓고

다시 돌아온 일상이 고맙기만 하다.


지금은 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죽었다 살아 돌아온 기분이

아마 이럴 거라 느끼면서

세상이 조금 바뀌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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