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 예정시간 2분 전. 정류장까지 달린다면 적당히 탈 수 있을 법한 거리지만 무더운 날씨에 땀흘리고 싶지 않아 다음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렇게 정류장에 가까워 지니 애매하게 타야할 버스가 서있는 것이다. 문득 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다음 버스가 2~3분이면 또 오는듯하여 그냥 보내기로 했다. 귓가에 틀어둔 음악이 한곡 채 가기전에 다음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땀흘리지 않고 에어컨 가득한 버스에 타는 소정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게 가던중 살짝 막히는 느낌이 들었고, 창밖을 보니 한 승용차와 앞서 보냈던 버스가 우회전을 하며 충돌해있었다.
앞 버스를 놓친 덕에 사고를 피한 셈이었다. 경미해보이는 사고 였기에 다친 사람들은 없어보였고, 이미 버스안의 승객은 모두 내려 각자 떠나고 버스기사와 운전자, 그리고 무수한 경찰들(하필 국회 앞이라 경찰들이 많았다.)이 현장을 수습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문득 든 생각은 저 버스를 탔으면 대인 접수해서 보상도 받고 물리치료도 좀 받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것이었다. 놀랍도록 속물적인 생각이었다. 고고하려 노력해봤자, 내 안의 욕망들은 이렇게 불쑥불쑥 등장한다.
‘정류장에 뛰어갔었더라면…’이라는 생각이 이어진다. 어느새 보상과 물리치료는 내것이었어야 했고, 그것을 놓친 선택분기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쯤 생각이 닿자 실소가 흘러나온다. 결과만 놓고 얻지 못한 이득을 아쉬워한다. 그래봐야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건만 내 탐욕은 이렇게나 날뛰는걸 좋아한다. 그것도 자기 좋을대로.
큰 사고였을수도 있다. 만일 그랬다면 앞서의 선택은 아쉬움이 아니라 안도였을 것이다. 선택하기 전에 그 결과가 아쉬움일지 안도일지 알 수 있는 수는 없다.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영역은 적어도 지금 내가 살아가는 차원에서는 미지의 것이다. 살아감이란 이 불확실함 속에서 어찌저찌 선택하며 나아가는 길이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노력하는 미덕도 있지만 알수 없던 것에 의한 결과에 자책하고 고통받는 건 이 철없는 욕심 때문일 것이다.
욕심의 날뜀은 현재에 대한 부정이다. 갖지 못하고 결핍된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그 기준점은 지극히 자의적이다. 대학생때 1만원의 꽁돈이 주던 즐거움은 사회인이 된 지금의 1만원과 다르다. 가질수록 기준이 올라간다. 그 것은 더 열심히 살고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한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그 비용은 결핍과 고통이다. 이 원동력을 취함과 동시에 마음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길은 지금 현재 살아가는 것에 대한 긍정일 것이다.
보상과 물리치료를 못받아도 괜찮다. 어차피 나의 것도 아니었다. 땀흘리지 않고 에어컨 가득한 버스를 즐기고,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아 따뜻하고 촉촉한 보쌈을 먹은 것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