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의 일상 Dec 17. 2021

살구 한 봉지

한의원 일상

 아주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가진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카랑한 목소리로 나를 볼 때마다 이렇게 외쳤다. "원장님! 내 좀 죽여주이소!!!" 할머니는 허리에 신경이 깊게 눌려있어서 엉덩이 쪽으로 방사통이 있었다. 수술을 해야 할 정도였지만 연세가 90이셨다. 한의원 치료를 받고 나면 그날은 잠시 통증이 덜하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 아플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나만 보면 말했다. " 원장님. 아파서 못 살겠다! 나 좀 고통 없이 죽여주이소. 그렇게만 해주면 내가 백만 원 줄게!"  나는 자주 생각했다. 왜 의사는 신이 아니고 인간일까. 왜 고칠 수 없는 병은 이렇게 많은 걸까. 얼마나 아팠으면 "낫게 해주이소!"가 아니고 "죽게 해주이소!"일까. 안쓰러움, 나에 대한 실망감, 인생의 허무함. 짧은 시간에 여러 생각이 휘몰아치지만 애써 담담히, 의사의 말을 한다. "어머니, 집에 가서 일 하지 마시고, 치료하러 자주 오세요. 네?" 그렇게 몇 번, 간절한 마음으로 치료해드렸다. 

 한동안 안 오시더니 한의원에 카랑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 원장님!! 내 오랜만 이제? 나 그동안 수술하느라 못 왔다 아이가. 나이 많다고 병원에서도 다~ 안된다 그랬는데 딱 한 군데서 해준다고 해서 수술하고 왔다." 종종 오시던 분이 불현듯 오지 않으시면 괜히 불안감이 스물 기어 나온다. '돌아가신 건 아니겠지?'  다행히 걱정이 무색하게 증상이 많이 호전되어 오셨다. "아이고 어머니 다행이네요!" "그래, 나 많이 좋아졌는데 아직 쪼매 불편해서 침 맞으러 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치료 후 나가는 나를 할머니가 붙잡으셨다. "원장님! 있어봐라!" 그러곤 까만 비닐봉지를 불쑥 내미신다. "우리 집 앞에 살구나무가 있는데 이게 생긴 건 이래도 참~ 맛있다! 집에 가져가서 무라! 내가 원장님이 이때까지 고마워서 주는기다!" 병도 못 고치는 내가 뭐라고. 90 먹은 할머니께서 본인 키보다 큰 작대기를 한참 흔들어서 살구를 들고 오셨다. 나 주려고. 고작 나한테.  대기 이름에 뜬 할머니 이름을 보면 항상 묵직한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었다. 고치지 못하는 병이 나를 비웃는 느낌이었다. 나에 대한 실망을 자꾸 할머니한테 분출하고 있진 않을까. 다음에 오면 좀 더 잘해드려야지... 잘해드려야지.. 이런 불량한 마음을 품던 나에게 할머니는 살구 한 봉지를 주셨다. 살구는 작고 울퉁불퉁하고 못생겼다. 그리고 내가 이때까지 먹어본 살구 중에 가장 맛있는 살구였다.

작가의 이전글 빈 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